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잠 못 들게 만들던 뜨거운 열기는 이제 다 지나가고, 밤거리를 거닐고 싶게 하는 선선한 바람이 우리 곁을 스치는 요즘이다. 지금의 날씨를 빗대자면 마치 한 여름의 락페스티벌이 주던 에너지가 사그라들 때쯤 새로이 열리는 가을밤의 재즈 페스티벌 같은 느낌이다. 여전히 따사로운 햇볕이 드는 오후 무렵에 시작한 공연에 차가운 맥주 한잔을 곁들이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어 얇은 외투 한 장을 걸치게 될 것만 같은.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재즈 아티스트들의 선율에 젖은 채로 잔디밭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은 날. 음악이 함께하면 완벽할 것 같은 날씨의 연속이지만, 현실적으로 뮤직 페스티벌에 가기엔 어렵다면, 집에서 영화로 접해보는 건 어떨까? 한여름의 락 페스티벌부터 가을밤의 재즈 페스티벌까지, 실제 페스티벌의 모습들을 다룬 영화 네 편을 여러분에게 소개할 예정이다. 지금 당장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챙겨 오는 것뿐이다!
전설적인 재즈 아티스트들의 향연! <한 여름밤의 재즈>
미국에서 제일 작은 주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 카운티에서 69년 넘게 이어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재즈 페스티벌이다. 그중에서도 1958년의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은 재즈 팬들에게서 자주 거론되는 역대급 공연이었다. 출연하는 이름들을 나열하기만 해도, 수많은 재즈 팬들의 가슴이 설렐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 마할리아 잭슨, 셀로니어스 몽크, 아니타 오데이, 게리 멀리건, 다이나 워싱턴, 척 베리… 엄청난 라인업만큼 1958년의 뉴포트 카운티에게 내린 크나큰 축복이 있으니, 그것은 이 모든 광경이 35mm 필름에 담겨 여전히 보존되었다는 점이다. 무려 64년 전 공연을 현재의 관객들이 다시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적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영상은 4K로 복원되어 돌아왔다. 이 영화가 뭐냐고? 지난 9월 8일 국내에 개봉한 <한 여름밤의 재즈>다. 한국의 극장에 앉아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와 셀로니어스 몽크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니!
<한 여름밤의 재즈>는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페스티벌 라인업 속 타임 테이블을 착실하게 따라가면서, 모든 아티스트의 무대를 빠짐없이 조망한다. 이러한 점에서 공연을 기록하는 작품으로도 이 영화는 손색이 없겠지만, <한 여름밤의 재즈>는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의 측면에서도 상당히 근사한 작품이다. 아티스트와 관객을 담은 장면을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마치 대화를 나누듯 서로가 마주 보며 반응하게 만든 형식은 뮤지션들의 대화라고 일컫는 재즈의 작법과 상당히 유사하다. 감탄하고 환호하다가 또 경건해지기도 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티스트만큼이나 페스티벌을 구성하는 요소가 관객임을 새삼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 사이로 당신의 자리도 영화는 마련해 놓았다. 어서 극장에 들어가 58년도의 뉴포트와 그 여름밤의 재즈를 만끽해보았으면 한다.
지상 최대의 페스티벌의 현장을 그대로! <글래스톤베리>
1970년 젊은 농부 마이클 이비스에 의해 열린 1파운드 페스티벌은 52년이 지난 지금 세계 최고의 페스티벌이 되었다. 수많은 음악 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그 이름은 바로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다. 초대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 티렉스를 필두로 데이비드 보위, 더 스미스, 뉴 오더, 레니 크라비츠, 오아시스, 비요크, 라디오헤드, 폴 메카트니, 콜드플레이, U2, 롤링 스톤즈, 스티비 원더 …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라면 한 번쯤은 공연한 이 페스티벌은 많은 이들의 버킷 리스트에 담겨 있는 꿈의 축제다.
2006년 개봉한 줄리안 템플의 <글래스톤베리>는 이 한 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담은 작품인데, 35년간의 방대한 공연 아카이브 영상과 더불어 참가자들의 홈비디오와 방송 영상, 그리고 그가 직접 촬영한 현장까지 아우르며 기나긴 페스티벌의 역사를 한눈에 담아낸다. <글래스톤베리>는 단순히 그 페스티벌의 역사적인 순간만을 집약해 놓지 않는다. 어떻게 글래스톤베리가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과 함께, 히피의 정신에서 시작한 이 축제가 어떻게 범 장르적인 음악 산업의 중추로 거듭났는가에 대한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후덥지근한 열기와 흙투성이의 바닥이 혼재한 글래스톤베리의 모습을 엿보면서, 내년 여름의 락 페스티벌을 기다려보는 건 어떨까?
전설적인 1969년의 역사, 우드스탁을 떠올리며! <테이킹 우드스탁>
뮤직 페스티벌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행사를 단 하나만 꼽자면, 모두가 1969년의 우드스탁을 꼽을 것이다. 비록 1999년 충격적인 사건으로 영영 이 행사를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미국의 히피 문화의 정수를 여실히 드러내는 상징적인 페스티벌은 단연 우드스탁일 것이다. 이런 우드스탁의 실황을 접하기엔 1970년도의 공개된 <우드스탁: 사랑과 평화의 3일>이 가장 적합하겠지만, 224분이라는 부담스러운 러닝타임과 50년이 넘어 찾아보기 어려운 이 작품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앞서 다룬 작품들처럼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이지만,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은 어쩌면 우드스탁의 정신을 대변하는 데는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작품에는 우드스탁의 스테이지나 아티스트의 공연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우드스탁의 전설적인 면모는 웅장한 무대나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보다는 이 공연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1969년의 히피즘의 덕이 크다. <테이킹 우드스탁>은 그 과정과 정신만을 다루는 영화다. 히피즘의 시대를 마주한 주인공의 성장기이자, 그 시대만이 지니던 속성을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우드스탁의 공연을 기대한 이들에겐 아쉬울지 몰라도, 그 시절을 꿈꿔보는 이들과 본인을 히피라 생각하는 누군가에겐 완벽한 작품일 것이다.
우드스탁 저편에서 이젠 기록돼야 하는 역사 <소울, 영혼, 그리고 여름>
우드스탁이 한창이던 1969년의 뉴욕의 외곽에서, 또 다른 큰 축제가 열렸다. ‘할렘 컬쳐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무려 30만 명의 관객과 엄청난 흑인 아티스트들의 공연으로 가득했다. 스티비 원더, 니나 시몬,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데이비드 러핀, BB 킹… 블랙 뮤직의 팬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가득했던 축제였지만, 어떤 역사도 이 페스티벌을 기록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창고에 50년이 넘도록 묻혀 있던 그날의 영상을 전설적인 힙합 그룹 더 루츠의 멤버 퀘스트러브가 꺼내 들었다.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소울, 영혼, 그리고 여름>은 우드스탁에 가려져 지워진 이 역사적인 축제를 다시 복원해 나간다. 우드스탁이 히피즘의 마지막을 작렬하게 태워낸 불꽃이라면, 할렘 컬쳐 페스티벌은 흑인 인권 운동의 선봉에 서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걸음이었다. 그중에서도 스티비 원더와 니나 시몬의 무대는 상징적이다. 1970년대 이후 끊임없이 인종차별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이 69년도의 여름에도 그들의 동지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결속을 다지는 장면은 왜 이 역사를 다시 기록해야 하는가에 대한 강력한 대답이 된다. 우드스탁의 혼돈과 달리 정돈되고 질서 있는 ‘할렘 컬쳐 페스티벌’의 모습은 결연한 이들의 의지마저 느껴진다. 정치적이지만 동시에 예술적으로도 빼어난 이들의 무대를 보고 있자면, 새롭게 쓰이는 그때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마저 든다.
한여름으로부터 가을밤까지 여러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 페스티벌을 다룬 네 영화를 여러분에게 소개해보았다. 극장에서 혹은 OTT로 이 작품들을 접한 후에는 꼭 앨범도 듣기를 추천한다. 축제의 여흥에 못 이겨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청중처럼, 여러분도 영화가 끝나고 음악과 술을 함께할지 모르니깐.
최현수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