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라는 불쾌한 경험
‘여자가 화장도 좀 하고 그래야지’. 홀로 탑승하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여성 혐오 발언과 얼치기 정치 비평에 택시 타는 것을 최대한 멀리해 왔지만, 그날은 무거운 짐으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어김 없이 또 당했다. '택시. 여전하구나. 기어이 약해 보이는 사람 위에 서려는 고약한 심리라니. 마동석 앞에서는 맥도 못 출 선택적 혐오 발언자 주제에’. 입에서 쓴맛이 올라온다.
상대가 힘없는 노인의 모습을 해도 '택시'라는 밀폐된 장소는 우리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적극적인 항의 대신 ‘겉모습이 중요한가? 머리에 든 게 중요하지.’라고 게으른 기사의 편협함을 저격하며 소심한 돌려 깎기를 해보지만 타격감 없는 나의 말은 공중으로 흩어진다. 나는 택시 문을 소리 내어 닫는 것으로, 택시 앱의 '만족도 조사'에 별 하나를 주는 것으로, '이 기사 다시 만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으로 불편함을 내보여보지만, 찝찝함은 모래를 삼킨 것마냥 목구멍에서 서걱거린다.
고생은 글감을 남긴다
문장이란 것은 잊기 위해 노력할 수록 끈질기게 남는다. ''눈눈이이'. 나도 혐오의 말로 응수할걸. 어딘가에 신고라도 해볼까.' 분하지만, 의미 없이 뱉었을 문장에 잠식 당한 채 이틀이 지났다. 그러다 퍼뜩 ‘고생은 글감을 남긴다'라던 어느 소설가의 말을 기억해 내고, 그날의 경험을 반추해 나의 ‘저렇게만은 늙지 말자’ 리스트에 그 노인의 모습을 얹어 본다.
‘재미라도 선입견이 들어간 말은 뱉지 말자’
‘무의미한 말을 지껄이지 말자. 할 말이 없으면 그냥 입을 다물라.’
'좋은 것을 먹고 많이 읽자. 무엇을 먹느냐, 읽느냐가 나를 규정한다'
‘강강 약약’
.....
'저렇게만은 늙지 말자' 리스트를 작성하는 수고는 이틀 전 나를 태운 택시 기사로 대변되는 노인처럼 되지 않겠다는 필사의 다짐이자, '어른이 없다!'라고 한탄만 나오는 시대지만,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1935~2021)이나 미국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 같은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 어른을 좇아 살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시대의 아이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2020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은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지위를 갖는 세상을 만드는데 평생을 바치며 놀라운 법적 선례를 남겼다. 처음에는 변호인으로, 나중에는 연방대법관으로, 긴즈버그는 신중하고 전략적인 법률 활동을 통해 성평등이라는 개념을 근본적인 권리로 바꿔냈다. 이 모든 건 그가 여성 혐오가 만연했던 시절의 차별과 마주하면서 해낸 일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2019)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는 긴즈버그와의 인터뷰, 그의 가족, 법관 동료, 대학 동기들의 인터뷰 및 대법관 청문회 당시 화면 등을 통해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싸워온 그의 삶을 다면적으로 조명한다.
193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긴즈버그는 1956년 하버드 로스쿨 입학했고 후에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로 편입해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로펌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대신 교수로 임용돼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미국시민자유연합(ACLU)에 합류해 1970년대부터 성별에 근거한 차별을 용인하는 수백 개의 법 조항들을 하나씩 무너뜨려가면서 시대의 진보를 이끈다.
우리의 목을 밟고 있는 그 발을 치워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다. 우리 목을 밟고 있는 그 발을 치워달라는 것뿐이다" 노예제 폐지론자 '세라 그림케'의 말을 인용한 이 말은 '군인 가족들에 대한 혜택이 성별에 따라 달리 주어지는 것이 차별'인지를 가리는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소송에서 그가 변호인으로 한 변론의 일부다. 성차별이 인종차별과 다를 바 없음을 시사한 이 변론은 미국을 넘어 세계 여성 인권사에 한 획을 그은 명변론으로 기록되며 소위 '악명 높은 RBG'의 탄생을 알린다.
성차별 양성 모두에게 해롭다
그는 남성이 차별받는 사건도 변론하며,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법률적 권리를 갖는 시민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여성과 남성 모두의 권리를 향상시키고 보호하는 길이라 역설했다. 긴즈버그는 '와인버거 대 와이젠펠드 사건'에서 보육은 ‘엄마의 일’이라는 법적·제도적 규정 때문에 보육수당을 못 받게 된 와이젠펠드를 변론하였고,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와이젠펠드의 손을 들어줬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밈 #NotoriousRBG
2013년 보수적인 미국 남부 주들이 투표에서 인종이나 피부색을 근거로 차별을 둘 수 없도록 선거 제한을 엄격하게 금지한 '투표권법'의 적용을 피해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셸비 카운티 대 홀더’ 판결이 나왔다. 사실상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할 수 있도록 대법원이 허가증을 내준 것이나 다름없는 이 판결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이때 긴즈버그는 소수의견을 냈다.
한때 꿈으로만 여겼던, 미국 내 모든 구성원의 평등한 시민적 지위, 인종을 빌미로 희석되지 않은 민주주의 체제, 그 안에서 모든 유권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발언권이 위기에 처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분노를 담아 소수의견을 낭독하는 긴즈버그의 모습에 특히 젊은 세대가 열광했다. 래퍼 ‘노토리어스(Notorious, 악명 높은) BIG’에 빗댄 ‘악명 높은 RBG’라는 별명이 생겼고 머그잔과 배지, 인형 등 ‘긴즈버그 굿즈’들이 팔려나갔다. 그렇게 ‘악명 높은 RBG’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자 밈이 됐다.
긴즈버그의 낙관론
난 내가 가진 모든 재능을 활용해 최선을 다해 일을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사회의 찢어진 곳을 다시 메우기 위해,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쏟는 사람 말이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사회적 좌절과 개인적 아픔에도 긴즈버그는 신념, 강인한 의지, 선의 그리고 지혜로 한 걸음씩 세상을 바꿔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세상과 평등에 대한 낙관이 있었다. 여전히 성 평등은 요원하지만, 그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말하며, 지금까지 ‘우리, 사람들(#wepeople)’이 해 온 노력이 계속될 것을 믿"는다 낙관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미국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 (2019)
긴즈버그의 초창기 활동을 보고 싶다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와 비슷한 시기 개봉된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을 추천한다. 원제 <On the Basis of Sex>에서 읽을 수 있듯이 영화는 성별에 근거한 차별적 법 조항을 하나씩 무너뜨려 불평등의 세기를 변화시킨 긴즈버그의 투쟁을 그린다.
영화는 긴즈버그가 하버드대 로스쿨에 입학한 500여 명 중 9명뿐인 여학생으로 첫 수업을 들으러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993년 연방대법관에 지명되기 전 컬럼비아대 교수와 미국자유인권연맹 내 '여성의 권리 프로젝트'를 이끄는 변호사로 일하면서 벌인 삶과 법정에서의 싸움이 영화의 핵심 서사를 이룬다.
#이영애다이어트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영애 다이어트’가 화제가 됐다. 이영애가 다이어트에 성공한 식단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영애’라는 셀럽이 먹을 것 같은 음식은 먹고 먹지 않을 것 같은 음식은 피하는, 일명 '연상 기법'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다. 이영애가 통밀빵, 샐러드, 요거트를 먹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상상이 되지만, 닭발, 마라탕을 먹는 모습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이어트뿐이랴. 나는 가끔 긴즈버그에 빙의되어 회사에 여성 관리직 숫자가 많아져 문제라 말하는 동료를 향해 "이전에 남성이 회사를 이끌었을 때, 그 누구도 여기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관리직 정원 모두 여성이 되어야 충분하다"라고 단호하게 답하곤 한다. 그렇다. 긴즈버그가 아홉 명 정원의 대법관 중 몇 명이 여성이 되어야 충분할 것 같냐는 질문에 '아홉 명'이라고 답한 것에 대한 오마주다.
'나는 차분하고 논리적인 ‘김’즈버그다'라 주문을 외면 긴즈버그가 법조인으로 이뤄낸 위대한 성과, 성별에 근거한 차별을 무너뜨린 역사, 차별이 만연했던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했던 기개가 내 몸을 관통하는 듯하다. 물론 택시 사건처럼 울화통이 터질 때는 차분한 ‘김’즈버그 대신 까칠한 <도시인처럼>의 '프랜 리보위츠'로 분해 혐오를 재치 있게 받아치고, 잘근 잘근 씹어 먹는 도시인의 모습을 소환하기도 한다.
방심한 사이 훅 들어온 혐오에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던 요 며칠이었다. 혐오를 혐오로 받아치긴 싫다. 그러자면 더 많은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지혜를 들어야 한다. 다양한 삶의 방식과 가능성을 확인해야 한다. 나의 현재에서 이어지는 미래를 사는 그들의 모습을 참고하고, 본받아 다가오는 2023년에는 더 잘 늙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긴즈버그, 윤여정, 프랜 리보위츠, 마거릿 애트우드를 덕질 하며 내가 닮고 싶은 인물들에 빙의돼 보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영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8kg를 뺀 것처럼 그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좀 더 나은 내가 될 수도 있을테니.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