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특별한 날은 아니지만 입에 익고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그런 날이 있다. 예를들면 4월 16일 같은. 9월에도 그런 하루가 있다. 9월 11일, 줄여서 구일일이라고 읽으면 이십여 년 전 느꼈던 충격과 공포, 비극과 좌절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여객기 한 대가 제1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20분 뒤 다른 비행기가 제2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충돌한다. 자본주의와 세계화를 상징하는 건물이 무너져내린 탓에 비교적 묻혀버렸지만 미국 국방부 청사에도 여객기가 부딪혔고 백악관을 향하던 마지막 비행기는 중간에 추락했다. 총 4편의 비행기가 납치되어 충돌과 추락, 건물 붕괴 등으로 3천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전 국민이 분노와 복수라는 기치로 똘똘 뭉친 상황에서 위정자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게다가 그들이 전쟁을 애타게 갈구하는 부류라면 편하고 거리낌 없이 적이라 판단되는 나라에 선전포고할 준비는 다 된 셈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테러의 원흉으로 지적된 알카에다 지도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누군가를 어딘가를 박살 내야 국민들이 만족하고 인기가 올라가는데 이를 어쩐다. 명분도 생겼고 상대가 빌미도 제공하니 총포를 앞세워 쳐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상대 국가가 어떤 상황인지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지리멸렬하고 잔인했던 소련과의 전쟁 그리고 내전으로 사회기반시설, 아니 그 무엇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은 초반에 승기를 잡는다. 지배세력인 탈레반을 물리치고 민중에게 해방을 선사해 줄 날이 머지않은 듯 보였다. 미국의 지배자들은 국제정치학자 마이클 도일이 주창한 ‘민주주의 평화론’을 좇았다. 서구적 민주주의를 이식하면 테러도 없고 전쟁도 없는 국가와 관계가 만들어지리라 예상했다. 다만 그들이 간과한 점은 방법과 과정이었다.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이미 궁핍한 살림살이를 ‘조지고 부수는’(곧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조롱 섞인 별명이 된다) 타국의 군대를 대중들은 해방군이라 부를까, 점령군이라 부를까. 총포로 이웃을 죽이고 고향을 파괴하는 이들이 안내하는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적군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다. 일부러 군복을 입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군복조차 입을 경제적 여력이 없다. 적군은 그 이점을 최대한 살려 미군이 스스로 일상적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이미 40년 전 베트남에서 경험했고 뼈저리게 당한 기억이 있다. 언제 누가 어떻게 등장해 내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을지 모른다. 그래서 미군은 늘 긴장하고 예민해져 있어 계기만 주어지면 외부를 향해 폭발하거나 스스로 붕괴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21세기 현재 제아무리 현대적 전투, 전자적 전투, 사람이 불필요한 전투라 불려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점령하려면 사람이 가서 땅을 밟아야 한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다. 사람이 땅을 밟아야 한다는 말은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할 수 있고 나아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자국의 젊은이가 적잖이 죽어 나가는 전쟁을 오로지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 앞뒤 안 가리고 밀어 부치는 민주주의 정부란 있을 수 없다. 호기롭게 시작한 전쟁은 불명확한 목표와 방향, 기대 결과, 사욕을 챙기는 정치인 등으로 미국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만다.
문명사회, 개발 국가에서 고문이 사라진 이유는 명백하다. 첫째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슨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기본적으로 누려야 하는 권리가 있다. 존재 자체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생명을 위협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고문은 육체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모든 인류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부정한다.
둘째 효과가 없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가하면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준다. 사실이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역사와 경험을 통해 일반 상식이 되어 수면 위에서는 사라져버린 고문을 최신 문명사회, 최고 개발 국가, 민주주의를 이식하러 왔다는 미국이 자국의 필요에 따라 당당하게 부활시켰다.
금방 정리될 것처럼 보이던 전쟁은 20년이라는 미국 역사상 최장기 단일 전쟁이 되었다. 권한 이양과 철수(라 쓰고 패배라 읽는다)를 침공 20주년에 맞추어 2021년 9월 11일까지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지난 20년간 무엇을 한 것일까.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가난하고 척박한 미개발국에 소위 선진 제도나 조직을 이식하는 경우에 보통은 실패했다. 개발과 미개발, 선진과 후진에 대한 좋고 나쁨이라는 가치 판단을 떠나 단계와 과정, 시간 등이 필요하거나 또는 그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구식이 옳고 낫다는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강제하다 보니 부패는 필연적이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부패한 정부를 지원하고 부패한 정부는 대중을 수탈하고 수탈당한 대중은 정부에게서 돌아서고 돌아선 곳은 다시 탈레반.
재건 비용 대부분이 증발되었다. 2차대전 후 유럽 재건을 위한 돈보다 더 많이 쓰였음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지원금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 지원금이 사회 공공 기반 시설을 만들고 교육과 의료 서비스에 사용되어 대중들의 삶을 윤택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상을 살아낼 수 있게 만들었다면 오늘과 같은 미국의 치욕은 필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2001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위해 의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켜야 했다. 모든 이들이 폭력과 피를 부르는 보복을 외칠 때 오직 한 사람, 바버라 리는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요구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그저 감정에 맡겨두었을 때 벌어질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다.
911 사건은 결국 정부가 시민들을 더욱 쉽게 감시하고 국가가 가진 무력을 무분별하고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외부의 적을 향한 마땅한 변화가 아니라 내부를 공공연히 단속하는 발단이 되었을 뿐이다. 영화에서 작가 개럿 M. 그래프는 말했다. ‘방위비 증가로 국내 경찰이 군대화되어 도리어 전쟁을 고향으로 끌고 온 셈이 되었다’고.
최소 2조 달러의 전쟁비용, 미군 전사자 2,448명, 부상자 5만여 명, 15만여 명에 이르는 아프간 민간인 사망자. 그리고 20년 전과 다르지 않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복귀.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희생이었을까. Cui Bono, 이득을 얻는 사람이 범인이라는 말이 있다. 911당시 민간 군사기업 '핼리버튼'은 쿠바 관타나모에 포로수용소를 짓고, 이라크 석유시설 복구사업을 독점하며 11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핼리버튼'의 배후에 당시 부대통령 딕 체니가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침공도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수지 맞는 장사였다.
5시간에 걸쳐 집요하고 철저하게 911테러와 그 배경, 그리고 20년간의 전쟁 경과를 추적하는 <터닝포인트: 9/11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이라크로 이어진 확전에서 이득을 본 사람은 누군지 이 다큐멘터리에서 직접 판단해 보길 바란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