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에서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청결의 욕구를 상실했다고 고백한다. 그가 씻지 않고 멍하니 세면장을 배회하자,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다가와서 타이른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아우슈비츠에서 절멸을 곱씹으며 혼란스러워하는 레비와 어떻게든 야만에 휩쓸리지 않으려 안 간힘쓰는 슈타인라우프. <페르시아어 수업>의 질(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은 그들 사이에 위치한다. 레비와 마찬가지로 질에게 생존은 가능성을 타진할 만한 문제도, 의지로 달성해야 하는 과업도 아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데 쓸 힘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은 단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하고 저항하는 용기가 아니라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랫동안 심장을 움켜쥔 공포가 끝내 질을 역사의 증인석에 앉힌다. 불안에 떨며 내놓은 발명품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레비가 저주한 현실과 슈타인라우프가 갈망한 미래를 제 방식으로 동시에 끌어안는다.

스위스로 피신하다가 나치 대원에게 붙잡혀 프랑스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 벨기에 출신 유대인. 질은 인류의 가장 치욕적인 비극을 그려내기에는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한 주인공이다. 얼굴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과 왜소한 체격은 유약함을 강조한다. 저래서 어떻게 그 악랄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버틸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배고픔에 시달리는 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유일한 먹거리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페르시아 책과 선뜻 교환하는 상냥한 마음씨까지 갖췄다. 한데 어리석은 그 결정이 질의 앞날을 바꿔 놓는다. 총살 위기에 닥치자 질은 책을 증거로 내밀며 자신이 페르시아인이라고 주장한다. 수용소를 지휘하는 독일군 대위 코흐(라르스 아이딩어)는 마침 페르시아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찾고 있다. 그는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동생이 정착한 테헤란으로 이주해 식당을 차릴 계획이다. 질은 코흐를 위해, 정확히 말하면 제 목숨을 쥐고 흔드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의탁하기 위해 언어를 발명한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오직 질과 코흐만 아는, 가짜 페르이사어는 그렇게 탄생한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함”이라고 전제하지만 신빙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실존하는 인물 또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고 할 수 없고, 각색한 원작 역시 볼프강 콜하세의 단편소설이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홀로코스트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우화다. 기존에 제작된 작품과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사울의 아들>(라즐로 네메스, 2016)처럼 전쟁의 참상을 엄밀히 묘사하려 애쓰지 않는다. <쉰들러 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1994)가 규정하고 성취한 휴머니즘에 열중하지도 않는다. 질은 지나치게 ‘운 좋은’ 허구적 인물이다. 돌팔매를 던져 골리앗에 맞서 싸운 다윗보다는 탁월한 이야기 솜씨로 폭군을 사로잡은 셰에라자드에 가깝다. 그는 레자라는 가짜 이름과 간소한 법칙을 통해 생성한 2,840개의 거짓 단어를 이용하여 생사의 위기를 모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라고 하기엔 다소 터무니없는 발상에서 출발한 <페르시아어 수업>. 그러나 전쟁이 야기한 고난을 재현하며 스케일을 키우는 대신 언어의 효용을 탐구하는 영화는 의외의 재미를 선사하며 보는 이를 설득한다.

질에게 언어는 생존 도구다. 그는 간신히 동아줄을 부여잡은 사람처럼 되뇐다. “단어를 더 만들어야 해.” 문제는 암기다. 되는대로 만들어낼 수야 있지만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와중에 그 모든 말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수용자 명부를 작성하는 일을 맡으면서 질은 다행히 힌트를 얻는다. 곁에 존재하는 사람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들 이름에 기대면 얼마든지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기억할 수 있다. 아브라모라는 이름에서 브라모를 가져와 희망이라는 뜻을 붙이고, 아비바에서 비바만 떼어내 광기라고 일컫는 식이다. 한편, 코흐에게 언어는 소통의 도구다. 식당 창업에 필요한 단어를 공부하던 그는 주제를 바꿔보자며 불쑥 묻는다. “페르시아어로 사랑은 뭐라고 하나?” 언어 교습을 지속함에 따라 코흐와 질의 관계는 복잡하게 변화한다. 그들은 애초 살인자 대 구금자로서 대립하지만 학생과 교사라는 위치로 인해 지배적 힘은 종종 균형을 잃는다. 심지어 둘만의 언어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친밀감이 피어나기도 한다. 코흐는 유년 시절에 맞닥뜨린 가난과 불행, 현재를 가로막는 후회와 미래를 향한 기대까지 질에게 털어놓는다.

가해자를 미화한다는 오해에서 벗어나려는 듯, <페르시아어 수업>은 꽤 온건한 필치로 수용소라는 공간을 재현하면서도 코흐를 비롯한 나치 부역자에게 마지막까지 심판의 화살을 겨눈다. 영화는 그들을 군대나 공직자 같은 익명의 무리 혹은 살인 기계라는 모호한 수식으로 남겨두지 않고 표정과 목소리를 지닌 개인으로 표상하고자 한다. 나치 대원은 비단 명령뿐 아니라 통조림 몇 캔, 출세욕, 남녀 간의 시기와 질투, 근거 없는 소문 등을 이유로 유대인 수용자를 때리고 죽인다. 영화는 그들이 얼마나 사소하고 편협한 마음으로 살해를 결심하는지, 어떻게 그토록 무감하게 수많은 생명을 짓밟는지 비춘다. 그 안에서 질에게 언어는 결국 기억의 도구가 된다. 질이 고안한 단어에는 기원이 있다. 3천여 개에 달하는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는 수용소를 거쳐 간 이들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희생자의 이름을 의미한다. 이제 생존자는 누군가의 목숨에 줄곧 의존했음을 깨닫고 빚을 갚고자 한다. 의무를 다하겠다는 태도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질은 전보다 초췌한 얼굴이지만 더는 나약하지 않다.

<페르시아어 수업>은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작이자 우크라이나계 감독 바딤 피얼먼이 <바이 미>(2018) 이후 내놓은 신작이다. 시종일관 웅크린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카메라가 떠안은 혼란과 광기에 무너지지 않는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의 연기가 돋보인다. <120BPM>(로빈 캉필로, 2018)에서 에이즈 확산에 방관하는 정부를 겨냥하며 몸을 활짝 펼쳤던 ‘액트 업 파리’의 열정 넘치는 활동가는 이번 작품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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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