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와 빌런의 싸움을 소재로 한 다양한 콘텐츠들에서 각각의 캐릭터마다 소위 '숙적', 즉 아치 에너미로 불릴 만한 관계들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숙적 관계인 배트맨과 조커가 그랬고, 캡틴 아메리카와 레드 스컬이 그랬다. 결국의 결국에는 히어로가 승리한다고 하더라도(이른바 정의 구현) 이들의 싸움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상대 빌런이 히어로가 가진 약점이나 아픈 구석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히어로와 빌런 사이에도 궁합이 있다는 얘기다. 히어로 입장에서 보면 짜증나는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미흡한 부분이나 약점을 공격당해 고통받고 궁지에 몰리는 위기에서 히어로는 성장하게 되어 있다. 상황은 다르지만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빌런도 성장하고, 한 단계 나아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히어로를 괴롭히러 본무대에 다시 등장하곤 한다.
스파이더맨의 대표적인 숙적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는 킹핀은 그런 의미에서 뉴욕의 히어로들과 궁합이 잘 맞았다. 킹핀의 본거지 헬스 키친은 삼합회부터 마피아, 야쿠자 등 전 세계의 온갖 범죄조직이 몰려 있는 우범지대인데 이 지역의 최고 권력자가 바로 그였다. 뉴욕을 본거지로 활동하는 대표적인 히어로 스파이더맨은 물론이고 헬스 키친의 변호사이기도 한 데어데블, 그리고 제시카 존스도 그와 엮이게 됐다.
특별한 초능력도 없고 특수한 테크놀로지 기술이 가미된 것도 아니요, 강력한 수트조차 없지만 킹핀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의 허를 찔러 그를 이용하는 데에 재능을 보였고 이 능력을 십분 발휘한 결과 암흑가의 수장이 된다. 여기에 육탄전에도 쉽게 밀리지 않는 맷집, 2m의 거구에서 나오는 완력, 스모를 비롯한 격투기의 달인이기에 어지간한 전투에서는 히어로 캐릭터들과도 대등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초인계 캐릭터가 아닌가 싶지만 엄청난 수준으로 강한 '일반인'이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스파이더맨이 진심으로 킹핀을 상대했을 때에는 맥도 추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그러니 이런 타입의 악당은 육탄전이나 실제 전투보다는, 지략과 권력을 사용하는 물밑작업으로 히어로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지능전으로 승부해야 한다. 약자들을 보호하고 정의 구현을 위해 지켜야 할 기준이 많은 히어로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범죄자들, 그 중에서도 킹핀 같은 존재가 마음만 먹으면 꽤나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스파이더맨과 숙적 관계로 엮일 수 있었던 것도 피터 파커가 불살 원칙을 지키는 인물이란 점에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금의 킹핀에게 최강의 적수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는 단연 데어데블일 것이다. 킹핀이 현재의 MCU를 위시한 실사화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평가가 엇갈렸던 넷플릭스의 마블 '디펜더스' 시리즈(루크 케이지, 제시카 존스, 아이언 피스트, 그리고 데어데블) 중에서도 단연 명작이라고 꼽혔던 <데어데블>이었는데, 이 드라마에서 빈센트 도노프리오가 연기한 킹핀은 자본가이자 수완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그야말로 헬스 키친의 수장다운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데어데블>은 맷 머독의 히어로 서사와 킹핀의 빌런 서사가 공존하고 있는 시리즈다. 윌슨 피스크라는 평범한 소년이 어떻게 헬스 키친을 주무르는 뒷세계의 주인이 되었는가를 그리는 한편, FBI에 의해 교도소에 수감된 상황에서도 세력을 키워 교도소의 '왕'이 되는 모습도 보여준다. 말하자면 빌런으로서의 킹핀의 악독한 재능(이를테면 정치력이라든지)의 기원과 현재에 대해 그려낸 셈이다.
MCU의 '데어데블' 맷 머독은 어린 시절 화학약품을 얼굴에 맞는 바람에 시력을 잃었지만, 시각 외의 다른 감각(특히, 청력)이 극도로 예민해지게 된 인물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능력을 기반으로 같은 맹인 스승에게 훈련받은 결과 체술과 격투술의 달인이 되었으며, 부모님을 잃는 등 숱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까지 땄다.
이후 넷플릭스의 마블 디펜더스 시리즈의 추가 시즌이 취소되면서 데어데블과 킹킨의 서사는 갈 길을 잃은 듯 했으나 디즈니 플러스에서 이 시리즈를 이어받는 것으로 타결되었다. 다시 못 볼 것 같았던 두 얼굴을 오리지널 시리즈인 <호크아이> 그리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쉬헐크>에서 볼 수 있었고 이어 <데어데블: 본 어게인>이라는 새로운 시리즈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
먼저 ‘데어데블’ 맷 머독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정체가 밝혀진 채 미스테리오를 죽인 범죄자라는 누명을 쓴 이후 곤란에 처한 피터 파커와 메이 숙모를 돕는 변호사로 등장했다. 창문으로 날아들어오는 벽돌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내면서 자신을 '정말 유능한' 변호사로 소개하는 맷 머독의 모습은 넷플릭스 시리즈가 이어지기를 원했던 팬들에게는 꽤 반가운 장면이었다.
킹핀 역시 <호크아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윌슨 피스크라는 이름이 마블 코믹스의 오랜 팬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고, 워낙 체구나 외모가 독특해 알아보기 쉽기 때문에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시리즈의 크로스오버가 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맷 머독이 다소 카메오 같은 느낌으로 등장했던 것에 반해 킹핀은 <호크아이>에서 흑막으로 등장, 작중 '에코' 마야 로페즈와 애증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등 꽤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아무래도 원작에서부터 킹핀과 관련이 많은 캐릭터인 데다가 <호크아이>의 무대가 뉴욕이었던 만큼 등장할 여지는 충분했던 듯하다.
이렇게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시리즈는 물론이고, 스크린 개봉작에까지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 두 캐릭터는 다시금 주역으로 등장할 준비를 마친 것 같아 보인다. 이들은 2024년 봄에 18부작 분량의 <데어데블: 본 어게인>으로 돌아올 예정인데, 지난 여름 샌디에이고 코믹콘에서 발표된 이래 킹핀을 비롯한 데어데블과 관련이 깊은 캐릭터인 엘렉트라와 퍼니셔, 불스아이 등 이제까지 실사화되지 못했던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한다는 루머가 나오고 있다.
더불어 킹핀이 이 시리즈에서 뉴욕 시장에 출마한다는 소문도 있는데, 실제로 「데어데블」 이슈에서 킹핀이 뉴욕 시장에 당선되고 데어데블을 이용할 목적으로 그에게 부시장 자리를 제의하고 맷 머독이 이를 수락한 적이 있어서 이 이야기를 토대로 시놉시스가 마련되지 않을까 기대가 있다. 또한 DC의 HBO 시리즈들이 그랬던 것처럼 5페이즈에서 새롭게 등장하거나 주역으로 떠오른 많은 캐릭터들, 그리고 디펜더스 캐릭터들과 함께 얽히고설키는 장면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디즈니 플러스라는 자체 스트리밍 플랫폼의 출범은 여러 가지로, 이런 캐릭터들에게는 꽤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싶다. 이미 MCU는 인피니티 사가를 거치며 무대를 우주로 확장했고 페이즈 5에 이르러서는 멀티버스로 확장한 상태다. 하지만 디펜더스와 킹핀의 경우 뉴욕 시, 그것도 헬스 키친을 위주로 활동하기에 다소 지엽적인 면모가 있어서 단순히 비교했을 때에는 소위 파워 밸런스가 잘 맞지 않는다.
코믹스 원작에서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좀 더 비현실적이고 다채로운 스토리를 펼쳐갈 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현실성이 더 가미된 실사화 프로젝트에서는 기존의 어벤져스를 위시한 우주 단위의 초능력자, 데미갓, 하이 테크놀로지의 향연 속에 있는 히어로들에 비해 뉴욕 자경단 히어로들은 아무래도 눈에 덜 띄기 때문이다. 물론 화려한 CG나 마법 같은 비주얼 효과들이 늘 정답인 건 아니고 데어데블이나 제시카 존스만의 매력이 분명히 존재하는 건 분명하지만... 이들이 타노스나 그보다 거대한 존재를 상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킹핀 같은 빌런이 있기에 초능력이 없거나 신급 능력을 갖추지 않은 히어로들도 자신의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누가 더 강력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야 히어로 팬덤에서 늘 핫한 주제이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중요한 건 캐릭터 간의 합 즉 케미스트리다. 제시카 존스와 킬그레이브 그리고 데어데블과 킹핀이 그랬던 것처럼 무대가 좁고 기술이 다소 화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소위 쫀쫀한 매력이 있는 서사만 잘 받쳐 준다면 오히려 좀 더 현실적이고 강력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을 내린 MCU의 페이즈 4(<완다비전>~<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솔직히 말해 그리 호평을 받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멀티버스라는 개념을 정착시켰고, 이제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나갈 수 있으며, 팬들이 기다리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조금씩 메인 무대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채널은 넓어졌고 스크린은 여전히 열려 있으니, 다시금 펼쳐질 새로운 무대를 다시 한번 기대해 본다.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