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일본의 동시대 영화 감독들에 관한 관심은 날로 높아져 갔다. 지난 2021년 서울 독립 영화제에서도 유일한 해외 작품을 소개하는 부문인 ‘해외 초청’에 “동시대 일본 영화의 가장 뜨거운 이름들”이라는 주제로 하마구치 류스케를 비롯한 네 감독의 여섯 작품을 소개했다. 이번 23회 부산국제영화제 역시 특별 부문에서 ‘일본 영화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주제로 일본의 주목받는 신예 감독들의 작품을 대거 상영했다. 그 중에서도 단연 화제가 되는 두 편은 미아케 쇼 감독의 신작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하마구치 류스케 사단의 일원 노하라 다다시의 <세번째의, 정직>일 것이다.

이 외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조연출 출신인 가와와다 에마의 <나의 작은 나라>, 작년 <실종>이라는 작품으로 국내 개봉에 성공한 가타야마 신조의 첫 장편 연출작 <벼랑 끝의 남매>, 내년 개봉 예정인 하루모토 유지로의 <유코의 평형추> 역시 섹션 공개 이후 엄청난 화제를 불러온 작품이지만, 이번 기사를 통해 가장 화제를 모았던 두 작품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세번째의, 정직>은 실제론 어떤 작품이었을까? 지금부터 알아보자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dir. 미아케 쇼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지난 2020년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로 한 차례 국내 개봉에 성공한 미아케 쇼의 신작이 이번 부산에서 공개된다는 소식은 수많은 영화 팬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청각 장애를 가진 프로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소재만 생각했을 때, 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와 타케 마사하루의 <백엔의 사랑>의 어디 사이를 유영하는 영화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지금까지 나온 장애와 관련된 모든 영화와 전혀 다른 영화이다.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청각 장애가 있는 케이코(키시이 유키노 분)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체육관에서 성실하게 훈련받으며 꿈에 그리는 프로 데뷔에 성공한다. 그녀는 낮에는 호텔리어 생활을 하고 밤에는 체육관에서 훈련에 매진하며 다음 경기에도 승리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린다. 체육관을 운영하는 백발의 회장과 두 명의 트레이너는 케이코의 승리를 위해 많은 도움을 준다.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

하지만, 코로나의 영향으로 체육관의 운영은 점차 힘들어지고, 입 모양을 통해 언어를 유추할 수 있던 케이코에게도 마스크 착용은 소통의 어려움을 야기한다. 설상가상으로 회장의 건강은 악화되고 무구한 역사를 가진 체육관은 결국 폐관할 위험에 처한다. 케이코는 자신을 믿어준 체육관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복싱을 할 동기를 상실하고 운동을 그만두려 하는데… 과연 케이코는 계속해서 복싱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를 도와준 체육관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이렇게만 내용을 읽는다면 장애가 있는 운동선수의 클리셰들이 머릿속에 떠오를지 모른다. 하지만,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완벽하게 새로운 영화를 창조해냈다. 청각 장애를 다루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은 소리를 매개로 한 흥미로운 장면으로 시작한다. 케이코의 줄넘기 소리와 미트 소리, 운동 기구들의 마찰음이 겹겹이 쌓이면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음악을 창조한다. 이윽고 등장하는 케이코와 코치의 미트 훈련은 두 육체가 주고받는 역동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케이코가 매일 착실히 지키는 훈련 루틴은 삶의 리듬을 구축하고, 매일의 훈련일지는 그 리듬을 글자로 나타낸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케이코에게 리듬은 파장이 아닌 움직임과 시간이 된다. 착실한 훈련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시간의 층은 박자 혹은 리듬이라는 개념을 삶으로 확장하며, 청각 장애라는 속성을 단순히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타낸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단언컨대 장애 그리고 삶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다.


<세번째의, 정직> dir. 노하라 다다시

영화 <세번째의, 정직>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 아워>와 구로사와 기요시의 <스파이의 아내>에서 하마구치 류스케와 함께 공동으로 각본 작업을 했던 노하라 다다시의 장편 작품이 이번 부산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특히 <세번째의, 정직>은 그가 하마구치 류스케와 함께 작업했던 <해피 아워>에서 등장한 배우들이 다수 출연했고, 고베라는 촬영지의 유사성 때문에 <해피 아워>의 정신적인 속편으로 자주 언급되곤 했다. 특히 준 역을 맡았던 카와무라 리라, 히나코 역을 맡았던 데무라 히로미, 코헤이 역의 자하나 요시타카, 타쿠야 역의 미후라 히로유키 까지 <해피 아워>에 등장했던 배우 네 명이 <세번째의, 정직>에서도 출연한다. 하지만 <세번째의, 정직>은 <해피 아워>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작품이다.

영화 <세번째의, 정직>

<세번째의, 정직>은 두 남매와 그 주변 가족들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누나는 자신의 동거남의 딸 ‘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하지만, ‘란’은 동거남에 의해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다. 란이 떠난 이후로 그녀는 어딘가 모르는 공허함에 위탁 가정을 시도해보지만, 오히려 동거남은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남동생은 낮에는 정육 일을 하고 밤에는 래퍼로 창작 활동에 골몰한다. 그가 매일을 작품에 몰두하는 사이 그의 아내는 점차 정신적으로 쇠약해진다.

영화 <세번째의, 정직>

그러던 어느 날, 풀숲 공원에서 누나는 한 소년이 기절해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 소년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어느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랑을 주고 싶은 대상이 필요했던 누나는 그 소년을 집에 데려와 거두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그에게 ‘나루토’라는 이름을 붙여주지만, 그 소년을 쫓는 한 남자가 있다. 남동생은 앨범 작업에 매진하느라 아내의 변해가는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를 진찰하는 의사는 그녀를 가엾게 여기고 있다. 남동생의 공연이 잡혀있는 날, 가족들은 모두 그 공연을 보러 오기로 한다.

영화 <세번째의, 정직>

<세번째의, 정직>의 두 남매는 모두 무언가에 강박적으로 매달려 있다. 누나는 사랑을 주고받는 대상의 부재를 몸서리치게 힘들어한다. 그녀가 나루토라는 소년을 발견한 이후, 그가 그녀의 곁을 떠나기를 두려워한다. 남동생은 자신의 음악에만 몰두한다. 그의 아내가 정신적으로 병에 들어도 그는 끊임없이 그녀가 자신의 가사를 적는 일만 해준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무언가에 매여있는 두 남매는 그 곁에 있는 존재들이 공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공허와 욕망을 충족하는 데 집중할 뿐이다. 일본 숙어 표현에 ‘세번째의 정직’은 어찌 되었건 마지막엔 성공한다는 확신이란 의미다. 그들은 자신이 겪어낸 두 번의 실패 너머 마지막 성공이 있을 거라 굳게 믿는다. 그 믿음이 주위를 소진시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세번째의, 정직>은 그런 의미에서 절박하게 믿기만 한 자들을 위한 우화에 가깝다.


글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