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집에 살며 속옷까지 공유하는데 상대 마음엔 근처도 닿지 못하고 헤매는 두 여자. 수경(양말복)과 이정(임지호)은 닮은 구석을 찾기 어려운 모녀다. 웬만하면 남들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하는 이정과 달리 수경은 무엇이든 꼭 튀는 것을 고른다. 새빨간 립스틱, 붉게 염색한 머리카락, 화려한 속옷, 빨간 자동차. 식당에서 소주를 마실 때도 복분자 원액을 타서 입맛대로 들이킨다. “너무 곱지 않니? 나도 이렇게 살고 싶어. 곱고 맑게, 낭만적으로.”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술잔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 수경, 사실 그녀는 너저분하게 사는 데 질렸다.
이제라도 가능한 한 삶의 윤택을 추구할 작정이다. 살갑게 다가오는 종열(양흥주)과 연애하며 남들이 눈치를 주든 말든 웃고 떠드는 수경은 남편 있는 여자들처럼 해외여행을 떠날 엄두는 못 내지만 애인과 수영장에 놀러 가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찾아보며 돈이 적게 드는 취미를 궁리한다. 그런 수경 눈에 이정은 답답하기만 하다. 어떻게든 지금과 다른 삶을 꾸리고자 안간힘쓰는 자신을 무시하듯 이정은 붙박이 가구처럼 제자리다.
수경이 이정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만큼 이정도 수경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이정이 세면대에서 속옷을 빨면, 수경은 용변을 본 다음 아무렇지 않게 팬티를 벗어 놓고 간다. 이정은 굳은 얼굴로 수경의 속옷을 움켜쥘 뿐 불평 한마디 내뱉지 못한다. 이정에게 엄마는 두려운 존재다. 자신을 “쓸모없는 년”이라 몰아세우는 일은 다반사고 화가 나면 손부터 날아온다. 언제 들이닥쳐 폭언과 폭력을 퍼부을지 모르는 수경을 피해 이정은 늘 어깨를 웅크리고 다닌다.
소심한 성격과 구부정한 자세 탓인지 회사에서도 다들 자신을 만만하게 여기는 듯하다. 일방적으로 부서 이동이 결정됐을 때도 이정은 입술을 깨물며 발끝만 쳐다본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는 이정. 다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는 확실히 안다. 어릴 적부터 엄마에게 욕먹고 매 맞은 탓이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듣고 자라는 바람에 인생이 꼬였다. 그러니까 이정이 수경의 말을 믿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수경이 운전대를 잡은 차가 갑자기 이정을 향해 돌진한 어느 날, 이정은 차량 결함을 주장하는 수경의 행동을 의심하고 법정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여느 가족 드라마와 다른 길을 걷는다. 갈등에 시달리던 모녀가 차츰 거리를 좁히면서 용서에 다다르는 여정은 어찌된 일인지 성사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상충하는 수경의 욕망과 이정의 욕망은 스릴러 영화의 긴박한 흐름과 비슷하다. 수경은 이정과 무관한 자기만의 행복을 되찾으려 하고, 이정은 과거 따위 상관없다는 듯 거침없이 전진하는 수경을 순순히 바라봐줄 마음이 없다. 잘라 말하면, 모녀의 싸움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화장실 변기에서 정액이 들어찬 콘돔을 발견한 이정은 엄마의 침대 위에 냅다 콘돔을 던져버린다. 수경도 지지 않고 똑같이 갚아준다.
얼마 후 이정의 침대 위에는 이정이 피우고 버린 담배 꽁초가 놓여 있다. 이정은 자신을 걸림돌 삼는 엄마에게 제대로 사과받고 싶지만, 수경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사과는 무슨 사과냐고 되묻는다. 둘은 철천지원수처럼 저주를 퍼붓고 침묵 속에서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다. 날카로운 고함과 원망 가득한 눈빛이 오가는 동안 영화는 보는 이를 숨 막히는 상태로 내몬다. 상대의 가장 약한 부분을 저격하며 치명상을 입혀야 하는 싸움, 모녀의 작은 집은 긴장으로 포화 상태다.
수경은 공격받는다.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지 못해서, 혼자 사는 여자라서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따라붙는 이유는 엄마답지 않아서다. 수경이 운영하는 좌훈방에는 하소연할 곳이 필요한 여자들이 드나든다. 남편과 시댁, 자식 흉을 한참 본 후에 여자들은 몸도 마음도 개운해져서 나간다. 이들조차 수경을 “불량 엄마”라고 나무란다. 수경이 비릿한 농담을 웃어넘기는 이유는 돈 벌기 위해서다. 그들의 대나무숲과 쓰레기통 역할을 감당하면서, 30년 가까이 이정 입에 먹을 걸 넣어주면서, 수경은 젊은 세월을 흘려보냈다. 곱고 맑게 살기란 요원하고, 공해처럼 절망이 쌓여 간다. 언젠가부터 수경은 그걸 이정에게 풀기 시작했다. 공격받은 만큼 공격한다.
수경은 훈증기 위에서 가운을 걷고 제 몸을 본다. 배꼽 아래 세로로 난 흉터가 선명하다. 이정이 수경을 두려워하듯 수경에게도 이정은 공포다. 이정은 수경을 찢고 뭉개면서 나왔다. 수경은 엄마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지만 애초에 엄마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없다. 따로 떨어져 있어도 모녀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수경과 이정을 비추며 영화는 묻는다. 수경이야말로 이정을 떼놓을 수 있을까? 혹시 수경이 자신을 지키려 애쓸수록 이정은 영영 아이에 머무르는 것 아닐까?
영화는 수경과 이정, 어느 한 편을 드는 대신 둘에게 다른 이와 관계 맺을 기회를 준다. 수경은 종열을, 이정은 소희(정보람)를 만난다. 종열은 수경에게 제 딸을 소개하고 사이좋은 모녀의 모습을 기대한다. 수경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진정 내던지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수경은 이정을 버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회가 끊임없이 제게 덧씌우는 엄마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한편, 직장 동료인 소희 앞에서 이정은 수경의 말마따나 애처럼 군다. 이정보다 어리지만 일찌감치 세상과 대면하여 제 삶을 일구어가는 소희에게 이정은 매달린다. 아이처럼 울고불고하며 속내를 쏟아낸 다음, 다음날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회피하는 식이다.
소희와의 관계가 어긋난 다음에야 이정은 인정한다. 갈등의 근원은 소희나 수경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정의 문제는 이정의 문제다. 제 삶을 새로 쓸 수 있는 사람도 이정뿐이다. 소희는 이정에게 왜 진작 집에서 나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소희에겐 통장에 돈이 충분하지 않아서라고 설명하지만, 이정은 실은 엄마처럼 살 자신이 없어서가 아닐까? 이정은 혼자서 모든 걸 책임질 자신이 없다. 엄마처럼 뒤틀린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은데, 엄마만큼도 못 살 게 뻔해 보인다.
자신이 자신이라는 이유로 공격받을까 봐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이정과 수경은 같다. 동전의 양면처럼 지나치게 맞붙어 있던 둘은 자책한 끝에 조금씩 각자가 찾아낸 출구로 나아간다. 영화는 화해 대신 이별을 택하며 마침내 따로 존재하는 이정과 수경을 오래 바라본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김세인 감독의 데뷔작으로, 임계점에 도달한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자존과 독립을 질문하는 작품이다. 영화를 처음 공개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5개 부문 수상에 성공하며 화제를 모았고,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제24회 우디네극동영화제에도 초청됐다. 집중력을 잃지 않는 연출과 주연을 맡은 양말복, 임지호의 호연이 돋보인다. 특히 양말복은 한 여성에게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로와 실망은 물론, 일순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까지 고스란히 드러내며 힘차게 서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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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