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버드>는 금지와 억압 속에 피어난 사랑을 다룬다. 냉전이 한창인 1970년대, 소비에트 연방이 점령한 에스토니아 공군기지엔 휘청대는 청년들이 복무 중이다. 이들은 딱 봐도 어리고 서툴다. 국가의 부름에 답하긴 했으나 진정 군인의 길을 꿈꾸는 이는 없어 보인다. 밤이면 담 넘어 바다에 뛰어드는 세르게이(톰 프라이어)는 작은 카메라에 들꽃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며 전역을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부대에 새로 부임한 전투기 조종사 로만(올렉 자고로드니)이 세르게이의 마음에 불꽃을 심는다. 미그기를 막아내는 임무에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지는 로만은 미세한 사랑의 신호에도 주저하지 않고 돌진한다. 사진을 매개로 가까워진 둘은 곧 사랑에 빠지고 평범한 연인처럼 미래를 그리기도 한다. 이들 사이를 가로막는 건 소련 형법 제121조. 동성 간 성적 접촉을 금하며 당사자는 최대 5년간 수용소에 수감해 처벌한다는 조항이다. 감시와 밀고의 위협은 이별로 이어진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사랑의 정열은 그리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파이어버드>는 연극, 영화, TV 시리즈에서 활발한 연기 활동을 펼친 배우 세르게이 페티소프의 경험담에서 출발했다. 그의 회고록 『로만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은 신인 감독 피터 리베인은 시나리오 작가이자 배우인 톰 프라이어와 의기투합해 각본을 쓰기 시작했고, 둘은 생전의 세르게이와 인터뷰하며 내용을 완성했다. “밝은 성격과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위협과 적대적인 환경에 직면해서도 자신의 마음을 따랐을 정도로 용감했던” 한 인물과의 교감은 <파이어버드>를 인간의 모습에 집중하는 드라마로 완성케 했다. 세르게이와 로만은 회색빛 세상에서 예술과 자유를 갈망하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다. 세르게이는 다신 올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하는 아마추어 사진가이자 언젠가 모스크바 연기 학교에 가는 꿈을 품은 배우 지망생이다. 로만은 그에게 필름 현상법을 가르쳐주고, 셰익스피어의 격언으로 응원을 전하는 다정한 연인이다. 둘은 작은 방에서 음악을 틀어둔 채 그들만의 세상을 그린다. 게다가 둘의 사랑이 처음으로 강렬하게 피어오르는 순간은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함께 관람한 다음이다. <파이어버드>는 메마른 세계를 다채롭게 물들이는 건 다름 아닌 예술과 사랑이라고 부드럽게 주장한다.

열정적 사랑, 외부의 억압, 서글픈 이별, 애틋한 재회. 영화는 손쉽게 예측할 수 있는 서사를 따른다. 복잡한 미스터리나 의미심장한 단서 같은 건 여기 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창의가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으나 그런 것 치고도 <파이어버드>는 전형적이고 단조롭다. 비단 이야기 문제만은 아니다. 영화가 그리는 사랑은 풍경 사진처럼 아름다우나 그다지 풍성하진 않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마찰에도, 사랑으로 인한 존재의 불안에도 영화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디테일이 생략된 묘사는 세르게이와 로만의 이야기에서 현실의 얼룩을 지운다. 사랑을 위협하는 외부를 그리는 방식 역시 투박하다. 형법 조항을 읊으며 으름장을 놓는 소령(마르구스 프랑겔)만이 이 세계의 가시적 위험으로 실체화될 뿐이다. 물론 여기엔 루이자(다이애나 포자르스카)가 있다. 대령의 비서로 근무하며 세르게이에게 마음을 뒀다가 후에 로만과 결혼하는 그녀는 극 중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유일한 여성 캐릭터다. 하지만 그녀의 동기나 감정이 충분히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아 이야기에 안착하지 못하고 어딘지 겉도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실제 사례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굴곡 없는 평평한 세계를 창조한 셈이다.

의외의 재미는 다른 데 있다. <파이어버드>는 관객 뇌리에 각인된 여러 퀴어 로맨스 영화의 이미지를 계속해 불러온다. 로만이 카메라로 세르게이를 찍을 땐 여지없이 <캐롤>(토드 헤인즈, 2016)이, 세르게이와 로만이 한적한 해변에서 휴일을 함께 보낼 땐 곧장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루카 구아다니노, 2018)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셀린 시아마, 2020)이 떠오른다. 세르게이의 슬픈 과거가 묻힌 채 출렁이는 검푸른 물의 질감은 <문라이트>(배리 젠킨스, 2017)의 배경과 닮지 않았던가. 세르게이와 로만이 처한 서로 다른 상황, 결코 행복하게 마무리될 수 없을 그들의 재회는 <브로크백 마운틴>(이안, 2006)이 그리는 만남과도 매우 가깝다. 게다가 여기엔 퀴어적 해석으로 당대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탑건>(토니 스콧, 1986)의 그림자마저 일렁인다. <파이어버드>는 퀴어 정체성과 동성 간의 사랑을 주제로 삼은 수많은 영화의 영향 아래 둥지를 틀었다. <파이어버드>는 영화가 제작되고 상영되는 현실의 맥락과 함께 살펴야 할 작품이기도 하다. 러시아 정부의 일방적 상영 금지 처분, 극단주의자들의 동성애 선전 반대 시위,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가해진 살해 위협 등은 영화를 오늘날 자행되는 인권 침해의 척도로 보게 한다. <파이어버드>는 본래 의도와 무관하게 실화와 재현, 사회적 이슈와 영화적 표현 사이의 관계를 되짚게 만드는 흥미로운 계기다.

금지된 사랑을 다루는 영화는 언제나 시선의 작동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사회적 통념에 매끄럽게 수용될 수 없는 시선은 슬며시 숨겨지며 특유의 정조를 만들어 내거나 도발적으로 돌출돼 지워지지 않는 질문을 던져왔다. <파이어버드>도 시선의 문제를 슬쩍 언급하며 문을 연다. 세르게이가 친구인 루이자, 볼로댜(제이크 헨더슨)와 함께 물속에 뛰어들었을 때를 떠올려 보라. 물에서 기억 속 소년의 형상을 잠시 마주한 세르게이는 곧 물 밖에 얼굴을 내밀어 숨을 몰아쉰다. 이 장면은 조금 이상하다. 마치 인물들이 마주한 것처럼 편집돼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세르게이는 루이자가 아니라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시선은 엇갈린다. 마주 보기는 지연된다. 영화엔 되돌아오지 않는 일방적 시선이 산만히 분포돼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애타는 연모의 눈길이다. 감시 체계의 작동일 때도 있다. 냉혹한 시대의 아슬아슬한 사랑을 형상화하는데 시선은 피해 갈 수 없는 테마다. <파이어버드>는 그 문제를 나름대로 불러들이고 있으나 끈기 있게 밀어붙이는 데는 실패했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손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