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보니 히어로물의 포스터 같구만

영화 <쓰리 빌보드> (2018)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오코너의 소설

단편 소설 작가로 큰 명성을 얻은 미국의 소설가인 플래너리 오코너 (1925~1964)의 소설은 부자유스러운 욕망을 꿈꾸며 금욕으로 자신을 옭아맨 청교도인들을 조소하며 신랄한 태도로 비판한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소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가 아닐까.

가식과 심술로 가득찬 인물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할머니는 악의는 없지만, 피곤하고 호감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옳다는 작은 동의만 받으면 된다. 할머니는 자식의 식구들과 플로리다로 여행을 간다. 그러나 할머니는 고집을 부리며 지금 플로리다에 탈옥수가 돌아다니고 있으니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고 주장한다. 그것은 묵살되고, 결국 난동으로 차는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이때 진짜로 탈옥수의 무리들이 지나가며 모두를 몰살시켜 버린다. 할머니는 탈옥수에게 당신은 원래는 좋은 사람이었을거라며 너스레를 부리다가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죄수는 할머니도 좋은 사람이라며 단, 1분마다 누군가 총을 쏴준다면 이라고 단서를 붙인다. 가식이라는 결함을 뒤집어 쓴 사람들의 껍데기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량한 충격으론 그것을 알 수 없기에 단번에 강한 자극을 줘버린다.

좋은 표지도 찾기 힘들다

뻔 할 줄 알았던 이야기

오코너의 이 잔혹한 도덕극에선 여행길에 오른 가족들은 주유소 주인 레드 부부와 대화하며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지 않다며 한숨을 내쉬는 장면이 나온다. <쓰리 빌보드>는 밀드레드 (프란시스 맥도먼드 분)가 광고회사 사장인 레드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스)를 찾아가며 시작한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에 등장하는 주유소 사장과 이름이 같은 레드는 밀드레드를 만날 때 그 소설책을 읽는 중이었다.

범인을 잡지 못한 딸의 살인사건에 세상의 관심이 사라지자 밀드레드는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에 세 줄의 광고를 싣는다. 광고가 주목을 끌며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헤럴슨 분)와 경찰 딕슨(샘 록웰)은 무능한 경찰로 낙인 찍히고, 주민들은 경찰의 편에서서 그녀와 맞선다 .. 여기까지만 봤을 땐 정의감 넘치는 엄마가 공권력에 대항하며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내 예상은 단번의 강한 자극으로 처참하게 부서진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나면 밀드레드는 신부님과 대면한다. 그녀는 신부로부터 윌러비 서장은 평판 좋은 사람이고, 거부감을 일으키는 광고판을 만들며 법석을 피우는 것 보다는 더 좋은 해결 방법이 있을거라는 말을 듣고는 분노한다. 그리곤 곧바로 교회에서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신부와 상관이 없지 않다는 말을 전하며 능멸한다. 우리는 그녀의 아픔에는 공감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대응은 선을 넘었다는 인상을 준다. 이 영화는 여기서 재출발 한다. 그리고 영화는 밀드레드를 객관적 시선으로 응시하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났던 씨저의 말,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

결여와 결함을 가진 사람들

그렇게 결점을 가진 밀드레드라고 해서 불의에 맞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밀드레드 역시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되려 그 미숙함을 잘 컨트롤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분노가 자꾸만 산지사방으로 튀어다닌다. 아들의 학교 친구들의 사타구니를 (남녀 평등하게) 차버리는 한편, 소인증이 있어서 난쟁이라 불리는 제임스(치터 딘클리지 분)를 업신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밀드레드 또한 힘없는 자에 속하지만, 이 영화에서 적은 수효의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보듬거나 하진 않는다. 밀드레드 그녀 역시 다른 소수자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밀드레드의 전 남편 또한 폭력을 휘두르고, 그를 저지하기 위해 아들은 칼부림을 하며, 딸은 엄마가 차를 빌려주지 않는다고 욕을 하며, 이에 질세라 밀드레드는 딸에게 강간이나 당하라며 폭언을 한다. 그리고 딸은 그날 사망한다. 이 모든 행태가 만약 우리의 문제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맞을까?

이 이야기에서 결함의 끝판왕은 인종차별 주의자이자, 폭력주의자인 딕슨이다. 그는 자신이 따르던 왈라비 서장의 자살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 분풀이로 웰비를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그리고 새로운 서장이 등장해 그를 해고한다. 공교롭게도 이 타이밍에 밀드레드는 어떤 기부자에 의해 광고비용을 받게되고 계약은 연장되지만, 누군가가 불을 지른다.

이제는 뒷전이 된 '세 개의 광고판'들

영화가 이 지점까지 와버리면 이제 모든 것의 촉발이었던 광고판들은 오간데 없게된다. 딸이 죽던 날 밀드레드는 딸에게 강간이나 당하라고 쏟아부었고, 그녀는 정말로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되려 비난이 되어버린 광고판이지만 밀드레드는 그 아래에서 꽃을 가꾸며 참회한다. 그런데, 어떤 상징과도 같은 이 곳에 방화를 했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결국 이 분노는 경찰서로의 화염병 투척으로 이어진다. 인명 피해를 줄이고자 노력했으나, 안에 있던 딕슨은 크게 화상을 입어버린다. 그런데 광고판을 태운것은 경찰인력들이 아니라 밀드레드의 전 남편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엉뚱한 사람이 다친것이다.

얼굴을 붕대로 가린 딕슨이 가게되는 곳은 자신이 때리고 2층에서 밀어버린 웰비가 입원한 병실이었다. 자신보다 더 크게 다친 딕슨을 본 웰비. 그는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른채, 오렌지 쥬스를 내민다. 그러나 곧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딕슨이란 것을 알게되곤 분노한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딕슨을 향해 웰비가 보이는 태도는 복수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였다.

딕슨은 경찰서에서 화마를 만나기 직접에 왈라비의 편지를 읽었다. 너 임마, 그 욱하는 성격 좀 어떻게 해봐. 형사가 되고 싶다고했잖아? 그러면 필요한 건 총이나 고문기술이 아닌 사랑이야, 오직 사랑.

딕슨은 그 시혜와 사랑을 자신이 폭력을 가한 사람으로부터 돌려받는다. 그리고 관용과 해빙을 맞이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감독은 이런 사람의 변화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할까?

상처가 덧난다고 울지 말라니.. 결국 나도 울었다.

구원과 화해

그는 술집에서 어떤 악한의 강간살해 활극을 엿듣고는 그가 밀드레드의 딸을 살해한 범인이라고 직감한다. 그리고 그의 dna를 얻기 위해 일부러 얻어 맞기까지 한다. dna는 불일치 했다. 밀드레드는 자신 또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과 별다를바 없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고, 딕슨은 개과천선했다. 그리고 용의자 체포는 실패했다. 110여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중에 여기까지오면 벌써 102분의 지점이다. 감독이 이 애매한 위치에서 두명에게 이런 구성을 선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술집의 악한이 밀드레드의 딸이 죽던 당시엔 중동에 있었고, 거기서 여성을 성폭행 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버린 콤비는 이윽고 그를 처단하기 위해 차에 도시락과 총을 싣고는 주 경계를 넘기 위해 출발한다. 그들 또한 그 강간범을 찾아 죽이는 일에 확신이 없다. 하지만 가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누군가의 실수로 사랑하는 이를 죽게 했다. 혹은 비극을 맞이 했다. 이런 일은 우리를 집착과 고통속에서 머무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은 아이를 살리는 불가능한 일 대신에, 위기에 처한 다른 이를 찾아서 돕게 된다면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구원과 화해가 될 수 있다고 연출은 말하고 있다. 무엇이 좋은 사람인지 확정적 태도로 말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렇게 될 준비 정도는 마치는 관점이란 무엇인지 넌지시 전달하고 있다.

좋은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까?

밀드레드는 광고판을 태운 것이 경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흑인 서장이 보이는 정성도 거부한다. 진심으로 다가오는 것에도 경계심을 심어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좋은 사람이라고 결코 말하기 힘들었던 그녀도, 딕슨도 좋은 사람으로 변모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러면서 플래너리 오코너에게 메세지를 전하고 싶어진다, 단지 마음이 망가진 사람들이 좋아 보이지 않았을 뿐이라고.

망가진 마음, 그런데 그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서는 비극을 부른 독선과 아집을 품은 사람의 파멸을 그린다. <쓰리 빌보드>에서는 인물들의 부주의가 아이를 죽게 했다. 사람들은 아이의 죽음에 천착한다. 우리는 그 집착과 고통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불가에 가까운 배설대신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를 찾아 돌보는 것.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여 다시 한 번 인간으로 살게끔 해줄 것이다. 오코너가 보여주는 시니컬과 참혹 대신 따스한 시선과 화해로 무장한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야기는 편견과 차별, 무지와 폭력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