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머

가상의 공간에서 가공할 만한 능력을 자랑하는 히어로들의 이야기인 슈퍼히어로 무비라는 장르에서도, 21세기 현재까지도 미지와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바닷속 왕국 아틀란티스는 그리 흔한 무대는 아니다. 사상 최초로 아틀란티스를 전면에 내세우며 인간과 아틀란티스인의 혼혈인 히어로 '아쿠아맨' 아서 커리를 등장시킨 <아쿠아맨>이 주목받은 것도 이 새롭고 신비로운 세계, 바닷속 왕국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DC의 아쿠아맨

DC 확장 유니버스에서 먼저 다루기는 했으나, 역사로 따지고 보면 아쿠아맨보다 먼저 등장한 아틀란티스인 히어로가 마블에도 있었다. 바로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 첫 등장을 확정 지은 네이머다. 네이머는 마블 코믹스 초창기인 1939년에 등장한 히어로 캐릭터로 역사만 따지고 보면 배트맨보다도 빨리 탄생했는데(1개월 차이기는 하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한 번도 실사화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판권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슈 때문에 MCU가 초대형 프랜차이즈로 자리 잡는 동안에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드디어 MCU에 네이머가 등장을 확정 지었고 솔로 무비는 아니지만 <블랙 팬서> 시리즈를 통해 등장한다는 점은 자연스러우면서 안타깝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아직까지는 관객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캐릭터 '네이머'에 대한 소개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알고보면 원로급 히어로, ‘네이머’

1939년 당시는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대공황의 여파에 고통받고 있던 시절로, 경제적 붕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직의 고통을 겪었으며 음식을 구할 돈이 없어 굶어죽기까지 하는 등 길게 보면 거의 20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시기 등장한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당대의 미국인들에게 위로가 되었는데, 대표적인 히어로 캐릭터가 바로 슈퍼맨과 배트맨 그리고 네이머였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도시 빈민들을 위해 영웅적인 행위를 펼치는 히어로였다면, 네이머는 조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안티히어로로서의 특징이 두드러졌던 셈인데, 네이머는 근본적으로 육지 위의 사람이 아니라 심해 깊은 곳에 자리한 아틀란티스의 지배자였으므로 아틀란티스를 위한 결정이라면 히어로 팀에 가담하기도 하지만 히어로들과 칼을 맞대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즉 전 인류 일반의 평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본인의 세계와 왕국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인 셈.

능력은 아쿠아맨과 흡사한데(아쿠아맨이 네이머를 본떠 만든 캐릭터라는 점을 상기하자) 바다와 육지 어느 곳에서도 호흡할 수 있으며 아틀란티스의 지도자답게 심해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거기에 발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지상에서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비행능력이 있고, 해양 생물들에게 텔레파시를 보내 조종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 일주일 이상 물 밖에만 있으면 능력과 체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네이머의 기원… 그리고 블랙 팬서와의 악연

판타스틱 포의 인비저블 우먼을 좋아했던 네이머

네이머는 아틀란티스의 공주였던 펜이 남극 대륙을 원정 중이던 맥켄지라는 인간과 결혼해 태어난 아들이다. 혼혈이기는 하지만 아틀란티스에서 나고 자라며 육지 인류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을 배웠고, 처음으로 지상세계에 나갔을 때 네이머는 이런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때 선량한 인간들을 만나 잠시 지상에서 지내기도 했지만, 히틀러가 이끄는 군대가 아틀란티스의 수도를 공격하게 하자 네이머는 다시금 복수의 화신으로 불타올랐고 목적이 같다는 이유로 캡틴 아메리카를 위시한 인베이더스와 함께 싸우기도 했다.

이후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기억을 잃고 뉴욕에서 노숙자 신세를 지기도 하지만, 판타스틱 포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되찾았다. 이후에도 아틀란티스가 공격당할 때마다 지상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디펜더스와 어벤져스 그리고 일루미나티의 멤버로도 활동하는 등 지상의 히어로들과 계속해서 연계점을 갖고 있었다.

네이버와 블랙 팬서의 대립

하지만 개중 블랙 팬서와의 악연은 유독 지독했다. 엠마 프로스트의 간교에 넘어간 네이머는 닥터 둠의 와칸다 침공을 도와 티찰라와 적대했고, 이 싸움에서 티찰라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슈리가 블랙 팬서가 되었다. 이후 네이머는 아틀란티스의 군대를 이끌고 와칸다를 침공해 폐허로 만들었다. 와칸다의 여왕이었던 슈리는 이에 복수하기 위해 아틀란티스를 침공했고 네이머는 자신의 백성들을 잃고 말았다.

네이머는 타노스가 찾는 스톤이 와칸다에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와칸다를 다시금 파괴시켰고, 티찰라는 복수심을 불태운다. 하지만 멀티버스간의 충돌인 '중첩(인커전)'을 막기 위해 모인 일루미나티의 일원이었던 네이머와 블랙 팬서는 다시금 불안한 동맹 관계를 맺게 된다.

일루미나티 일원인 네이머

하지만 인커전을 막기 위해서는 다른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죽여야만 했고 이 폭발을 자행할 수 없었던 일루미나티는 지구의 멸망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런 일루미나티에 반대 의견을 표출했던 네이머는 일루미나티의 적이었던 악당들과 교합해 다른 차원을 파괴하는 데 힘을 보탰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 역시 네이머의 뜻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빠져나오려던 순간, 티찰라는 네이머를 공격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조금 아쉬운 등장

네이머는 일관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악당의 행적일지언정 망설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블 코믹스 세계관 내에서 손에 꼽힐 만큼 강한 캐릭터임은 분명하지만, 여러 번 다양한 캐릭터들과 히어로들을 방해하기도 했으며 특히 블랙 팬서와는 악연으로 얽히고 또 얽혀 있는 사이였던 셈이다.

때문에 <블랙 팬서> 시리즈, 특히 솔로 무비의 2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서 네이머가 빌런 역할로 등장한다는 것은 꽤 자연스러운 이야기다. 아치 에너미로 다룰 수도, 혹은 동료였다가 배신하는 로키 같은 캐릭터로도 다룰 수 있는 복합적인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MCU에서는 원작 코믹스의 이야기와 사뭇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와칸다의 등장과 블랙 팬서의 초기 캐릭터 설정 등이 영화 속 스토리와 세계관에 알맞도록 다수 변형되었으며 그에 맞추어 티찰라의 이야기 역시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티찰라의 아내는 스톰, 즉 엑스맨이었지만 현재 티찰라의 아들을 임신한 여성은 와칸다의 유력 인사인 나키아인 것처럼.

네이머와의 이야기 역시 원작 그대로 가져오기에는 무리가 많다. 엑스맨과 함께 활동했으며, 판타스틱 포와 연관이 깊었던 네이머로서는 엑스맨과 판타스틱 포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못한 지금의 MCU에서는 새로운 기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찰라와의 지독한 애증과 악연, 그러면서도 서로의 비슷한 처지를 공감하는 미묘한 관계성에 대해 MCU에서 다루어 줄 수 있기를 기대했던 건 사실이었다.


새로운 스토리, 새로운 캐릭터, 그리고 새로운 관계성

채드윅 보스만의 사망으로 티찰라 또한 우리 곁을 떠난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게, 블랙 팬서 시리즈뿐만 아니라 MCU 전체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뽐냈던 '블랙 팬서' 티찰라 역의 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급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면서 이런 부분을 영화 속에서 보기는 아무래도 어려워졌다. 네이머가 슈리와도 악연이라면 지독한 악연이지만, 원작에서 네이머와 티찰라가 갖고 있던 '애증'이라기보다는 그저 증오 관계에 가까운 사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채드윅 보스만의 빈자리 때문에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상당한 수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슈리의 캐릭터 역시 많은 부분이 조정되었을 것이고, 네이머와의 연계성에도 나름의 장치가 필요했을 터다. 하지만 티찰라와 네이머 사이에 있던 그 지독한 악연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이제 접어야 할 것 같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예고편의 네이머

물론 '아이언맨'이 그랬고, '캡틴 아메리카'와 '토르'가 그랬던 것처럼 MCU는 독자적인 설정과 새로운 스토리를 기반으로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데 나름 탁월한 재치를 보여 왔다. 때문에 네이머 역시 티찰라와의 관계성이 아닌 독자적인 설정과 스토리로 새로운 매력을 보여줄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는 셈이다.

네이머가 원작에서부터 갖고 있던(물론... 인기가 그렇게 높은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이야기와 독특한 매력, 다수의 캐릭터들과 이어진 연계성을 기반으로 엑스맨 패밀리를 소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어쩐지 우려가 앞서는 것은, 아마도 채드윅 보스만이 없는 <블랙 팬서> 시리즈에 대한 걱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