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의 기다림. 부산국제영화제가 코로나19 시대를 지나 정상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0월 5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는 4일 개막식과 개막작 상영으로 관객들을 맞이했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침에 따라 상영작과 행사를 최소화하여 영화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거리두기가 완화됨에 따라 코로나19 이전처럼 화려한 게스트 라인업, 수많은 상영작을 갖추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개막작 <바람의 향기> 리뷰 및 개막식 행사의 이야기를 전하며 27회 BIFF의 서막을 정리했다.
영화제의 얼굴, 개막작 <바람의 향기>
영화제에서 개막작은 많은 의미를 갖는다. 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우수하다거나 인기작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관객들을 맞이하는 첫날 공개되는 만큼 개막식의 얼굴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정상화를 꿈꾸며 27회 BIFF의 시작을 알린 영화는 <바람의 향기>. 이란 감독 하디 모하게흐 감독의 네 번째 작품으로 이번 영화제로 국제 공개됐다.
이란이란 국가, 하디 모하게흐라는 이름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대중에게 흔히 익숙한 계열은 아니니까. 하지만 영화를 먼저 만나본 입장에선 이번 BIFF가 이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택한 이유가 꽤 명확해보인다. 다름 아닌 사람의 선의에 대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바람의 향기>는 시작부터 위험천만만 순간을 제시한다. 경사진 산등성이, 한 남자가 돌로 내리찍어 풀을 뜯고 조심조심 내려온다. 왜소하게만 보이는 이 남자, 하반신 장애가 있다. 쪼그려 앉은 자세로 두 팔을 이용해 걸음을 옮긴 사내는 무언가 찧고 끓인다. 그리고 다음 장면, 창밖 햇빛이 내리쬐는 집 안에서 사내는 담요 위에 누운 아이를 끌고 와 물을 부으며 씻긴다. 마치 죽은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이 아이는, 사내의 아들로 전신마비다. 늦은 밤 사내가 전등에 불을 켰는데, 하필 전기가 나가버린다. 사내는 아침이 되자 그 어려운 걸음으로 전기를 고쳐줄 전력반에 전화하러 나선다.
여기까지만 보면 ‘장애 있는 아빠의 고군분투 수리기’일 것 같지만, 영화는 사내의 전화로 전력반 수리 기사가 오면서 다른 국면을 준비한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은 아니나 이제 이 수리 기사가 전신주를 고치기 위해 사내 대신 발걸음을 바삐 한다. 전신주 수리에 필요한 부싱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가는 동안 전기 기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기도, 도움을 주기도 한다.
<바람의 향기>는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적 전통’이라는 BIFF측 설명처럼 영화는 자극적인 요소 없이 그저 서로를 돕는 사람, 특히 전기 기사의 행적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것이 곧 이 영화가 전하고 싶어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를 돕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생색을 내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저 보이는 대로, 타인에게 요청 받은대로 돕고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가 하나둘씩 쌓이면서 영화는 조금씩 마지막 장면을 향해 나아간다.
BIFF가 <바람의 향기>를 택한 건 추측건대 이런 영화의 태도 때문이지 않을까.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면서, 우리가 깨달은 건 각자에게 힘든 위기를 모두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에게 행여 해가 될까 조심스러웠고 서로 배려했기에, 이 모든 의식하지 않은 선행이 이렇게 영화제를 이전처럼 정상적으로 개최할 수 있는 순간까지 다다르게 한 원점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BIFF는 이 영화를 통해 그런 각자의 마음과 행동에 감사를 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기자회견에서 하디 모하게흐 감독은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내게 오는 아름다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항상 열려있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자신이 통과했을 뿐이라는 하디 모하게흐 감독의 발언은 일견 그를 숭고한 사람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발언과 <바람의 향기> 속 서로 돕는 사람들을 연결 지어 생각하면, 그의 말은 그 자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기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곧 그러했기에 지금 이 순간이 가능했음을 가리킨다. 영화제를 준비한, 영화제를 즐기는 모두가 영화의 제목 ‘바람의 향기’처럼 언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향기를 남기는 사람임을 이 영화를 관람한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제의 꽃, 개막식
개막작이 영화제의 얼굴이라면, 이 개막작 상영 직전 관객들이 만난 레드 카펫 행사와 개막식은 영화제의 꽃일 것이다. 이번 27회 BIFF는 각각 <글로리 데이>와 <죄 많은 소녀>로 BIFF와 인연을 맺은 류준열과 전여빈을 진행자로 내세웠다. 개막식을 시작하기 앞서 올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영화 음악가 방준석과 영화감독 아오야마 신지, 장 뤽 고다르, 영화배우 강수연을 추모했다.
특히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연주 위로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배우 설경구, 문소리, 영화감독 연상호 등이 강수연에게 보내는 추모 편지가 스크린으로 전해져 강수연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어 박형준 부산광역시장의 축하 영상 메시지,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과 이병진 부산광역시 행정부 시장의 개막 선언이 이어졌다. 개막 선언 이후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무대에 올라 올해 뉴 커런츠 부문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을 소개했다.
심사위원장이자 영화평론가 세르주 투비아나는 “위기는 지나갔고 시네마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영화제들 덕분에 전 세계 위대한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서도 “어떻게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장소인 극장으로 관객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세계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에서도 유효하다”고 영화를 위해 좀 더 힘써야 한다는 마음을 전했다. 그는 “우리는 영화의 힘을 믿어야 한다”며 “영화여, 영원하라!”라는 외침으로 인사를 마쳤다.
이어 배우 한예리의 헌사로 시작한 올해 아시아 영화인상 시상은 배우 양조위가 수상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한 양조위는 “영광스러운 상을 준 부산국제영화제에 감사하다. 한국에 있는 저의 팬들을 다시 만날 기회를 다시 주셔서 감사하다. 올해도 성공적인 영화제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어 개막작 상영 전 허문영 집행위원장의 소개로 개막작 <바람의 향기>의 하디 모하게흐 감독, 제작자 레자 모하게흐와 모스타파 골파리안이 무대에 올랐다. 2015년 <아야즈의 통곡>으로 뉴 커런츠 상을 수상한 바 있는 하디 모하게흐 감독은 “제 고향에 다시 돌아온 듯한 기분이다”라고 한 후 “몇 년 전 제가 사랑하는 가족과 같은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를 멀리 보낸 곳이기도 하다”며 2019년 세상을 떠난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를 추모했다.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감독에게 영화 설명을 부탁하는 대신, 뉴 커런츠 상 수상 당시 노래를 불렀던 하디 모하게흐 감독에게 다시 노래를 부탁했다. 하디 모하게흐 감독은 “이란 사람들에게 보낸다”며 짧은 노래를 불러 박수를 받았다. 이어 개막작 <바람의 향기> 상영이 이어지면 27회 BIFF는 관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글=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