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은 단일한 장소에서 전개되는 영화다. 도심에 위치한 이 건물은 식당, 작업실, 주거 공간 등으로 이뤄져 있고, 각 층은 나선형의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돼있다. 카메라는 사람들이 들고나는 중에도 끈질기게 건물에 머문다. 건물 내부를 비추거나, 간혹 건물 앞 언덕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술집, 출판사, 카페와 같은 장소는 늘 중요하게 다뤄졌지만, <탑>의 경우처럼 유일한 배경이 됐던 적은 없다. 그런 점에서 <탑>은 이례적이다. 물론 이런 영화적 구성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의 공간만을 영화의 장소로 삼은 예는 종종 있었다. 그러한 영화들은 대개 폐쇄적 공간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를 서사의 동력으로 삼거나, 바깥으로의 탈출이라는 목적을 향해 내달린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탑>은 그런 시도와는 거리가 멀다. 이 영화는 서로 비슷하면서 다른 평면들을 탑처럼 쌓은 뒤, 그곳을 통과하는 인간의 면면을 바라본다. 그 중심에 영화감독 병수(권해효)가 있다.

영화는 병수와 그의 딸 정수(박미소)가 김 사장(이혜영)이 운영하는 건물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병수와 김 사장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며, 정수는 김 사장에게 인테리어를 배우고 싶어 한다. 건물을 구입해 직접 고쳤다는 김 사장은 부녀와 함께 네 개의 층을 오르며 곳곳을 구경시켜준다. 이윽고 영화사 대표의 연락을 받은 병수가 자리를 비우면, 지하 작업실에 남은 두 여자는 병수에 관해 이야기한다. 김 사장이 “유명한 아빠”를 둔 기분을 묻자, 정수는 자신이 보는 아빠는 밖에서 보는 아빠와 다르다고, 그건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모습일 거라고 답한다. 김 사장은 밖에서 보는 모습도 그의 한 부분이며, 어쩌면 그것이 더 진짜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한 인간을 이루는 면은 얼마나 다양할까. 그리고 그 면들은 서로 어느 정도로 같거나 다를까. 중요한 건 한쪽에서는 하나의 면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앞서 식당 직원 줄(신석호)은 정수에게 김 사장의 이면을 알려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김 사장은 잘 나가는 사람이나 자기 말을 잘 듣는 사람만 좋아하는 속물적 근성을 지닌 인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 역시 김 사장의 전부를 알려주진 못할 것이다. 이제 영화는 병수의 다른 면을 보려는 듯 병수와 함께 다시 건물을 오른다.

<탑>은 거칠게 녹음된 기타 연주를 신호 삼아 네 개의 에피소드를 차례로 보여준다. 병수와 정수가 김 사장의 건물을 찾은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나면, 병수 혼자 건물을 방문하는 두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이번에는 2층 식당이 배경이다. 김 사장과 식당 주인 선희(송선미)까지 세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대화한다. 선희는 병수의 팬이며 그가 만든 영화를 전부 봤다. 하지만 병수가 준비하던 새 영화는 투자 문제로 엎어졌다. 그사이 정수는 김 사장에게 인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갔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선희와 병수가 3층에 함께 거주하고 있다. 영화를 만들지 않는 병수는 어느 해외 영화제의 회고전 참석 제의를 거절하고, 선희는 오랫동안 만나지 않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한다.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병수는 옥탑에 혼자 산다. 애인으로 보이는 부동산 업자 지영(조윤희)이 그를 찾아와 고기를 구워준다. 병수는 제주도에 내려가서 열두 편의 영화를 만들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병수들은 과연 서로 같은 인물일까? 그러기엔 이상한 대목이 꽤 있다. 하지만 이들을 다 다른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닮은 점도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에피소드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영화의 포스터가 이 문제를 생각하는데 좋은 힌트가 될 것이다. <탑>의 포스터에서 ‘탑’이라는 글자의 가로획과 세로획은 막대기 열 개로 분절돼있다. 이는 글자란 것이 길고 짧은 선들의 결합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 결합에는 논리적 이유가 없다. 선들은 그저 조형적으로 결합해 하나의 글자를 만들 뿐이다. <탑>의 각 에피소드도 논리적이기보다는 조형적으로 관계 맺는다. 각 에피소드는 자동차, 제주도, 월세, 미술, 우편물 같은 요소가 매번 다르게 배치된 결과물이다. 항상 누군가는 제주도에 갈 예정이거나, 이미 도착해있다. 누군가는 늘 월세가 밀려있고, 또 누군가는 과거에 미술을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운전을 한다. 한편, 각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는 이미지는 전부 사람들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식사하고 대화하는 모습이다. 병수는 조형적으로 연결된 에피소드들 사이에서 내용적 연관성과 뒤틀림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존재다. 그는 영화를 만들지 않는 영화감독이며, 아내와 별거 중인 남자로 묘사된다. 그런데 2층의 병수는 종교에 회의적인 반면, 옥탑의 병수는 별안간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3층의 병수는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지만, 옥탑의 병수는 건강해지려고 고기를 잔뜩 먹는다. 그런가 하면 옥탑의 병수는 3층의 병수를 불평하게 만든 장본인처럼 보인다. 심지어 3층의 병수는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자기 목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 남자는 찢어져 있다. 그는 이 사람이자 저 사람이고, 그러는 와중에도 병수다.

이토록 기이한 일이 발생하는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감독이라고 답하면 그만이겠지만, 건물 전체의 인테리어를 직접 손봤다는 김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병수가 처음으로 건물을 방문했을 때, 언젠가 2층에서 식사하자는 약속과 옥탑에 들어와 지내라는 제안으로 일종의 주문을 건 마녀와도 같다. 건물이 자기 소유라는 이유로 세입자들의 공간에 제멋대로 침입할 땐 제법 짓궂은 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밌게도 그런 김 선생조차 이 세계를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녀는 세입자가 번호 키의 비밀번호를 바꾸면 문을 열지 못해 짜증 내고, 자꾸 빗물이 샌다는 세입자의 불평에 난감해하며 슬쩍 자리를 뜨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창조자다. 어쩌면 이는 영화감독에 대한 비유는 아닐까. 홍상수 감독의 전작 <소설가의 영화>(2021)에서 배우 이혜영이 연기한 준희가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꽤 재미있는 접근이다. 탑을 한 칸씩 올랐던 병수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1층으로 내려온다. 이 장면엔 앞선 장면들을 압도하는 이상한 기운이 흐른다. 자연스러운 동선과 대사로 구성된 더없이 평범한 장면인데, 시간은 완전히 뒤틀려있다. 익숙한 공간이지만, 작은 세부들이 ‘이곳’과 ‘아까 그곳’을 갈라놓는다. 이것과 저것은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 그 미세한 틈새에 홍상수의 영화가 있다. 그리고 우린 여전히 병수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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