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동네에 홀연히 나타난 소녀. 새침하고 예쁜 데다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풍기는 그 아이는 순수한 소년의 마음을 뒤흔든다. 소년은 시름시름 앓는다. 사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첫 키스를 쟁취한다. 그러나 소녀는 곧 떠나 다른 남자 품에 안기고 소년은 슬픔 속에서 성장한다. 해묵은 소년 성장담의 한 페이지는 언제나 애틋한 첫사랑의 일화로 채워진다.

그저 지나간 추억 정도로 갈무리되면 좋을 텐데 <건축학개론>(이용주, 2012)의 그 유명한 대사처럼 소녀는 너무 쉽게 ‘썅년’이 된다. 소년의 사랑을 받는 소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일만으로도 나쁜 년으로 불린다. 소문 끝에 그녀들은 헤프고 못된 ‘만인의 연인’이 된다. 그러는 동안 소년은 진정한 자아 성찰의 길로 나아간다. 성장담 한 귀퉁이에 웅크린 소녀들의 운명은 쓸쓸하다. 그녀들은 과연 어떤 시행착오와 성장의 길을 걸어갈까? <만인의 연인>은 그 소녀 곁에 서보려는 영화다. “남자 주인공 시점에서만 보니까 그 인물의 복잡한 상황은 보이지 않는 게 아쉬”워서 한인미 감독은 열여덟 유진(황보운)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유진은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한다. 상대는 피자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알게 된 동갑내기 현욱(홍사빈)과 대학생 강우(김민철). 현욱은 첫눈에 반했다며 수줍게 다가오고 강우는 어른스러운 척 눈을 빤히 바라본다. 유진은 강우와 연애를 시작하는 한편 군말 없이 어깨를 빌려주는 현욱에게도 푹 안긴다. 여기에 사연은 있지만 핑계는 없다. 엄마와 지방으로 이사한 뒤 유진은 줄곧 혼자다. 엄마 영선(서영희)은 보일러가 고장 난 집에 딸을 내버려 두고 애인 곁에 머문다.

또래들과 어울리는 대신 일을 찾아 나선 유진에게 세상은 마냥 새롭기만 하다. 처음 해보는 일, 처음 피워보는 담배, 처음 마셔보는 술. 처음 접하는 세계는 안 그래도 큰 유진의 눈을 더 크게 만든다. 유진의 눈엔 다른 것들과 더불어 연애의 풍경들이 듬뿍 담긴다. 피자 가게 점장인 진열(우지현)과 아르바이트생 혜선(박정연)이 시시덕거리는 모습은 유진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린다. 그러다 눈앞에 사랑이 찾아오자 그녀는 풍덩 뛰어든다. 그 사랑이 뒤엉켜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생채기를 내며 크고 작은 사건을 불러올 때, 유진은 굳이 변명하려 들지 않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유진은 곧이곧대로 말하고 듣는 사람이다. 엠티 장소까지 찾아온 유진에게 강우가 짜증 내며 “여긴 어떻게 왔냐”고 묻자 유진은 답한다. “버스 타고 택시 타고.” 종종 내심을 전하지 않고 빙빙 돌려 말하는 영화 속 남자들에 비하면 유진은 놀라우리만큼 솔직하다. 숨김없는 태도는 시비 걸리기 딱 좋다. 피자 가게 손님이 쏘아붙일 때조차 유진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과를 받아내려고 꼬치꼬치 따진다. 애정보다 미움과 더 오래 함께했을 법한 유진이지만 전력으로 사랑하는 그녀의 얼굴은 다양한 감정으로 시종 빛난다.

<만인의 연인>은 연기 활동을 막 시작한 신인 배우의 꾸밈없는 모습이 캐릭터의 속성과 잘 맞아떨어진 예다. 어설픈 호신술을 가르쳐주는 강우를 쳐다보며 키스의 기회를 엿볼 때, 옆에 누운 현욱의 손을 덥석 잡아 제 옷 속에 넣을 때, 유진은 그야말로 난생처음 만난 감정에 온몸을 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처럼 10대 소녀의 성적 호기심과 욕망을 대범하게 다룬다. 대담함은 변명하지 않는 태도와 맞물리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 아이를 굳이 예쁘게 봐주지 않아도 된다고. 덕분에 군데군데 공감할 여지는 더 크게 열린다. <만인의 연인>은 내면에서 샘솟는 욕망과 외부의 시선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을 이들에게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손을 내민다.

<만인의 연인>은 사랑하는 다양한 여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선과 혜선은 단지 유진의 주변 인물 정도로만 묘사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사랑을 원하고 또 요하는 이들은 현실의 사랑이 어떤 씁쓸함과 불균형을 동반하는지 보여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세 여자는 사랑의 동지다. 영선이 사랑에 빠진 상대는 유부남이다. 창호(전석호)는 다정한 얼굴로 가정을 곧 정리하겠다고 이야기하지만 말뿐이다. 그는 영선의 말은 늘 부드럽게 거절하고 위험부담은 언제나 여자에게 떠넘긴다. 혜선과 진열은 알콩달콩한 커플이지만 혜선의 얼굴엔 간혹 그림자가 드리운다.

열아홉인 그녀는 자신의 연애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지 염려하는 한편 나름대로 결혼을 준비한다. 영화가 힘주어 강조하는 바는 아니지만, 영선과 혜선의 사랑은 여성의 경제적 취약성이 연애 관계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보여주는 적절한 예시다. 사랑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관계에서 여성은 더 많이 참아야 하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이제 막 애정의 바다에 뛰어든 유진으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세상 속의 사랑은 종종 그처럼 쓰다. 다만 영화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여자들의 의지와 선택을 온전히 보여주려 노력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덤덤한 얼굴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만인의 연인>의 카메라는 중요한 순간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기보다 한발 물러서는 전략을 택한다. 인물을 둘러싼 배경을 화면 가득 담는 동시에 인물 사이의 거리도 보여주기 위해서다. 믿음직스러운 성장 영화가 대개 그렇듯 <만인의 연인>도 혼자서 잘 설 수 있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래야 좋은 관계도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유진과 영선이 마침내 거리를 두고 마주 보는 장면에서 그러한 메시지가 온화하게 드러난다. 까슬까슬한 말로 서로 상처 주던 모녀는 마지막에 이르러 마음속엔 여전히 상대에게 줄 사랑이 남아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는다. 영화가 다루는 건 결국 훨씬 큰 의미의 사랑이었던 셈이다.

다만, 그와 같은 이해로 나아가는 동안 서사적으로 배치된 몇몇 에피소드는 간혹 너무 조급하다는 인상을 준다. 적지 않은 영화들이 인물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극단적 사건을 도입하곤 한다. 이때 사건의 발생이 자칫 반짝이는 세부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그 크기와 질감을 적절히 다듬는 일은 아직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는 듯 보인다. 마냥 명랑하고 건전한 성장담을 표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인의 연인>은 <아워 바디>(한가람, 2019)와 겹쳐보아도 흥미로울 영화다. 다행스럽게도 여성의 욕망이 제각기 그려내는 다양한 행로는 아직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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