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트>

극장을 나오는 길에 떠오르는 레퍼런스가 유달리 많은 작품들이 있다.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인 〈헌트〉(2022)가 그렇다. 참고로 이건 ‘베꼈다’는 흉이 아니다. 훌륭한 작품들의 장점을 솜씨 좋게 잘 취해와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니까. 도쿄에서 작전이 어그러진 뒤 일어나는 시가전은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1995)를, 첩보 조직 내에 숨은 첩자를 찾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내용은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를, 안기부 국내팀 김정도 차장(정우성)이 해외팀 직원들을 판옵티콘 구조의 취조실로 몰아넣고는 이중유리 건너편에서 각 방을 번갈아 가며 들여다보는 장면은 〈그때 그 사람들〉(2005)의 대공분실 장면을 연상시킨다. 오히려 정우성과 이정재가 함께 나오는데도 〈태양은 없다〉(1999)는 그다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좀 신기한 일이랄까. 이정재는 감독 데뷔작에서 자신을 향한 의구심을 보기 좋게 극복해냈다.

국가기구란 과연 충성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조직인가 자문하는 첩보원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나는 샘 멘데스 감독의 〈007 스카이폴〉(2012)을 떠올리기도 했다.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13년 동안 근무해 온 안기부 해외팀 박평호 차장(이정재)는 국가기구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다. 죄 없는 사람도 잠 안 재우고 팔을 뽑고 물을 끼얹으면 죄인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밑에 있는 요원들이 아무리 죽어 나가도 그걸 가슴 아파하는 게 아니라 윗선이 진노한 것을 먼저 신경 쓰는 정무감각. 이 조직은 주어진 미션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목숨이 몇 개쯤 허공에서 꺼져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졸지에 남편을 잃고 안전을 보장해 줄 망명지도 잃은 채 타국의 낯선 거리를 헤매는 표동호 국장(정재성)의 가족들을 보며, 옛 정보원의 딸 조유정(고윤정)이 자신을 ‘독재자의 하수인’이라 부르는 걸 들으며, 박평호는 짙은 피로와 환멸을 느낀다. 상황이 조금 다를 뿐, 국가기구의 일부로 살아가는 피로감은 김정도 또한 마찬가지로 느낀다.

<007 스카이폴>

〈007 스카이폴〉의 세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스탄불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본드(대니얼 크레이그)는, 총에 맞은 동료를 보고 잠시 멈칫한다. 누군가 옆에서 지혈해주지 않으면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버티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작전을 지시하는 MI6의 수장 M(주디 덴치)은 구급대를 보냈으니 어서 타겟을 쫓으라 명령한다. 출혈이 심하다고 해도 명령은 변하지 않는다. 작전이 우선이다. 씁쓸한 심경으로 타겟을 쫓던 본드는, 달리는 열차 지붕 위에서 타겟과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 멀리서 스나이퍼 저격총으로 타겟을 노리던 동료 요원 이브(나오미 해리스)는 말한다. 두 사람이 엉켜서 싸우고 있는 탓에 지금 쏘면 자칫 본드가 다칠 수 있다고. 그러나 M은 단호하다. 빌어먹을, 어서 쏴! 망설이던 이브는 명령을 수행하지만, 총알은 본드를 명중시킨다. 이 총알은 누가 쏜 총알인 걸까. 방아쇠를 당긴 이브일까,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끝까지 밀어붙인 M일까?

죽은 척 지중해 어드메쯤에서 나른한 은퇴자의 삶을 영위하던 본드는, MI6가 폭탄 테러를 당했다는 뉴스를 보고는 M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난 뒤 확인하게 되는 사실들은, 허망한 것이었다. 자신이 지혈을 해주지 못하고 자리를 떠난 동료는 끝내 죽었고, 자신은 이미 사망처리가 되어서 자택과 소지품이 죄다 처분되었다.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맹국 첩보원들의 신상명세를 지켜 요원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미션 목표는 일견 옳아 보이지만, 그 미션을 이루기 위해 다른 요원들의 목숨을 일회용품 쓰고 버리듯 소모하는 것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나? MI6에 테러를 저지른 빌런 라울 실바(하비에르 바르뎀)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옳다고 믿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요원의 목숨은 함부로 소모해도 되는 것인가? 그 오랜 충성의 대가로 돌아온 것이 죽음 앞에 무방비하게 던져지는 거라면, 그 충성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007 스카이폴>

물론 〈007 스카이폴〉과 〈헌트〉는 가는 길이 다르다. 〈헌트〉가 그리는 1980년대의 한국은 국민을 총칼로 제압하고 손에 피를 흥건하게 묻힌 자들이 권좌에 오른 독재의 시대였고, 〈헌트〉는 그 사실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정의롭지 않은 국가권력 밑에 정의롭지 못한 국가기구가 있고, 오랫동안 국가의 개로 살아가기를 강요받은 평호와 정도조차 그 사실에 고뇌를 멈추지 못한다. 반면 〈007 스카이폴〉 속 본드는 다르다. 비록 MI6가 일하는 방식은 비정하기 짝이 없으나, 영화도 본드도 영국이라는 국가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국가와 국가기구를 위협하는 실바라는 외부의 적이 있고, 그러기에 본드는 기꺼이 돌아와 제 임무를 다 한다. 설령 그 적이 국가기구의 희생양이라고 해도, 국가에 배신당하고 국가기구에 버림받아서 빌런이 된 거라 해도, 일단 우리를 공격해 오기로 한 이상 실바는 제거해야 할 존재다. 영국 국기는 바람에 펄럭이고, 본드는 다시 노쇠한 몸을 일으켜 미션을 수행한다.

이해할 수 있다. 007 프랜차이즈 문을 닫을 게 아닌 이상에야, 갑자기 본드가 이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고는 다 버리고 떠나는 결말을 낼 수는 없는 거니까. 어쨌거나 다음 편이 나와야 하니까. 하지만 영국이 지난 세기 내내 전 세계에서 벌여온 식민 지배와 그 부작용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007 스카이폴〉이 보여준 결론이 다소 이상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영화 내내 환멸과 피로와 회의감을 이야기하고는, 끝내 명을 수행하고 기꺼이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버리는 조직의 일부로 남는다고? MI6가 작동하는 방식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이, 영국이라는 국가가 만들어 온 ‘국제 질서’는 동의해서 계속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정말? 〈007 스카이폴〉은 이 모든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끝난다. 결론을 내야 하는 자리에서, 〈007 스카이폴〉과 〈헌트〉는 다른 길을 택한다.

<007 스카이폴>

그럼에도 〈007 스카이폴〉은 기억할 만한 질문을 던졌다. 냉전의 도구로 쓰이면서도 국가기구를 의심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MI6로부터 쫓기면서도 끝끝내 임무를 회의해 본 적이 없는 제임스 본드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조직의 존재 이유를 의심하는 작품이니까. 우리가 선이라고 믿는 건 정말 선인가? 우리가 활동하는 방식은 그 목적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나?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맹목적으로 달리고 있는가? 어쩌면 〈007 스카이폴〉이 골수 007 팬들에게 미지근한 반응을 얻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스파이의 본질을 번뇌하는 스파이, MI6를 회의하는 본드라니.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