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스포인 영화입니다. 관람전 광해군-인조-소현세자, 명나라-청나라 교체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시면 재미가 배가될 것입니다.
팩션의 틈
<올빼미> (2022)는 조선시대에 의문사한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마도 독살처럼 보이는 그의 시신에 아비인 인조가 보인 이상할 정도의 무관심에 대한 틈을 파고든다. 여기에 낮에는 보이지 않지만 밤에는 보이는 주맹증이 있는 침술사 경수 (류준열 분)가 끼어든다. 설정따라 역시 밤 장면이 아주 주요하게 그려진다. 데뷔 감독의 걸출한 장르영화이며, 밤 장면에서 리얼타임의 액션이 부각된다는 점에서 <추격자>(2008)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민초인 맹인이 '사람들은 소경이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거나, 왕에게 침술을 행하며 그의 생사여탈을 쥐기도 하는 모습에서 건져낼 시사가 큰 면도 있다.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인조라는 것은 일부 사가들도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올빼미>에서의 인조(유해진 분)는 그 설정의 정당성을 넘어 광인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즉, 아들을 죽이려고 작정한 아비의 패륜을 비춘다. 배우 유해진은 이런 왕을 연기하기 위해 집착과 아집에 경도된 모습을 굉장히 몰입력 높게 보여준다. 단지 아쉬운 것은, 인간이 그런 면모를 보이기가 쉽지 않기에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다. 인조는 불안한 정세 속에서 꼭두각시의 속성을 지닌 데다 청나라에 의해 욕을 본 왕이다. 그런 강박의 근거가 될만한 거대하고 매력적인 배경이 있지만, 영화는 경수와 소현세자의 관계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 역시 역사의 틈을 빌어, 인조를 명망없는 졸군으로 단순화하는 시각의 힘을 빌어 펼쳐진다. 그런데, 그런 시선으로 역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미디어 포퓰리즘의 요소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면서, 영화 <장미의 이름> (1986)의 원작 소설가로도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가 주창했던 미디어 포퓰리즘Media populism 이라는 개념이 있다. 즉, 미디어를 이용해 대중들에게 영향을 주려는 정치적인 모든 시도를 일컫는다. 역사(물)속에서도 미디어 포퓰리즘은 존재하는데, 사료에 근거했거나, 혹은 사료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부분의 상상력을 발휘할 때도 드러난다. 역사물 속 미디어 포퓰리즘이 드러나는 행태에는 당연히 대중의 관심 및 흥행이 연관되어 있다.
대부분의 대중은 권력과는 거리가 멀고 약자쪽에 속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룹이기에, 역사속의 깨진자에게 동정하고, 이들을 압박한 승리자에게 노여움을 비추기 쉽다. 그래서 역사속 패배자에게 선의 서사를 심고 동시에 승자를 악의 세력으로 그리게 되면 쉽게 동요한다.
폭군에서 성군으로
광해군은 영화 <광해> (2012)를 통해 세종에 비견될 정도로 사랑받는 조선의 왕이 되었다. 실은 그 전에는 폭군의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역사계에서 30여년 전부터 그의 재해석이 활발이 진행됐고, 명-청 교체기에 나라의 자존심과 명분을 동시에 지킨 왕의 이미지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폐위를 당한 역운의 왕이었기에 동정의 대상에 가깝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광해> 뿐만이 아니라 영화 <검객> (2020) 옛 드라마 <허준> (1999~2000) 에서 광해만한 성군이 없을 정도로 묘사된다.
그는 후궁의 자식인데다 둘째라서 정통성의 측면에서 불리했고, 아버지와 신하들의 견제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자신을 모함하는 자들이 있으면 어떻게든 적발하여 피바람이 불게했다. 본디는 허위 신고를 하여도 피신고인의 무고가 밝혀지면 신고인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광해는 이런 원칙을 깨고 일단 보고케하였고, 난립하는 가짜 뉴스들은 조정을 흔들었다. 실리주의, 중립외교 등으로 본받을 점이 많았던 광해는 이렇게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을 초래하여 결국 반정이라는 자멸을 부른다.
<올빼미>의 또다른 주인공, 인조
광해를 이어 반역으로 왕위를 꿰찬것은 인조였다. 당시 중국 쪽은 우리가 섬기던 명나라가 저물고 신흥 세력인 청나라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인조는 명을 지지하는 서인들의 세력을 업고 왕이 됐다. 그는 영화 <남한산성> (2017)에서 보았듯이, 청나라의 강인함에 고개숙이지 못하고 철지난 명나라를 쫒느라 청 황제 앞에서 절하며 머리가 찢어지는 치욕을 맛보았다. 아마 후대 사람들이 인조를 어리석은 왕으로 보는 이유에는 이런 이유가 컸을 것이다 - 그러니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적국이라도 배울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얼마나 야속했겠는가. 서인들은 이러다가 청이 소현세자를 들이밀어 저하께서 폐위 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한다고 압박을 넣지 않았을까? 자신도 반정으로 왕이됐으니 그 가능성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 <추노>(2010) 등, 미디어 속 인조는 절대권력을 쥐고, 괴팍하며, 아들을 죽인 폭력배로 등장한다. 그는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왕이 되었기에 모든 것을 다스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호란의 결과를 모두 그에게 묻기는 애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매체의 특성인 단순화에 의해 오직 그의 과오로 치욕을 겪은 것으로 그려진다.
인조의 과오중 하나였던 이괄의 난에 있어서도 그가 신하를 믿어서 생긴 일이었기에 고발자를 내치지 않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가 돌아와 소박을 맞았던 환향녀들의 남편과 시아비들이 '더렵혀진 몸' 이라며 이혼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이는 양반이나 신하들도 사정은 마찬가지 였다. 인조는 이들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고 끝까지 약자였던 여성들의 편을 지켰다. (결론적으론 승복했다) 미디어에 그려진대로 속이 좁고 컴플렉스 가득한 철면피였다면 보이기 힘든 태도였던 것이다.
매스미디어의 속성
돈과 시간을 지불하고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대중에게 단순함을 넘어서서 사유의 근거를 던져주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닐 수 있다. 제작자나 연출자는 자신의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선 생각의 고리를 던져줘야 하지만 이와는 반대적 속성인 것이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알려진 이미지를 극대화, 특히 단순히 긍/부정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 관객은 사고하며 접근해서 다양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쪽을 일반적인 악, 혹은 선으로 규정하는 시선으로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면 그 칼날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올빼미>의 엔딩을 보자. 모든 진실을 알게된 경수는 처벌 받지 않고 삶을 허락받는다. 이에 대한 설명은 따로 나오지 않아 의아함을 자아낸다. 그러나 세자의 죽음이후 더욱 병세가 악화된 인조는 학질로 사망한다. 그리고 그것을 민초와 상식을 대표하는 경수의 눈으로 뚜렷이 '목격된다'. 소현세자의 사인을 학질이라고 직접 공표한 인조의 자취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실리보다 명분을 택한자가 인과응보를 맞이하는 과정에 대하여, 무엇을 보고 들을지 똑똑하게 생각하고 선택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어렴풋한 메세지를 얻은 관객이 진실을 찾아보고 자신의 이목을 넓히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대중 영화와 조응하는 가장 좋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장르영화의 힘은 결국 여기서 온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