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부산행>, <올드보이>, <로건>의 스포일러가 조금씩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내겐 영 고약한 악취미가 있다. 영미권 유튜버들이 슬픈 영화를 보며 오열하거나 충격적인 영화를 보고 고통스러워하는 영상을 찾아보는 취미가 그것이다. 이를테면 <부산행>처럼 제목이나 포스터, 좀비 액션이라는 장르만 보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한 신파 대잔치 앞에서 눈물을 참지 못하고 무너지는 영상 같은 거 말이다. 화면 속 유튜버가 좀비들을 완력으로 제압하는 상화(마동석)를 보며 “저 남자 너무 멋져!”라고 외칠 때, 내 마음은 은밀한 기쁨으로 차오른다. 응, 상화 멋지지. 그런데 20분 뒤에 보자. <올드보이>를 처음 보는 유튜버들을 볼 때에도 비슷한 감흥이 인다. 대수(최민식)와 미도(강혜정)가 처음으로 서툴게 몸을 섞는 장면을 보면서 “드디어 대수가 조금이라도 행복한 순간을 맛보는구나!”라고 순진하게 환호하는 유튜버들 앞에서 난 웃는다. 응, 조금만 기다려 봐. 영화 말미에 보라색 커버의 앨범이 하나 나올 거거든…?
사람이 왜 이렇게 배배 꼬인 걸까? 왜 나는 생면부지의 외국인들이 영화를 보면서 오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며 행복해 하는 거지? “내가 남 우는 거 보는 거 좋아하는 못된 사람이다”라는 아주 가능성 높은 선택지를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아마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스스로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으니, 이 쪽 가설을 강하게 밀어보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사람을 작정하고 울리려고 달려든 <부산행>의 신파 앞에서 무너진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올드보이>의 반전 앞에서 충격을 받은 게 나 하나가 아니라는 걸 내심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인종도, 사는 곳도, 쓰는 언어도 다른 먼 나라의 외국인들의 리액션을 찾아보는 거겠지. 이토록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느꼈던 것과 흡사한 감정을 느끼고, 유사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작품의 리스트 꼭대기에, 늙고 지친 뮤턴트 ‘울버린’ 로건(휴 잭맨)의 작별 인사인 <로건>이 있다.
물론 <로건>은 대충 예고편이나 포스터만 봐도 영화가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원래 엑스맨 세계관에서 로건은 언제나 고통받는 존재 아니었던가. 쉽게 죽을 수도 없는 회복 능력 덕분에, 로건은 프랜차이즈 내내 다른 사람들이라면 몇 번이고 죽었어야 마땅할 만한 고통을 거푸 겪었다. 대충 기억 나는 것만 적어봐도 그렇다. 그는 원자폭탄을 맞았고, 온몸의 뼈가 아다만티움으로 교체되었고, 교통사고로 몸이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머리에 총을 맞고, 아다만티움 송곳으로 온 몸을 찔리고, 철근이 꽂힌 채 바다에 수장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죽어나가는 걸 200년 가까이 지켜봤다. 그러니 늘 그렇게 표정이 안 좋고 성격이 더러운 거겠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로건이 포스터에서 세상 괴롭고 지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영화가 이렇게까지 어두울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또, 그냥 늘 그렇듯 죽을 만큼 괴롭고 고통받겠지.
하지만 로건은 캐릭터의 여정의 말미에 이른 <로건>에서 정말 전에 없는 고통을 경험한다. 영화 타이틀이 뜨기도 전에 산탄총 한 발부터 맞으며 시작되는 로건의 여정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동료 엑스맨들 태반이 세상을 떠난 미래, 로건의 치유 능력은 갈수록 쇠약해지고, 평소였다면 치유 능력으로 커버가 되었을 아다만티움 골격의 독성은 로건을 몸 속부터 좀먹어 들어간다. 로건의 유사 아버지이자 정신적 지주인 자비에 교수(패트릭 스튜어트)는 치매로 인해 특유의 뇌 능력을 쓰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발작을 막아주는 주사와 뇌 능력을 제한하는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자비에는 온실 속의 식물처럼 방 안에 처박혀 서서히 시들어가며, 자신을 가둬 둔 로건을 향해 모진 원망을 토해낸다. 우리는 너에게 가족을 주었는데, 그 보답이 고작 이거냐. 이 배은망덕한 놈. 폭언에 익숙해진 로건은 능숙하고 지친 태도로 자비에를 돌본다.
정신이 쇠약해지는 자비에 교수와 육신이 쇠약해지는 로건, 그리고 예상치 못한 동행인 소녀 로라(다프네 킨)가 함께 미 대륙을 종단하는 여정, 더는 예전처럼 회복할 수 없는 몸뚱아리를 가지고 로건은 예전처럼 온몸으로 총을 맞고 칼날에 찢기며 영화 내내 헐떡인다. 그리고 <로건> 리액션 영상을 찍는 유튜버들은, 그 헐떡임을 보며 내가 그랬듯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낸다. <로건>은 왜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울리는 걸까. 아마 로건이 지금껏 경험해 온 다른 고통과 달리, <로건>에서 겪는 고통은 슈퍼히어로가 아닌 우리도 모두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고통이라서 그런 건 아닐까? 필멸자인 우리는 모두 늙고 병든다. 아주 많은 경우 부모 세대가 걷잡을 수 없이 늙고 병드는 걸 지켜봐야 하는데, 그 간병의 고독함은 사람을 좀먹는다. “자식이라면 당연히” 참고 견뎌야 한다는 주변의 시선은 어디 가서 힘들다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게 만든다. 그리고 자식 세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식 세대는 높은 확률로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로 성장할 것이다. <로건>에서 로건이 경험하는 고통의 본질은, 평범한 우리 삶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사람들이 <로건>을 보며 오열하는 건 내가 리액션 유튜버들의 오열을 보는 심리와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저 서러움, 저 쓸쓸함, 저 아픔을 경험하는 게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마음. 내가 경험하는 아픔을 타인도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 상대의 아픔을 내가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위로해 볼 수 있다는 용기, 한창 때에는 불로불사의 슈퍼히어로인 줄로만 알았던 존재조차 언젠간 늙고 병든다는 것을 확인하는 공감의 눈물 같은 거 말이다. 각자가 겪는 고통은 모두 개별적이겠으나, 그 개별의 고통들이 공유하는 보편성을 통해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남이 고통받는 걸 보며 즐거워하는 게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선뜻 상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리액션 유튜버들이 오열하는 걸 찾아보는 마음도, 공감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는 간곡한 노력인 거로 정리하자. 아니, 나 정말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라니깐?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