아마도 나를 처음 일본 드라마의 세계로 인도한 건 <심야식당>이었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팬을 모았던 <심야식당>은 아베 야로의 동명의 만화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다. 2009년, 일본 TBS에서 제작, 방영되었고 2016년 시즌 4부터는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해 서비스하고 있다.
<심야식당>은 자정부터 아침까지 문을 여는 작은 식당에 찾아오는 손님들과 그들이 주문하는 음식에 관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 드라마다. 음식이 주가 되다 보니 밤에 보기에는 아주 곤욕스러운 드라마라서 공복에 보지 말 것을 권장한다. 특히 오믈렛이나 문어 소시지 같은 따라하기 쉬운 음식들 일색이라 정신줄을 잡고 보지 않으면 당장 부엌으로 뛰쳐나가 일(?)을 내기가 쉽다.
사실 음식의 유혹을 버틴다 해도 넘어야 할 또 다른 관문이 있다. 바로 맥주다. <심야식당>의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주문한 음식에 맥주나 술을 곁들이는데 이 단계만큼은 뿌리치기가 정말 힘들다. 돌이켜보면 <심야식당>을 보면서 마신 맥주 캔으로 5층 높이의 빌딩 정도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맥주를 마셨던 것 같다.
<심야식당> 이후로도 나의 일드사랑은 십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지만 더 이상 영화를 볼 에너지가 없을 때 알캉달캉한 일본 드라마는 최적의 위안이다. 맥주와 함께 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 왓챠에서 발견한 일본 드라마, <짐승이 될 수 없는 우리> (2018년 NTV 방영)는 십년 동안 쌓아 온 나의 일드 목록에서 탑에 두고 싶은 수작이다. (지금은 웨이브, 왓챠 등에서 볼 수 있다.)
<짐승이 될 수 없는 우리>는 동네 술집에서 만난 한 여자, 아키라와 남자, 코세이가 술친구에서 서서히 연인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다. 일본을 대표하는 두 배우, 아라가키 유이와 마츠다 류헤이가 각각 여성, 남성 주연을 맡았다. 이야기의 구성과 연기가 모두 출중한 드라마지만 유독 이 드라마에 더 끌렸던 이유는 캐릭터들이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배경이 ‘5 탭 (tap)’ 이라고 불리는 수제 맥주집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름이 ‘5 탭’인 이유는 1번부터 5번까지 매일 다른 종류의 수제맥주 5가지만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아키라는 맥주를 종류가 아닌 숫자로 주문하는데 대부분 1번부터 시작한다. 번호를 불러주면 사장인 사이토가 맥주를 내오며 그제서야 브루어리의 이름과 함께 맥주의 종류를 말해준다. 일종의 ‘블라인드 주문’인 셈인데 언젠가 따라해보고 싶은, 흥미로운 방식이다.
드라마의 배경 이상으로 ‘5 탭’에서 소개되는 수제 맥주들은 실제 맥주 전문가에 의해 엄선된 라인업으로, 일본에서 유통되는 로컬 브루어리의 수제 맥주들이다. 드라마를 보며 놀랐던 점은 일본에도 브루어리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맥주는 아사히와 기린, 삿포로를 포함한 메이저 3사가 지배적이라 일본에 가서도 수제 맥주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짐승이 될 수 없는 우리>에 등장하는 수 많은 브루어리는 맥주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꽤 유용한 정보가 될 듯하다.
맥주에 더해 이 드라마에 빠질 수 밖에 없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대사다. 일반적으로 일본 드라마는 과장된 설정과 비현실적인 대사 때문에 드라마의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짐승이 될 수 없는 우리>는 일본 드라마 특유의 과장과 판타지적인 캐릭터, 혹은 대사 대신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주옥 같은 대사들이 빼곡하다. 가령 드라마의 1화에서 아키라는 회사에서 상사에게 갖은 수모를 겪고 5 탭으로 향한다. 힘들었던 일을 맥줏집 사장, 사이토에게 이야기하자 사이토는 “맥주를 따라주는 것 밖에 해줄 수 없어서 미안해”라며 아키라를 위로한다. 아키라는 맥주를 건네 받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 맥주가 어지러운 마음에 스며든다니까요.”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맥주가 어지러운 마음에 스며든다’는 표현처럼 우아하고 적확한 표현이 어디에 있을까. 아키라의 말처럼 좋은 맥주는, 혹은 필요한 타이밍에 마시는 맥주는 간이 아니라 마음에 스미는 법이다. 암. 그렇고 말고. 이 대목에서 아키라에게 ‘선정된’ 맥주는 ‘레어드’의 페일 에일이다. 페일 에일 (Pale Ale)은 상면발효식 (상온에서 발효하는) 맥주의 한 종류로, 에일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맥주다. 맥아와 홉의 사용량이 라거에 비해 많고 효모가 많이 살아있어 색이 진하며 향이 풍부하다. 또 다른 에일 종류인 IPA, 즉 인디안 페일 에일보다는 홉의 맛/향에 있어서 약하지만 음료처럼 마시는 라거에 비해서는 강렬한 향과 맛을 가지고 있어서 기분전환으로 마시기에는 완벽한 맥주 초이스가 된다.
분명 이 대목에서 아키라는 페일 에일 특유의 향긋함과 쌉싸름함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위로 받았을 것이다. 1화를 보면서 나 역시 에일 맥주로 위로를 받고 싶어졌다. 평소 에일 맥주의 팬이 아닌지라 냉장고에 그득히 쟁여 둔 밀맥주들을 뒤로 하고 편의점으로 향해야 했다. 수제맥주의 대전이 일어나는 시기인 만큼, 한국 편의점에도 꽤 많은 종류의 에일 맥주가 구비되어있다. 만약 에일 맥주의 입문자라면 페일 에일이나 IPA 보다는 골든 에일을 추천하고 싶다. 골든 에일은 낮은 도수에 비해 강한 향과 맛을 가졌다. 산뜻한 과일향과 튀지 않는 쓴맛의 밸런스가 매우 훌륭한 맥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에일에 비해서는 도수나 강렬함에 있어 다소 떨어지기에 에일의 매니아들 보다는 에일을 맛보고 싶은 이들을 어필할 듯하다.
<짐승이 될 수 없는 우리>에는 유독 에일 맥주가 자주 등장한다. 10개의 에피소드를 완주하면서 맥주가 마시고 싶거나, 맥주로 위로 받고 싶을 때면 나 역시 다양한 종류의 에일 맥주를 꺼내 마셨다. 사이토 상처럼 애정을 듬뿍 담아 맥주를 따라주는 사람 하나 없이 참으로 많은 맥주를 마신 셈이다. 드라마의 결말에서 아키라와 코세이는 각자의 삶에서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드디어 술친구가 아닌 연인으로 재회한다. 물론, 이들의 재회를 돕는 결정적인 존재는.....맥주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 자리한 두 잔의 맥주, 어쩌면 그것이 새로운 시작에 필요한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