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눈과 소심한 듯 읊조리는 목소리,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듯 움직이는 손과 발. 스크린 위에서 보여주는 조현철의 세심한 연기는 나오는 작품마다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많은 이들의 뇌리에 그의 이름을 선명하게 남겼다. 작년 한 해 화제가 되었던 넷플릭스 <D.P>의 조석봉, <구경이>의 어리숙한 캐릭터 경수, 조금 더 뒤로 가면 영화 <삼진그룹 토익반>의 최동수 대리, <호텔 델루나>의 산체스까지. 나오는 작품마다 신스틸러에 내내 연기력으로 호평받던 그가 이번엔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은 국내 팬들에게는 큰 화젯거리로 다가왔다.
사실, 배우 조현철 그리고 감독과 각본가 조현철의 입지는 이미 독립영화계에서는 ‘아이돌’에 가까웠다. 변요한, 박정민, 구교환으로 이어지는 독립영화계 출신 스타 계보에 이젠 조현철의 이름이 추가될 차례이다. 여기 그가 주연으로 나온 네 편의 뛰어난 독립영화가 있다. 배우 조현철의 매력이 폭발하는 그 시절의 영화를 이번 기회에 한 번 살펴보자!
<국경의 왕>
조현철과 김새벽. 독립영화의 아이콘인 두 배우가 함께 합을 맞춘 임정환 감독의 <국경의 왕>은 각각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영화를 전공한 두 남녀, ‘유진’ (김새벽 분), ‘동철’ (조현철 분)의 영화다. 그렇지만 <국경의 왕> 여행지에서 출발한 두 남녀가 타국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펼친다는 그런 방식의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만이 만들 수 있는 우연과 상상으로 넘쳐난다.
두 번 반복되며 변용되는 상징 속에 ‘유진’과 ‘동철’은 똑같은 존재를 두 번 만나게 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선 ‘유진’과 ‘동철’은 갑작스레 타지에서 만난 선후배였지만, 두 번째 이야기에선 ‘동철’은 이미 타지에서 장기간 체류하고 있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선 마약왕이었던 세르게이가, 두 번째 이야기에선 세상 선한 여행자가 되어 나타난다. <국경의 왕>이 두 번 반복하는 서로 다른 두 편의 영화는 어느 쪽을 처음으로 잡아도 이야기가 되는 순환 서사가 되어 흘러간다.
이런 낯설지만 새로운 경험을 주는 <국경의 왕>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라는 타지를 찍고 있지만, 이상하리만큼 한국 같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낯선 공간을 익숙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조현철이다. 차창을 바라보기보단 포켓몬 고에 집중하고, 바닥에 앉아 고스톱을 치고, 마약 거래를 제안하는 형들에게 타박을 놓는 ‘동철’의 행동들은 지극히 한국적이다. 그래서 한국처럼 보이는 외국의 풍경에 ‘동철’의 존재가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인물이 두 번 반복하는 영화 만들기, 그리고 이국적이지 못한 타지의 풍경, <국경의 왕>이 보이는 낯선 작법들에 조현철의 존재는 그 자체로 개연성이 되어준다.
<초행>
<국경의 왕>에 이어 김대환 감독의 <초행>에서도 조현철은 김새벽과 함께 합을 맞춘다. 지난번에도 잠깐 연인 사이로 둘이 나온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7년 차 커플로 등장한다. 조현철은 미술 대학원을 준비하는 미술학원 강사 ‘수현’으로, 김새벽은 종합편성 채널 방송사 계약직으로 일하는 ‘지영’으로 분한 <초행>은 현재 한국 사회의 초상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지영과 수현은 연애 7년 차에 혼전 임신을 하게 된다.
때마침 둘은 지영의 부모님이 머무는 인천의 한 신도시와 수현의 부모님이 거주하는 삼척에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서둘러 결혼을 종용하는 지영의 어머니와 결혼은 지옥이라며 허탈하게 말하는 수현의 어머니 사이의 간극, 그리고 술을 마신 채 역정을 내는 수현의 아버지와 온화하게 수현을 맞이하는 지영의 아버지가 서로 대조되면서 이들은 결혼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선택을 쉽게 내리지 못한다.
<초행>의 불안정한 청춘들의 초상은 2016년도의 혼란스러웠던 정치와 사회상과 맞닿는다. 무언가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그저 돌발적이고 예기치 못한 환경 가운데 영화도 함께 그 혼란을 겪는다. 조현철이 연기한 수현 역시 이 불안함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캐릭터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 그는 대학원에 가기 위해선 교수님과 술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선배의 말에 안 받는 소주를 냅다 들이붓는다.
지영의 본가에서는 그녀를 보살피며 온화한 모습을 보이던 그가, 삼척의 집에서는 아버지의 폭력에 분노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모든 것이 뒤섞인 상황으로부터 비롯된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는 섬세함을 요구하지만, 조현철은 이러한 세밀한 연기에 성공한다. 그렇게 대조적인 두 공간에서의 하룻밤을 지낸 이 커플이 끝내 어디에 도착했을까? <초행>의 마지막 장면은 당신이 이 영화를 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영화로운 나날>
조현철의 사랑스러움이 극도에 치닫는 작품이 있다면 단연 이상덕 감독의 <영화로운 나날>이 아닐까? 어떻게든 배역을 따내고 싶은 무명 배우 ‘영화’ 역을 맡은 그는 독특하고 어리숙한 소년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는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 ‘아현’과 크게 싸운 어느 새벽, 애인의 집에서 쫓겨나 갈 길을 일은 채 무작정 길을 나선다.
‘영화’는 철부지 선배 ‘석호’ (전석호 분)을 만나 자신을 대신해 애인 ‘지현’에게 이별을 통보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또 갑자기 만난 큰누나 ‘혜옥’ (서영희 분)은 ‘영화’에게 오래전 그를 키워주었던 ‘깐돌이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자고 제안한다. 홀연히 걸어 나온 어느 해안도로에서 ‘영화’는 독립영화 감독을 만나 부디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달라는 간청을 받기도 한다. ‘영화’가 겪는 하룻밤 동안의 기묘한 경험은 그 이름처럼 영화만이 할 수 있는 환상적인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여정 끝에 ‘영화’는 사랑하는 애인 ‘아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모델 김아현이 처음으로 연기에 도전한 것으로도 화제를 모았던 <영화로운 나날>은 서영화, 전석호, 공민정, 이태경 등 독립/예술 영화계에서 다방면으로 활약했던 배우들이 흥미로운 배역으로 참여해 ‘영화’의 기묘한 여정을 함께한다. 훌륭한 배우들의 열연도 두드러지지만, 이 영화를 온전히 끌고 가는 힘은 배우 조현철이 가진 매력이다. 하나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의 연속에도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그의 순박함과 어리숙함이다.
‘깐돌이 할머니’의 환영을 보고는 그녀와 함께 춤을 추던 그의 몸짓이나, ‘석호’를 대신해 이별을 고해주고는 ‘지현’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웃음이 터져 나올 수 있었던 것 역시 조현철이 가진 힘이다. 허무맹랑한 일들을 믿게 만드는 배우의 힘. 그것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주려던 작품의 의도에 가장 걸맞은 힘이 아닐까? 조현철은 <영화로운 나날>을 통해 영화 그 자체가 되는 데에 성공했다.
<영시>
최시형 감독의 6년 만의 장편 복귀작 <영시>는 앞서 언급한 <초행>과는 다른 방식으로 혼란 속에 놓인 젊은이들을 조망한다. ‘상수’ (최시형 분)은 시를 쓰려 노력하지만, 매번 다가와서 사라진다는 말만 쓰는 실패한 시인이다. 조현철이 연기한 사진을 찍는 ‘권철’은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상수’의 집에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어느 날 ‘권철’ 앞에 오랜만에 ‘유진’ (유이든 분)이 나타나고, 둘은 ‘상수’에 집에서 연애하며 동거하기로 한다. 시를 쓰지 못하는 ‘상수’와 어머니를 잊지 못하는 ‘권철’ 그리고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유진’은 하염없이 늘어지는 여름날을 보낸다. 결국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셋은 목적지도 제대로 정하지 않은 채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영시>의 세 인물은 모두 나른하고 적당히 혼란스럽고 또 조금은 즉흥적인 존재들이다. 실내 흡연이라든지, 지인 커플과의 동거, 폐가 체험… 계획적인 젊음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인 청춘의 초상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영시>에서 드러나는 조현철의 ‘권철’은 앞선 세 영화보다 조금 더 무질서하고, 방향감각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서 사진을 찍는 ‘권철’의 표정과, 허망하게 어머니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 홀연히 사라진 것들을 바라보는 목적 없는 시선. 어리숙함과 사랑스러움 사이에 있던 조현철의 얼굴은 <영시>에선 오히려 불안함과 복잡함을 가득 품은 공허로 바뀐다. <영시>의 조현철은 청춘의 그림자를 드리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감독 조현철의 장편 데뷔작: <너와 나>
배우 박정민은 조현철과 대학 동기다. 둘 다 명문대를 다니다 자퇴를 선택하고 영화의 길을 걷기 위해 한예종에 진학했다. 박정민은 연출과로 입학했지만, 도중에 연기과로 전과를 선택했는데 후에 그가 <아는 형님>에 나와 그 이유를 밝혔다. 바로 조현철의 영화 연출이 특출나서, 연출보다는 연기를 택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현철은 영화과 재학 2학년 당시 이례적으로 단편 <척추측만>을 출품하며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가 2014년 정혁기 감독과 작업한 <뎀프시롤: 참회록>은 이후 <판소리 복서>로 재탄생한다. 이미 그의 연출력 역시 독립영화계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번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조현철의 장편 데뷔작이 상영된다는 사실은 큰 화제를 모았다. 그가 연출한 <너와 나>는 상영 4회차 내내 압도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관람 후 관객들의 반응 역시 호평 일색이었다. 돌아오는 12.1 개최되는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새로운 선택 섹션에 선정되며 다시 한번 그의 첫 장편을 관람할 기회가 다시 돌아왔다. 그의 탁월한 연출적 재능이 얼마나 빛을 발할지, <너와 나>에 대한 국내 영화팬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