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믹에 접어들며 일상 회복과 함께 더 정신 없이 흘러갔을 2022년. 하지만 '회복'을 향한 막연한 갈망에 앞서 변화로 받아 들여야 할 풍경도 적지 않다. 코로나19 이전의 요란법석 대규모 송년회가 더 이상 달갑지 않다면, 작은 상영회를 열어 보는 건 어떨까. 소수의 지인들, 가족들, 혹은 혼자서도 좋다. 테마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분위기가 과도하게(?) 잔잔해지는것을 피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독특한 세계관이 보장되고 몰입도가 높은 호러 장르를 추천한다. 영화와 함께 잠시 다른 세계에 다녀오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1. 오싹한데 귀여운, <아담스 패밀리> 시리즈
2005년 MBC에서 방영된 <안녕, 프란체스카>는 방영 후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한국 장르형 시트콤의 원조로 회자된다. 뱀파이어 가족이 평범한 인간인 것처럼 위장해 서울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장녀 프란체스카(심혜진)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블랙 톤의 고딕 스타일 의상을 입고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이 익숙한 비주얼은 <아담스 패밀리> 시리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최근 넷플릭스 <웬즈데이> 공개 이후 다시 화제가 된 <아담스 패밀리> 시리즈는 사실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30년대 신문 만화에서 출발, 1964년 ABC 드라마로 제작돼 약 3년 동안 방영됐고 1990년대 세 차례에 걸쳐 영화화됐다. 여기에 3D 애니메이션, 시트콤으로도 만들어질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다. 내러티브 자체의 힘 보다는 아담스 가족 각자가 가진 특징적 설정들이 이 시리즈에 세월을 관통하는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는 역시 장녀인 웬즈데이 아담스. 길게 땋아 내린 양갈래 머리와 구김 없는 흰 칼라에 매치한 무채색의 외투, 그리고 표정 만큼 냉소적인 말투가 웬즈데이를 대변하는 요소들이다. <아담스 패밀리> 실사판 탄생 이후 거의 60년 만에 나온 2022년 넷플릭스 시리즈는 웬즈데이가 주인공이다. 재밌는 건 30년 전 처음 <아담스 패밀리> 영화판 감독을 거절했던 팀 버튼이 이번 <웬즈데이>의 제작과 일부 연출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가위손>, <스위니 토드>, <비틀쥬스> 등에서 보여 줬던 감독의 음울하면서도 동화적인 색채의 작품가 <웬즈데이>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또 하나, 영화판에서 웬즈데이 역을 맡았던 크리스티나 리치가 넷플릭스 시리즈에서 오필리아 홀 기숙사의 사감으로 등장하니 주목할 것. 그리고 돌아온 아담스 패밀리의 씽(Thing)이 웬즈데이와 겪을 우여곡절에도.
#2. 사람 환장하게 하는 죽음의 공포,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
대부분의 호러물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살인마나 좀비, 귀신, 괴수 등 인간이 아닌 것을 등장시켜 공포심을 자극한다. 현실에서 만날 확률이 극히 낮은 존재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거기서 오는 불안이 두려움을 낳는 것이다. 이런 경우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을 제거할 가능성도 함께 주어지곤 한다. 등장인물 몇 명의 희생을 통해 그 방법을 알게 된 주인공이 위협적 존재를 처치하면 공포는 사라진다. 그리고 이는 공포 영화의 가장 기본적 문법이다.
그런데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는 좀 다르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며 조성되는 점층적 불안이 공포를 유발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에 등장인물들을 위협하는 모종의 '존재'는 없다. 다만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허무하게 생명을 잃을 수 있는지를 다소 오락적으로 비춘다. 이 시리즈의 세계관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을 덮치는데, 거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없다. 이를테면 탑승 직전 불길한 예감에 내린 비행기가 폭발해 목숨을 건진 인물이 화장실에 있던 빨랫줄에 목이 감겨 사망하는 식이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의 기상천외한 죽음에는 규칙이 있는데, 예지몽 등의 형식으로 이미 정해진 리스트에 오른 사람은 절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곱게(?) 죽고 싶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해도 운명이 허락하지 않는다. 금기를 행하거나 행운의 상징이 갑자기 사라지면 사고가 발생한다. 극 중에서 어떤 인물의 사망 직전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물건들이 죽음을 암시한다. 다섯 편의 영화를 거치면서 이 규칙들은 더 복잡해지거나 이전 작품과의 연결성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러닝타임 동안 만은 죽음만이 지배하는 세계의 이스터 에그를 찾아보는 것도 이 시리즈를 온전히 즐기는 방법일 듯하다.
#3. 날카롭게 뇌리를 파고 드는 정신 공격,
조던 필 3부작 <겟 아웃>·<어스>·<놉>
조던 필이 감독으로서 내놓은 세 번째 장편 영화 <놉>은 2022년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다. 영화는 인간이 아닌 세 존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1990년대 말 인기를 끌었던 코미디 쇼 <고디가 왔다>의 침팬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할 목적으로 사육되는 말, 그리고 '진 재킷'이라 이름 붙인 거대한 외계 생명체 등이다. 이들을 그저 흥미 거리로 소비하기 위해 키웠던 인간들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벌을 받는다.
'조던 필 3부작'이라 불리는 <겟 아웃>·<어스>·<놉>은 전부 호러물이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인간들의 오만함과 그로부터 말미암은 폭력의 순간을 보여 준다. 조던 필 영화의 세계관에서 공포를 만드는 건 '소외'고, 이를 가시화하는 건 '보다'라는 행위다. 보이지 않거나 누구도 보려 하지 않는 존재가 시각을 독점한 이들로부터 소외와 차별을 당하는 모습이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고등한 공포이며, 죽어야 하는 운명이 아닌 살아내야 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가끔은 영화 속 터지는 피와 살점보다 칠판 긁는 소리가 더 끔찍할 때가 있는 법. '조던 필 3부작'은 매우 이상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상을 배경으로 하지만, 관객이 거기에 빠져 든 사이 뾰족하게 갈아 놓은 현실의 문제를 뇌리에 줄곧 찔러 댄다. 공포 영화 보다가 토론으로 날밤을 새우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겟 아웃>·<어스>·<놉> 연속 상영을 추천한다. 서스펜스를 한껏 돋우는 가느다란 선율의 현악 역시 이 영화들의 백미이니 귀를 기울여 볼 것.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