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폭력배는 바람직한 삶의 형태가 아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명제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가 사는 삶은 조직폭력배들의 삶보다 나은가? 아마 대부분 동의할 테다. 우리는 선량한 이웃 시민에게 보호비를 갈취하지도 않고, 서로 영역다툼을 한답시고 칼부림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지도 않고, 마약을 유통하지도 않는다. 아무렴, 평범한 우리의 삶이 백번 낫지. 나 또한 동의한다. 그런데 13년 만에 교도소에서 나와 “이번에야말로 건실하게” 살아가고 싶은 미카미 마사오(야쿠쇼 코지)는, 이에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전과 10범, 쌓으면 1미터가 넘어가는 범죄기록을 뒤로 하고, 마사오는 어떻게든 다시 제 두 발로 서 보려고 노력한다. 살인 전과를 지닌 자신의 신원을 보증해주겠다고 나선 변호사 선생님(하시즈메 이사오)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만큼은 사회에 제대로 적응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교도소에서 나온 첫날 밤, 변호사 선생님 집에서 저녁을 먹던 마사오는 자꾸 더 먹으라고 말해주는 사모님(카지 메이코)의 말에 웃으며 손사래를 치다가 울컥 오열하고 만다. 누가 자기를 이만큼 챙겨주었던가. 이 기대를 실망시키면 안 돼.

그러나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당장 고혈압 때문에 매일 혈압강하제를 챙겨 먹어야 하는 몸뚱아리도 버겁거니와, 질병으로 인해 난생 처음 생활보호금을 받게 된 것도 자존심이 상한다. 사회에 짐이 된 것 같은 기분도 수치스러운데, 사회복지사(키타무라 유키야)는 ‘반사회적 집단’, 즉 야쿠자였다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마사오의 자격을 묻는다. 마사오는 교도소에 있을 때 익혔던 기술을 가지고 수제 검도 호구를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아가겠다는 꿈을 키웠지만, 이제 그렇게 비싼 호구는 잘 팔리지 않는다. 사람을 구하는 공방이 있지 않을까 하고 전화를 돌려보아도, 대화가 몇 마디 오가면 상대는 자신이 교도소 출신임을 눈치챈다. 마사오는 화급히 전화를 끊는다.

운전면허를 갱신하면 트럭 운전수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운전면허 갱신 기간은 마사오가 교도소에 있을 때 만료되었고, 다시 면허를 따려면 30만엔 넘는 강습료를 내고 운전면허를 처음부터 공부해야 한다. 시급 990엔짜리 일자리 하나에 뛸 듯이 기뻐하는 지금의 마사오에게 그 돈은 너무나 큰 돈이다. “독방에 갇혀 있느라 면허 갱신 안내를 받지 못했다.”며 사정을 봐 달라고 하는 마사오에게 경찰은 말한다. 선생님의 품행 문제로 생긴 일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세상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긴, 늙고 쇠락한 왕년의 야쿠자 따위를 누가 반기랴.

그런데 세상이 반기지 않는 건 자신만이 아닌 것 같다. 자신이 갱생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며 찾아온 다큐멘터리 감독 츠노다(나카노 타이가)와 텔레비전 프로듀서 요시자와(나가사와 마사미)와 함께 기분 좋게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밤, 마사오의 눈에 불쾌한 광경이 들어온다. 동네 건달들이 아이에게 줄 선물을 사 들고 퇴근하는 중년 남성을 괴롭히며 돈을 내 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광경. 그래,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는 건달들을 혼내 줘야지. 마사오는 중년 남성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건달들에게 따로 이야기하자며 공터로 향한다. 이윽고 한 바탕 주먹다짐이 벌어지는데, 어째 점점 싸움이 격해진다. 마사오는 공터 한 켠에 놓여 있던 접이식 철제 사다리를 들고 와 건달들을 후려치고, 서로 부둥켜 안고 구를 때 짐승처럼 상대의 몸통을 물어 뜯는다. 희번뜩해진 눈으로 건달들을 때리는 마사오를 카메라로 찍던 츠노다는, 그 광경에 놀라 촬영을 멈추고 달아난다. 이 사람은 찍어서 보여주기엔 너무 위험한 피사체다.

그럼 그 광경을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거냐고 묻는 마사오에게 츠노다는 말한다. 평범한 우리는 대부분 도망간다고. 갈등이 눈에 보일 때마다 나서서 싸울 수는 없는 거라고. 때로는 도망가는 게 답이 될 수도 있다고. 13년 전 자신의 집에 쳐 들어 와 아내에게 행패를 부리던 건달과 싸울 때에도, 칼로 상대를 찌르면서도 상대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 못하지 않았느냐고. 철제 사다리로 사람을 내리칠 때에도 마찬가지로 상대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하지 않았느냐고. 마사오는 너희처럼 비겁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소리치고는 전화를 끊는다. 아니, 어째서 그렇지? 밤새 시끄럽게 게임을 하면서 이웃들이 잠을 설치게 만드는 아랫집 총각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에도,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는 건달들을 혼내줄 때에도, 마사오 생각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 그런 상황에서 도망가라고? 때론 도망가는 게 도움이 된다고? 비겁하기는. 이 사회는 정의를 반기지 않아.

물론 마사오처럼 매사에 폭력을 도구로 사용하는 건 답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다. 철제 사다리로 사람을 내리쳤다간 또 살인을 저지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츠노다의 말도 맞다. 그러나 츠노다의 말처럼 도망가는 것이 답일까? 성질을 죽이고, 고개를 숙이고, 명백한 불의가 눈 앞에서 벌어져도 못 본 척 적당히 어우러져서 사는 게 정말 좋은 일일까? 정숙함을 강제하는 일본 사회는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전과 10범의 마사오는 폭력 말고는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모른다. 그 중간 지점을 찾지 못해서, 마사오는 멎을 듯이 갑갑해 오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혈압강하제를 먹는다. 사회가 바라는 인간상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을 도와준 이들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눈 앞에서 명백한 왕따와 폭력이 벌어져도, 회사 동료가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고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들을 비난해도, 마사오는 더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 부끄러움과 모멸을 견디면서, 웃어 보이며 동료들과 어울린다. 그 날 밤, 왕따를 당하던 회사 동료가 꺾어준 아카시아 꽃 향기를 맡으면서 마사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내치려고 했던 사회,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믿고 옆에서 도와준 변호사 부부, 츠노다, 그 외의 많은 사람들, 조만간 다시 만나 웃으며 과거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전처, 자신이 구하지 못한 회사 동료와, 그런 동료를 조롱하던 이들…. 사회란 어떤 곳일까? 냉정하지만 따뜻하고, 선량하지만 비겁한 곳. 이게, 정말 내가 살아온 삶보다 낫긴 한 걸까?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나는 오랜만에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보통이었다면 영화가 끝나자마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을 텐데, 어쩐지 〈멋진 세계〉(2021) 앞에서는 함부로 어떤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살다 살다 한 물 간 야쿠자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가 사는 이 곳은, 정말 멋진 세계일까? 정상 범주 안에서 안온하게 살아가며 불의에 고개를 숙이는 우리에게만 멋진 곳이 아니라?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