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쓰고 노래 공연을 한 적 있다. 눈은 뚫려 있어 모든 걸 볼 수 있었지만, 왠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관객 중엔 낯선 사람도 지인도 있었는데, 일상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처럼 원래와는 다른 존재들로만 여겨졌다. 내 얼굴을 가린 것임에도, 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실체가 가려진 느낌. 기묘했다.
가면은 노골적인 진심?
노래하는 내 목소리조차 낯설었다. 내 몸이 아니라 외부에서 날아온 소리가 내 몸을 뚫고 나가는 것 같았다. 녹음한 자기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느끼게 되는 서먹함이나 민망함과는 달랐다. 가면 안쪽의 협착한 틈 사이에서 굴절된 소리가 광대뼈를 울리며 ‘이게 진짜 네 목소리다’ 라 속삭이는 것 같았다. 지인이든 낯선 이든, 나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궁금증도 잠깐. 일순간 자의식이 낱낱이 해체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게 진짜 내 얼굴이고 목소리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을 쓰자, 오래 쓰고 있던 또다른 가면이 벗겨진 것이었다.
가면이 함의하는 건 다양하다. 악한 짓을 할 때도 선행을 베풀 때도 가면은 필수적이다. 원래 악하고 원래 선한 것을 가리거나 위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위장을 위한 가면은 행위 자체가 위장이라는 것을 전면적으로 암시하기에 차라리 노골적인 맨얼굴에 가깝다. 더 무섭거나 은밀한 가면은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온몸으로 가면이 되는 일이다. 진심을 말하겠다는 사람이 진심임을 강조하는 순간, 진심이 아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가면은 숨기기 위해서 쓰거나 씌워지는 게 아니다. 차라리 더 강하게 드러내고 어필하기 위해서다. 부러 가면을 쓰거나 누군가에게 가면을 씌우는 자는 진심과 진실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것에 발목이 붙들린 자다. 이탈리아 호러 무비의 대부 마리오 바바의 데뷔작 <사탄의 가면>(1960)은 삶과 죽음, 사랑과 복수의 가면이 겹으로 씌어진 영화라 할 수 있다.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비이Vyi(마녀의 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원작과는 많이 다른 내용이다. 1630년 몰디비아의 공주 아사가 연인인 이고르 야부비치와 함께 바이다 가문의 군주인 친오빠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마녀로 몰린 것이다. (미국 개봉판과 원작의 내용이 약간 다른데, 아사와 야부비치가 근친 관계라는 원작의 설정이 더 설득력 있다. 미국판에선 주종 관계로 암시된다.) 십자가에 매달린 아사의 얼굴엔 안쪽에 침이 박혀 있는 괴기스런 형상의 가면이 씌어져 있다. 아사는 바이다 가문을 향해 대대로 저주받을 것이라는 말을 퍼붓고 죽는다. 200년 후, 마차 여행을 가던 러시아의 크루바얀 교수 일행이 마차 바퀴가 빠져 수리하던 중 호기심에 이끌려 바이다 가문 소유의 오래된 예배당에 들어간다. 거기서 아사의 관을 발견하곤 실수로 십자가의 봉인을 깨버린다. 그로 인해 마녀 아사와 야부비치가 부활하며 복수가 시작된다.
고성과 스산한 숲의 이미지, 프리츠 랑이나 칼 드레이어의 영향이 진하게 느껴지는 음울한 흑백 영상 등 전형적인 고딕 호러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영화다. 죽은 자가 부활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은 이후 숱하게 만들어진 호러 영화들의 원전이라 할만하다. 가면 안쪽의 침에 의해 얼굴에 숭숭 구멍이 난 아사의 모습이나 눈알이 파헤쳐진 시체 따위는 지금 봐선 엉성해 보일지 모르나, 당시로선 몇몇 나라에서 상영 금지될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들이었다. 하지만 더 곱씹을만한 건 다름 아닌 ‘가면’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가면이었다
촬영감독 출신인 마리오 바바는 소품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 효과에 예민했다. 이 영화에서 핵심이 되는 소품인 가면은 첫 장면에서부터 부각된다. 언뜻 보기에 한국의 하회탈을 위악적으로 비틀어놓은 느낌이다.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악마의 형상이지만, 보자마자 실소가 샌 것도 그 탓인지 모른다. 유치해 보여서도 엉성해서도 아니다. 외려 이상하게 슬픈 느낌마저 들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숨기거나 표출하게 되는 여러 감정들이 약간은 우스꽝스럽고, 약간은 과잉되게 다 담겨 있는 형상 같았던 거다.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자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우습기도 측은하기도 괘씸하기도 하기 마련이다.
그 모든 심리적 형태가 다 담긴 얼굴을 보고 있는 심사 또한 스스로 쓰고 있는 가면을 들통난 것 같아 찜찜해질 수 있다. 가면은 서로가 서로를 되비치는 꾸며진 거울이기도 하다. 가면과 가면 사이의 진짜 얼굴을 봐버릴 때 돌아오는 건 환멸뿐이지 않던가. 그리고 그 환멸은 미감과 매혹의 안쪽에 박혀 있는 가시와도 같다. 가면이 정말 위험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내게 이 영화가 바로 그러한 인간 역학의 노골적인 풍자로 여겨진 건 스토리와는 별 상관없다. 오로지 가면만 보였다면 영화에 대한 모독일까.
이 작품으로 데뷔한 바바라 스틸은 아사와 200년 후의 카티아를 1인 2역 한다. 아사일 때엔 마녀지만, 카티아일 땐 순결한 공주이자 가문에 내린 저주를 거울삼아 비로소 사랑을 깨닫게 되는 가련한 여인이다. 그 중간에 가면이 있다. 가면을 쓰고 죽은 아사는 가면으로 인한 상처로 흉측한 몰골이지만, 카티아일 땐 해맑고 청순하고 신비스러운 미인이다. 아사일 땐 노골적으로 비틀린 마녀의 얼굴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점점 더 불가사의해지는 건 카티아이다.
아사는 가면을 쓴 채 처형당했지만, 카티아는 본연의 얼굴 그대로 스스로도 의식 못한 가면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위선이나 위악의 문제가 아니다. 저주받은 가문의 공주라는, 그럼에도 자신에게 드리워진 저주를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카티아는 가면의 안쪽과 바깥쪽을 동시에 표상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사는 부당하게 마녀라 낙인찍혀 처형됐다. 중세 유럽엔 그런 일이 대놓고 허다했다. 사회나 법률, 종교적 윤리 기준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은 마녀를 부르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게 진심이든 진리든 진실이든 세계의 기득권과 욕망을 움켜쥐고 보위해야 할 자들에게 일방적 규약을 위협하는 존재들은 마녀라는 가면을 씌워 없애버려야 할 위협자들이었다. 그래서 신의 명령이란 이름으로 처형했다. 잔다르크가 그랬고, 갈릴레오가 그랬다.
마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녀를 표상하는 가면은 무시로 재생산되었다. 그런 습속과 편견은 중세와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도 이어진다. 지금은 안 그런가. 대놓고 답하진 않겠다. 중세도 유럽도 아닌 시공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이 어떤 식의 가면들을 줄기차게 바꿔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부로 얘기하진 않겠다. 다만, 가면 없이 살고자 하는 노력이 얼마나 혹독하고 끔찍한 가면을 자신도 모르게 가공하게 되는지에 대해 스스로 따져보자고 슬며시 제안해 볼 뿐이다. 이 역시 가면의 얼굴을 쓴, 스스로는 가면을 쓰지 않았다고 우기는 어떤 가면 쓴 자의 위협(?)인지도 모른다. 가면은 그것을 가면이라 하는 순간, 또 다른 가면이 되므로. 그래서, 그렇게 가면 쓴 자의 얼굴을 두 겹 세 겹 덧씌워 가면이 가면이라는 사실을 지우므로. 반복건대, 가면은 뫼비우스의 안과 밖이다.
턱 뒤의 가면이 더 큰 가면이다
가면을 쓰고 노래할 땐, 노래를 더 잘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더 멋있게, 더 그럴싸하게 뭔가를 보여주고 들려주겠다는 욕망마저 사라진다. 그저 나 자신인데, 그럼에도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아 편안하고 주저없어진다. 어떤 공허한 진공 속에서 유현하게 감정이 흘러가며 가면의 안팎을 스스로 굽어보고 들여다보고 쳐다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게 수시로 여러 개의 가면을 바꿔 쓰고 있는 듯한 일탈감이 외려 더 분명한 자신을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는 상태가 된다. 굉장한 역설이다. 뭔가 창피하고 어딘가 찝찝하며 왠지 모르게 시원하지만, 그 모든 감정조차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그저 스스로를 내보이고 구경하는 광대이자 관객이 되는 것.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성찰은 데카르트의 명제마따나 ‘가면을 가리키며 걷는 일’이다. 가면은 세계라는 피막이 덧씌운 모든 이의 진짜 얼굴일 수 있다. 그것은 보이는 얼굴보다 더 뒤쪽, 턱 뒤나 목덜미에 더 두텁게 여러 겹 덧씌워져 있다. 가면은 그것을 가면이라고 깨닫는 순간, 스스로를 발가벗는다. 그런데, 그 발가벗음조차 또 하나의 가면이다. 가면의 안쪽은 그렇게 늘 가시가 돋아있다. 피고름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벗겨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면은 삶 자체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