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한때 절친했던 대학 후배 ‘철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에 가기로 마음먹는다.
‘철수’와 막역했던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나선 길.
서울에서 전남 광양까지 세 친구는
이상하게 자꾸 잘못된 길로 빠진다.
“얼마나 잘못 온 거야?”
<우수>의 오세현 감독은 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영상 매체에 매력을 느껴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진학했고, 거기서 장률 감독의 수업을 들으며 필름메이커의 꿈을 구체화했다. 2006년 본인이 직접 출연하고 연출한 실험 단편 <자살은 살자다>로 제3회 서울국제영화페스티벌, 제26회 벤쿠버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받았다.
첫 장편 <일시>에서는 연출은 물론 직접 주인공을 연기해 눈길을 끌었다. 2013년 대학원 재학 당시 장률 감독의 수업을 들으며 로스토프 증후군(하루 2시간만 깨어 있을 수 있고, 오래 깨어 있으면 심한 두통이 동반되고 심각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병증)에 걸린 사람 이야기를 구상해 촬영을 시작했고, 오랜 시간 조금씩 다듬어 마침내 장편 데뷔작 <일시>(2020)로 완성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했다.
장률 감독의 <경주>(2013), <필름시대사랑>(2015)의 연출부, <춘몽>(2016)의 제작팀,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후쿠오카>(2020)의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춘몽>에서는 ‘건달 2’ 역할을, <후쿠오카>에서는 ‘벙어리’역을 맡아 프로 연기자 못지않은 연기를 선보였다. 10년간의 침묵을 끝낸 후 영화에서 단 두 번 등장하는 윤동주 시인의 시 중 한 편인 ‘사랑의 전당’을 읊는 장면은 관객들이 손에 꼽는 인상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11월 24일 개봉한 <우수>는 오세현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공개되어 호평받았다. 10년 가까이 장률 감독과 함께 작업했고, 두 번째 장편을 만들면서도 여전히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오세현 감독을 만났다.
<우수>는 어떤 영화인가요?
친구가 죽어서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초고부터 완고까지 변하지 않은 한 줄, 이야기를 관통하는 한 문장은 “철수의 죽음이 그들을 ‘우수천’으로 초대했다”입니다. 시놉시스로 말하자면, 사장이 한때 절친했던 대학 후배 철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친구와 함께 빈소로 향하는 이야기죠. 장례식장이 광양인데, 서울에서 출발한 세 친구가 자꾸만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됩니다.
<우수>의 출발점이 궁금해요. 철수의 죽음과 장례식장으로 떠나는 건 설정인 건지, 사장, 후배, 김 이사는 실존 인물에서 영감을 받은 건지, 아니면 철저하게 허구적 인물인지도 궁금하고요.
일단 세 인물은 모두 허구적으로 만들었어요. 영화의 시작에는 제 경험이 녹아 있죠. 10년 전쯤 친구 아버지 부고 전화를 받고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네 번, 다섯 번 정도 더 전화를 받고는 그게 친구의 부고란 걸 알게 됐어요. 무의식 중에 의도적으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친구의 죽음을 믿고 싶지 않았던 거 같아요. 이 실제 경험이 영화의 출발인 감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때도 제가 빈소를 찾아갈 때 남자 둘, 여자 하나는 같은 구성이에요. 그런데 영화의 인물로 보기는 어렵죠. 다만, 사장 역할을 저를 좀 닮아 있는 캐릭터로 설정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배우 이야기를 해 보죠. 윤제문 배우가 연기한 사장 역이 처음에는 좀 어색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워낙 카리스마가 있는 배우다 보니….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 역할에 딱이더라고요. 윤제문 배우가 사장에 스며들었달까요? 다소 강한 느낌의 윤제문 배우에게서 어떻게 이런 느낌을 끌어냈는지, 현장에서 윤제문 배우에게 주문한 연기가 있었는지 궁금해요.
제가 주문했다기보다는요, 저희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리딩을 많이 한 편이에요. 리딩을 하면서 배우들이 각자의 캐릭터를 만들었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리딩하면서 세 배우 모두 굉장히 능동적이었어요. 리딩을 마쳤는데도, 다시 “앞에 씬 한번 다시 읽어보자”라고 하면서 스스로 캐릭터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어요. “제문 선배, 이거보다는 좀 더 차분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다 제게 “오 감독, 이건 무슨 의도로 쓴 거야?”라고 물어보면 대답하기도 했죠. 윤제문 배우는 리딩에서 캐릭터 많이 만드셨기 때문에 현장에 왔을 때는 본인이 이미 캐릭터 갖고 왔어요. 제가 윤제문 배우에게서 무언가를 끌어내려고 했다기보다는요. 사실 윤제문 배우와는 <후쿠오카> 이후 2~3년을 가깝게 지냈어요. 동네친구처럼 일주일에 두세번씩 만났거든요. 그래서 <우수>를 찍으면서도 평소 윤제문 배우의 모습처럼 하면 좋겠다고 말한 적은 있어요.
‘로스토프 증후군(하루 2시간만 깨어 있을 수 있고, 오래 깨어 있으면 심한 두통이 동반되고 심각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병증)’에 걸린 청년 ‘오세’의 이야기를 담은 첫 장편 <일시>로 데뷔하셨어요. 이 영화에 대해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살하려고 떠났지만, 오히려 살고 싶다고 칭얼대는 느낌의 영화”라고 말하기도 하셨고요. 이번 <우수>의 사장도 묘하게 같은 지점에 있는 것 같아요. 첫 시퀀스에서부터 “나 오늘 죽을 거야”라고 말하고, 친구의 죽음을 잘못 받아들이기도 하죠. 하지만 영화 말미에서는 “나 이민갈 거야”라고 말하는데요, 어쩌면 농담처럼 느껴지는 말을 건넨다. ‘오세’와 ‘사장’은 비슷한 캐릭터인가요? 아니면 죽음을 인식하는 방식이 다른 건가요?
사실 제가 장편이 두 개밖에 안 되는데 연결하는 게 무리가 좀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수>를 만들고 그런 질문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걸으면서 자꾸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시>와 <우수>를 연관을 지으려고 한 건 전혀 없었어요. 근데 아무래도 제 속에서 나온 이야기다 보니 습관이라든지 경향이 있을 수 있잖아요. 오세나 사장 둘 다 굉장히 외로운 사람들이에요. 외로워서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고 싶은. 이런 식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고요.
<우수>는 전체적으로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어요. 그런데 유독 첫 장면인 사장이 계단을 올라가는 씬에서는 느릿하게 카메라가 발을 오래도록 따라가요.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찍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궁금해요.
첫 장면에서는 계단을 올라가서, 술 마시고 있는 사장이 있죠. 영화 종반부로 접어들면서는 철수가 살아있다는 꿈을 꾸고 난 후 계단을 올라가는 꿈을 꾸는데요. 똑같은 장면이죠. 그러니까 그건 사장의 발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발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철수의 죽음 소식을 들은 사장이 꿈에서 자살하려 계단을 오르는 철수의 발을 본 것처럼요. 그리고 첫 장면과 꿈 장면에 같이 계단을 올라가는 발을 배치함으로써, 철수와 사장이 어쩌면 동일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냄새가 조금 풍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사실 그 장면은 시나리오, 기획단계에서는 더 많았는데, 편집하면서 두 번만 쓰는 게 맞을 거 같아서 줄였죠. 관객들도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아파트에서 떨어지려고 결심한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으로 올라가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그래서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은 어떤 발걸음일까 하는 생각을 한 거죠. 여러 의미로 그 장면을 썼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영화 장면을 설명하는 건 관객들에게 좀 안 좋은 거 같아요. 영화만으로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게 제가 찍은 거니까요. 관객분들이 보시고 판단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윤제문, 김태훈, 김지성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 처음 만났다고 들었어요. 물론 윤제문, 김태훈 배우는 얼마 전 막을 내린 넷플릭스 시리즈 <형사록>에서 함께 연기하긴 했지만요. 그러니까 김지성 배우가 둘 사이에 합류한 건데, 어떻게 캐스팅 한 건지, 또 세 배우의 현장 케미스트리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윤제문 배우는 2~3년을 친하게 지내다 보니 제가 영화 준비하고 있는 걸 알고 계셨어요. 어느날 갑자기 “너 영화 하면 같이 하자”라고 하시길래, <우수>의 출발 전부터 같이 하게 된 거죠. 김태훈 배우는 예전에 제게 말실수인지 한번 던진 말인지 모르겠는데, “너 시나리오 쓰면 나도 보여 줘”라고 하셨어요(웃음). 그걸 제가 기억하고 있어서 김태훈 배우는 출연할 거란 자신감을 갖고 시나리오를 썼죠. 다 쓰고 시나리오를 드렸더니 “너무 좋다. 사장은 제문이형이야?”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말씀드리고 전활 끊었죠. 근데 윤제문 배우가 전화와서 “너 태훈이한테 후배가 태훈이라고 이야기했어? 얘기 안 하면 배우에게 실례일 수 있어”라고 말씀해주셔서 다시 김태훈 배우에게 전화해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정말이야? 나야 좋지!”라고 하셔서 하게 됐습니다. 김지성 배우는 세련된 이미지의 중년 여배우를 다양하게 물색하다가 만났어요. 번듯한 갤러리의 성공한 큐레이터답게 우아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센 강단 있는 성격의 이미지가 중요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구현해주셔서 감사하죠.
세 배우의 합은 어땠어요?
리딩을 한 네다섯 번 정도 했던 거 같은데요. 현장에서 테이크로 갈 것들을 리딩에서 먼저 한 느낌이에요. 이렇게도 대사를 던져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서 배우들이 생각을 하더라고요. 처음부터 쭉 읽고 끝나는 게 아니라 돌아가서 다시 하고, 저 부분 다시 해보자 하고, 저 씬 한번만 더 해보자 이러면서요. 궁금한 부분은 한번 더 읽어보려고 하고, 상대 배우와 함께 읽으니 본인의 길을 찾는 게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배우들은 그렇게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리딩을 많이 하는 게 참 좋았습니다(웃음).
이쯤에서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이죠. 대사가 별로 없는 <우수>에서 가장 쏙 박히는 김 이사의 대사 “XX, 깜짝이야!”는 어떻게 탄생했는지 정말 궁금해요.
저는 실제 경험하지 않은 것, 모르는 감정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았고요, 또 가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화의 많은 부분에 실제 제가 경험한 것들이 반영돼 있어요. 김 이사가 등장하는 씬에서 첫 대사도 제가 메모했던 것을 활용했습니다. 대학 시절에 만났던 여자친구를 헤어지고 몇 년 만에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거예요. 그런데 절 보자마자 한 말이 바로 김 이사의 대사였습니다(웃음). 그게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그때는 ‘아,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저런 말을 나한테 할 정도면 아직 나에게 감정이 좀 남은 게 아닌가’하는 착각도 했었는데 말이죠(웃음). 그래서 김 이사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 말을 하게 되면, 김 이사도 사장에 대한 감정이 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리딩이나 촬영 현장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회차가 워낙 짧아서 재미있었던 일은 없었던 거 같고요. 세 친구가 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을 마지막에 찍었거든요. 김 이사가 “나 철수랑 잤어”라는 대사 이후 어색해진 공기가 차 안에 가득한 장면이었고요. 차 안에서 김 이사랑 사장 둘만 남았을 때 김 이사가 “철수하고 잤다고 한 거 거짓말이야”라고 해요. 그러면 사장이 “알아”라고 답하는 장면이었죠. 이게 <우수>의 마지막 촬영장면이었어요. 엔딩컷은 아니고요. 제가 감독으로는 평소 코멘트도 많이 안 하는 편이었는데, 이게 마지막 촬영이다 보니 디렉션을 한번 해야겠다 해서, 렉카에서 뛰어내려갔어요. “제문 선배, 이거 엔딩 촬영이니 대사 멋있게 해주세요” 했더니 아 글쎄, 윤제문 배우가 “알아”라고 영화 대사를 그대로 해주셨어요(웃음). 몇 안 되는 디렉션이기도 했고, 윤제문 배우와 마음이 통했다는 느낌이 있어서 기억에 남아요. 결국 한 테이크로 오케이가 났고, 영화에서도 너무 좋았던 장면이었습니다.
너무 기분 좋았을 것 같아요! 세 배우 말고 조연 중에도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어요. 영화 중반에 사장의 사진관에 여권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이요. 그냥 장사가 안되어서 문을 닫으려는 사진관에 오랜만에 온 손님 정도의 설정인 줄 알았는데, 영화 말미에 다시 등장해서 긴장감을 줘요. 빈 사진관을 마치 자기 집처럼 자유롭게 다니기도 하고요.
그 장면을 찍을 때, 지금 사장이 여기 없으니 이 장소가 네 것인 것처럼 행동해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후반에는 놓고 간 안경을 찾으러 온 손님이고요. 이것도 제가 영화적으로 전달을 잘 못 한 걸 수도 있는데, 설명하면, 처음에는 이런 인물이 꼭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나리오에 막연하게 넣었어요. 일단 시나리오에는 넣었는데, 촬영 전까지도 어떤 인물일까를 계속 찾아야 했어요. 저는 사장이 친구의 빈소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선지자, 아니면 초인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여권 사진 손님은 사장의 빈 사진관에 들어와서 사진관의 불을 밝힌다던지, 아니면 빈 액자에 사장의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확인한다던지 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초인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본 거예요.
또 하나는, 영화에서 사장을 좀 더 강력하게 해주는 장치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한 것도 있어요. 안경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든지,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그런 게 사장과 중첩이 된다면, 뭔가 사장의 역할에 힘을 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한 거죠. 저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휴게소에서 만나는 꼬마 같은 경우도 그래요. 사장이 여정에서 만나는 또 한 명의 선지자가 그 꼬마가 아닐까. 그런 역할이라고 생각했죠.
이해가 될 듯 하면서 잘 안 되네요. 선지자는 어떤 의미인가요?
갈 길을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예언자일 수도 있고요. 막막한 허허벌판에서 선지자를 만날 수 있잖아요. 사장은 결혼도 못했고요. 휴게소에서는 ‘아이를 찾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는데, 사실 저는 이 방송 멘트가 김 이사랑 사장에게 하는 말 같거든요. ‘너네 아이 없잖아’라고요. 그런데 꼬마가 마치 아빠한테 안기듯 사장에게 안기는 게, 사장에게는 그런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그 여자 꼬마가 사장이 광야에서 만나는 선지자 같은 느낌, 역할로서 활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죠.
철수의 죽음으로 향하는 영화인데, 결국 영화에는 철수가 나오지 않아요. 마치 안톤 체호프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요. 의도한 것인가요?
초고에서는 빈소까지 도착하기도 했죠. 그런데 결국 철수는 안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말자는 생각도 들게 되더라고요. 철수는 안 나오고, 철수라는 이름만 나오면서 다른 인물들의 이름이 하나도 안 나오면 대비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다만, 사장이 갤러리에 가서 김 이사를 찾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은주’라는 이름을 써요. 오랜만에 찾아왔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결벽증처럼 하는 것도 좀 그렇기도 했고 그 정도는 나오는 거 괜찮겠다 싶었어요.
그만큼 철수가 중요한 인물인가요?
중요하다기보다 영화에서 이름 있는 건 철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걸 보는 관객들마다 어떤 생각을 하게 할 것 같아요.
세 배우는 잘못 찾아온 저수지 우수천에서 웃음을 터뜨려요. 긴장을 주던 삶의 연속성에서 뭔가 헛헛함을 넘어 웃음이 터지는 순간으로 전환하는 장면이죠. 그런데 결국 세 배우는 장례식장에 잘 도착했을까요?
네. 잘 도착했고요. 사장은 울었습니다(웃음).
이제 오 감독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 장률 감독님 이야기를 조금 해 보려고요. 영화적 스승인 장률 감독과는 <경주>(2013), <춘몽>(2016),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후쿠오카>(2020) 등 10여 년간 시나리오, 연출, 프로듀서로 함께 하셨죠. 이번 영화 제목도 원래는 <우수천>이었다가 장률 감독의 <망종>에 대한 오마쥬로 <우수>로 바꿨다고 들었는데요. 장률 감독에게 배웠던 가장 큰 가르침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것이 영화 <우수>에는 어떻게 반영됐나 궁금해요.
가장 큰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제 영화의 경험이 장률 감독과의 작업밖에 없어서 전부라고 보면 될 거 같아요. 이 이야기로 답을 대신하면 어떨까 싶어요. 장률 감독님은 한자 문화권이시잖아요. 물론 우리도 한자 문화권이긴 하지만 좀 다르죠. 예전에 <군산> 촬영할 때 일이에요. 한자로 된 <소설>이라는 단편이 있었어요. 저는 그전까지는 소설이 왜 소설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한자로 보니 ‘작은 이야기’인 거예요. 그게 마음에 들어와서 장률 감독님께 “소설이 작은 이야기란 뜻이에요? 그러면 대설은 큰 이야기, 인생인가요?”라고 여쭌 적이 있죠. 장률 감독님께서는 “그렇다”라고 답해주셨고요. 그 대화를 한 후 ‘영화는 작은 이야기를 하면 되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됐어요. 사실 처음에 <우수> 시나리오를 쓰면서 아이디어를 주변에 이야기했을 때, 많이들 우려하셨어요. 이게 영화가 되겠느냐, 무슨 이런 이야기로 영화를 만드느냐 같은 이야기들이었죠. 그런데 저는 그 소설, 한자를 보고 장률 감독님과 한 대화를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제게는 장률 감독님 말고는 비교대상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배움이었습니다.
장률 감독이 <우수> 제작에 참여했어요. 마냥 좋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웃음). 부담스럽기도 했을 테고요. 게다가 이번엔 감독이잖아요!
코로나19 때문에 중국에 계셔서 현장에는 아예 못 나오셨어요. 시나리오를 쓰고 보내면 피드백을 주셨고, 전화로만 의견을 주고 받았죠. 촬영 후 가편집 해서 링크를 보내 의견을 구했어요. 사실 장률 감독님이 걱정을 정말 많이 하셨어요. ‘초보 감독인데, 현장에서 다들 널 잡아먹으려 할 거’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그런데 저는 그 부분에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런 부담도 못 이겨내면 영화를 찍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장률 감독님이 한국에 계셨더라도 현장에 오시지 말라고 부탁드렸을 거예요. 진짜 고마운 마음인 건 알죠. 당신이 초보 감독일 때 그만큼 고생하셨던 거 제자가 겪지 말라는 마음이니까요. 제 옆에 앉아 있겠다는 마음은 너무 고맙지만, 거절해야죠. 항상 감독님 옆에 앉혀 놓고 찍을 수는 없잖아요. 저도 커야죠(웃음).
이번 영화에서 스승인 장률 감독을 넘어서고자 했던 장면이 있을까요? 새롭게 시도했다거나요.
약간 빗나간 대답일 수도 있겠는데요. 저는 장률 감독님의 어떤 부분을 영화적으로 따라하겠다고 의도하지 않아도 어차피 따라갈 거란 생각이 있어요. 벗어나겠다고 의도하더라도 어차피 비슷할 거란 생각도 있고요. 이건 영화를 반복해서 찍으면서 제 색깔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로서 스승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은 ‘청출어람’이라고 생각해요. 새롭게 시도한 구체적인 건 없습니다. 그저 <우수>에 집중했어요. 자연스럽게 장률 감독의 색깔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당연한 거죠. 앞으로 영화를 반복해 가면서 제 색이 나올 거라고 믿습니다.
영화 촬영은 몇 회차로 끝내셨어요?
6회차로 끝냈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렸듯이 촬영 들어가기 전에 리딩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저는 영화 현장 경험이라곤 장률 감독님 현장 말고는 없어요. 그래서 리딩을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요. 장률 감독님은 리딩을 한 번만 하거든요. 큰 코멘트도 없는 편이고 그냥 형식적인 느낌인데, 이번에 저는 전부 처음이었죠. 윤제문 배우나 김태훈, 김지성 배우 모두 리딩을 많이 하자고 했어요. 후반 작업을 포함해서 예산이 1억 원 정도인데, 리딩을 많이 한 덕분에 회차를 줄일 수 있었어요. 주연 3명 배우는 거의 노개런티로 출연했다고 보면 됩니다. 조연은 엑스트라를 포함해서 모두 출연료를 지급했고요.
초저예산 영화인데 출연진이 화려하네요. 장률 감독님이 좀 도와주시진 않았어요?
지인들이 40% 정도 도와줬고, 나머지 60%는 자비였죠. 몇 군데 지원 사업에 응모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장률 감독님은 음, 금전적으로는 못 도와주셨어요(웃음). 제작에 참여해주신 건 뭐, 저하고 그동안 함께 한 세월이 있는데 당연히 해주셔야 하지 않나요? 제가 <경주> 때부터 그간 해온 게 있잖아요. 뭐 당연히 감사한 일이지만 말이죠(웃음).
첫 장편 <일시>와 마찬가지로 이번 <우수> 역시 로드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로드무비에 특별히 애정을 갖는 이유가 있다면요?
처음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연히 두 편이 그렇게 된 거고요(웃음). 로드무비에 대한 애착이란 건 없어요. 로드무비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저는 씬들이 개별적으로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개별적으로 살아있는 씬들이 모여 하나의 큰 그림으로 뭉쳐지는 느낌인 거죠. 각자의 역할로 고정된 것보다는 끊고 싶은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런 부분 때문에 <일시>는 옴니버스 영화처럼 찍었어요. 세 덩어리가 모여 합쳐지면서 아, 이게 하나의 영화구나 하는 의도를 주고 싶었죠. <우수>에서도 한 번 나온 곳은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어요.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곳에서는 그 장소가 안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요. 그런데 후배의 핸드폰 가게는 계속 가게 되더라고요(웃음).
<우수>는 친구의 죽음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첫 장면도 화면 절반 가량이 어두워요. 무거운 이야기인줄로 예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는 가벼워집니다. 감독님에게 죽음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또 <우수>에서 그 죽음을 관객들이 어떻게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죽는 게 너무 무섭고 너무 싫습니다. 진짜 천년만년 살아서 어떻게 세상이 바뀌는지도 궁금하고요. 물론 그렇게는 할 수 없겠지만요. 그래서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죽음이 뭔지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단편을 많이 찍었는데요.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어릴 때부터 작업을 해온 거죠. <일시>에서도 오세는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고, <우수>에서는 친구가 자살했죠. 자살이나 자살 시도가 마찬가지라고 보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자살은 살고자하는 의지인 거 같아요. <우수>는 친구의 자살을 마주보러 가는 여정인데요, 사장의 마음은 이럴 거 같아요 ‘죽고 싶은 건 난데 왜 니가 죽어’라는. 그래서 친구의 자살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인해 사장은 살고자 하는 의지로 조금 전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우수>로 지었고요.
영화 제목 <우수>는 절기 ‘우수(雨水)’에서 차용한 거죠.
네. 초기 가제는 <삽교천>이었어요.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면서 문득 장률 감독님께 제목으로 존경을 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장률 감독님의 <망종>이 24절기 중 하나를 가져온 제목이잖아요. 저도 24절기 중에서 제목을 찾아봤어요. 마침 ‘우수’가 제목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수는 봄이 들어서는 ‘입춘’과 동면하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 사이에 있는 절기에요. 얼음이 녹고 비가 내리는 시기죠. 세 친구의 짧은 하루 여행에 삶과 죽음의 화두를 자연스럽게 녹여냈고, 꽁꽁 얼어붙은 관객 모두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준다는 의미에서요.
영화 대사 중에 “얼마나 잘못 온 거야?”라는 질문에 “많이 잘못 온 건 아니고, 좀 덜 간 것 같아”라는 대사가 참 따뜻한 위안처럼 느껴졌어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말처럼 들리더라고요. 관객들이 <우수>를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저는 이런 질문이 어려워요. 제 손을 떠난 거라 사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도 민망하거든요. 오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또 관객들이 오해하셔도 좋은데, 그 오해를 제가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해서요.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보시면 좋겠어요. 지겹게 보는 분도 있을 테고, 재미있게 보는 분들도 있겠죠. 그러면서 이 장면은 이런 의미이고, 저 장면은 저런 의미라고 편하게 생각하시는 게 제 입장에서 제일 좋습니다. 어차피 제 손을 떠난 영화이고, <우수>는 <우수>가 알아서 살아남아아죠.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영화란 무엇인지는요. 그래도 이렇게 답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전 원래 그림을 전공한 사람이에요. 그때만 해도 영화는 예술이랑은 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죠.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 쪽에서 일을 좀 했어요. 벽화 작업도 했고요. 그러다가 한 은사님께서 대학원에 가면 어떻겠느냐는 추천을 하셨어요. 여러 대학원을 놓고 고민하다가, 『영화, 피그말리온의 꿈』이라는 책을 접했어요.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의 이윤영 교수님이 쓴 책이었는데요. 책을 읽고 나서 이분께 영화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대학원에 진학해 이제껏 제가 보지 못했던 영화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예술영화, 독립영화들을 보게 됐어요. 이런 게 영화라면 나도 영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요. 구스 반 산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가 충격적이었고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입학한 다음 학기에 장률 감독님이 교수진으로 합류하면서 「장편제작수업」 강의를 듣게 됐어요. 거기서 만든 첫 장편이 <일시>였습니다. <일시>를 보시고 장률 감독님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지만 “<경주>에서 연출부 해볼래?”라고 하셔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죠. 그래도 아직 영화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답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차기작은 어떤 걸 준비하고 있으세요?
시나리오를 쓰고는 있는데 구체적으로 말할 단계는 아니에요. 장르는 드라마입니다. 다만, 이번엔 절대 로드무비는 아닙니다(웃음).
윤상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