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안도한 사람처럼 쥘리(로르 칼라미)는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숨을 뱉는다. 카메라는 잠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살결과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을 그대로 비춘다. 이때뿐이다. 기상 알람은 ‘풀타임’ 노동을 알리는 스타팅 신호와 같다. 순식간에 고요가 깨지고, 짤막한 휴식도 끝나버린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쥘리는 이불에서 나오자마자 두 아이가 잠든 침실로 향한다.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부엌으로 들어가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욕조에 물을 받으러 가는 동안, 거실 곳곳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정리한다. 보일러는 오늘도 말썽이고, 아이는 엄마의 말에 고분고분하게 따라주지 않는다. TV 뉴스는 며칠째 이어지는 파리 시위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미 분주하게 움직이던 쥘리는 좀 더 속도를 낸다. 서둘러 화장하고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 가방에 넣는다.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집 밖으로 나왔을 때도 주변은 어둑하다.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나면, 역까지 이를 악물고 뛰어야 한다. 열차를 놓치는 순간, 간신히 조율해놓은 일정이 전부 꼬여버릴 테니까. 전력 질주한 덕분에 열차 탑승엔 성공, 하지만 쥘리의 달리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교외에서 도심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파업 시위와 각종 사고로 열차 운행은 지연되고, 대체 운영 버스는 금세 빽빽이 들어찬다. 승객들은 피로에 지쳐 눈을 감거나, 창틀에 기대 멍하니 밖을 바라본다.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연신 휴대폰만 내려보기도 한다.
쥘리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무리 중 한 명으로 파리 중심가에 도착한다. 고급 호텔에서 객실 청소부장으로 일하는 쥘리. 지각하지 않으려 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 대출금을 납부하라는 독촉 전화를 받는다. 급박한 상황이지만, 희망이 전혀 없진 않다. 최근 이직을 준비하는 중이고, 내일은 그토록 기다려온 면접에 참여한다. 기대하는 대로 앞날이 풀리기만 한다면, 학위와 경력을 인정받으며 지금보다 훨씬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다. 매니저에게 이를 곧이곧대로 알렸다가는 현재 일자리마저 위태로워질 것이 빤하기에, 쥘리는 동료를 설득해서 근무 시간을 몰래 조정한다.
영화는 쥘리를 거듭 몰아붙인다. 카메라는 달리고 또 달리는 쥘리를 숨 가쁘게 따라가며, 초 단위로 컷을 전환한다. 시계 초침이 넘어가듯 일정한 주기로 진동 소리를 반복하는 일렉트로닉 음악은 쥘리의 긴박한 움직임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가 견뎌내야 할 압박이 점점 증폭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상황 역시 악화 일로를 걷는다. 양육비와 휴가 문제를 논의해야 할 전남편은 연락 두절이고, 면접으로 정신없는 가운데 쥘리는 호텔에 새로 들어온 직원 교육까지 떠맡는다. 이웃과 동료 등 주변 인물은 쥘리의 사정을 헤아리며 선의를 베풀지만, 한편으로는 쥘리를 극도의 스트레스에 밀어 넣기도 한다.
그들 앞에서 쥘리는 아이를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이기적인 엄마이자 가벼운 술자리조차 거절하는 재미없는 친구이며, 일터에서 정해 놓은 규칙을 연거푸 위반하는 불성실한 노동자가 된다. <풀타임>은 쥘리에게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을 쥘리가 홀로 감당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싱글맘, 고학력의 경력 단절 여성, 교외에 거주하며 장거리 통근을 감수하는 노동자 등 쥘리를 요약할 만한 조건을 파고들며, 동시다발적으로 들이닥치는 위기에 쥘리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본다. 지쳐 잠드는 몇 시간 외에는 쉼을 허용하지 않는 쥘리에게 일상은 촌각을 다투는 전쟁과도 같다.
해결될 기미가 없는 교통 대란 또한 쥘리의 목을 거세게 조여 온다. 이는 2018년 가을, 조세 개혁에 반대하며 프랑스 전역으로 번졌던 ‘노란 조끼 시위’를 떠올리게 하는데, 영화가 해당 시위를 다루는 방식은 독특하다. 대중교통 파업은 뉴스에 출연한 정치인이나 전문가가 떠드는 것처럼 복잡하지 않고, 한 귀로 흘려들을 만큼 단순하지도 않다. 쥘리와 같은 대다수 시민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실생활을 운영하는 데 커다란 지장을 준다. 쥘리는 시위에 공감하지만, 동참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 정부의 태만에 분노하면서도 제 목소리를 내는 일에는 주저한다. 당장 처리할 일이 지나치게 많아서다.
교육 첫날, 쥘리는 신입 메이드에게 충고한다. “존재감 없는 게 중요해요. 눈에 띄면 안 돼요.” 영화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비춘다.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이가 아니라, 둘 중 무엇도 외칠 겨를이 없어서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는 이에게 다가간다. 그들은 어떻게든 직장에 도착해야 하며,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열차를 가득 메운다. 대부분 쥘리처럼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서비스직과 육체노동에 종사할 것이며, 내키지 않으면서도 과로와 스트레스를 떠안는다. 그러지 않으면, 삶을 지탱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서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지만, 쥘리는 가족, 직장, 사회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늘 무언가를 얻으려 애써 달려야 하고, 터무니없는 보상에 비해 엄마와 노동자, 시민으로서 감당해야 할 무게는 버겁다. 쥘리는 이따금 출처 모를 꿈을 꾼다. 이렇다 할 설명도 맥락도 없이 영화에 삽입된 환상적 장면에는 매번 바다가 등장한다. 물에서 뛰어놀거나 제 쪽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을 편히 바라보지 못한 채, 쥘리는 파도에 휩쓸리며 잠에서 깬다.
곤두박질치듯 끝나버린 꿈은 무얼 의미할까. 평화로운 옛 시절을 향한 그리움인가. 혹은 불안과 의무에서 해방되어 감각에만 집중하는, 여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가리키는가. 어쨌거나 쥘리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엔딩까지 ‘풀타임’ 질주한다.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서 최우수 감독상과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작품으로, 로르 칼라미의 투지 넘치는 연기가 돋보인다. 쥘리는 강인하면서도 신경질적이고, 실수와 실패를 연속하면서도 집요하게 나아간다. 로르 칼라미는 인내심과 통제력을 갖고 인물에게 접근하며, 쥘리가 통과하는 폭풍 같은 시간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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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