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깨어남은 꿈으로부터 낙하산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중략)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수직 낙하 여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서곡」 중에서


대개 꿈은 현실로부터 하강, 그러니까 일상적 삶의 깊은 이면이나 심층의 작용이라 여겨져 왔다. ‘빙산의 일각’이라고도 하거니와, 수면 아래 더 깊고 넓게 잠재되어있는 의식 혹은 무의식 덩어리의 파편이라는 거다. 하지만 인용한 시는 정반대 발상에서 시작한다. “깨어남”이 “꿈으로부터 낙하산 강하”라는 것. 즉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수면으로부터 떠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은 수면으로 가라앉는 상태라는 거다. 그렇다고 깨어난 상태가 꿈보다 더 아래층에 놓이게 되는 거라는 일차적 치환은 삼가자. 꿈은 직선보다 유선에 가깝다. 꿈을 꿀 때 사람의 의식은 더 깊고 넓은 시공 속으로 “물수리”처럼 미끄러져 공기의 저항을 넘어선다. 공기란 물질들의 압력과 그로 인한 질서의 요체이자 기본이다. 꿈은 공기 너머의 세계다. 거기서는 과연 어떻게 숨 쉴 수 있을까.

꿈은 봉인되거나 은폐된 삶의 기저 지대

꿈과 현실의 역학관계는 단순한 수직이나 수평으로 도식화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꿈은 양립 불가능, 공존 불가능한 것들을 동시에 혼합하고 수렴하고 병치하는 게 가능하다. 아니, ‘가능’ 혹은 ‘불가능’이라는 한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자가 스스로부터 이탈하여 꿈속에 등장하는 자와 같은 공간에 타인처럼 존재할 수도 있고, 한 공간 안에 또다른 공간이 러시안 인형처럼 혼재되어 서로를 밀치거나 증발시키기도 한다.

꿈은 언어로 설명 불가능이다. 모든 게 가능하기에 그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걸 꿈꾸는 자는 그 불가능에 도취한 자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불가능은 그 자체로 가능의 전제조건이다. 이 반복은 분명 모순이다. 모순을 넘어 언어도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은 늘 그런 언어도단 혹은 현실 도단으로 존재한다. 사람이 잠들어있는 순간은 죽은 자의 영면이 아니다. 꿈도 분명, 삶의 한 작용이자 일부이고, 그리하여 때론 전체다. 꿈은 현실의 이면이 아니라 현실의 어떤 규정 체계에 의해 봉인되거나 은폐된 삶의 기저 지대라 할 수 있다.

로메인 바세트 감독의 <홀스헤드>(2015)를 본 사람들은 대개 난해하고 지루한 영화라 입 모은 것으로 안다. 일관된 스토리라인이나 캐릭터의 일상적인 면모 등은 뒤로 밀려난 채 말 머리를 한 몽마(夢魔)와 갖가지 자질구레한 상징물들을 요란스럽게 버무려놓은 연출 탓일 거다. 영상 자체는 현란하고 신비스럽되 서사의 핵심 줄기는 부차적이며, 뜬금없이 반복되는 장면과 이미지들은 많은 부분을 관객의 몫으로 떠넘겨 마치 “이것들을 보면서 당신은 뭘 상상하시겠습니까?” 라고 묻는 듯하다. 말 그대로 모든 장면이 꿈결처럼 뒤섞여 혼미하게 흘러가는 영화다. 외견 상 호러나 고어의 장치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정형화된 장르물로 여기고 봤다간 실망만 클 거다. 끝까지 보고 나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전하려 하는지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엉터리 괴작에 불과한가. 내가 판단하지는 않겠다.

어릴 때부터 말 머리 몽마에 시달려온 제시카(릴리 플뢰르 퐝토)는 그 원인을 알기 위해 자각몽을 공부한다. 그러다가 외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고향에 내려간다.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와 늙은 집사가 살고 있는 곳이다. 제시카는 외할머니가 죽은 옆 방에서 지내게 된다. 말 머리 몽마는 매일 밤 나타나고 제시카는 자각몽을 터득하여 몽마의 실체를 밝히려 자진해서 꿈속으로 출격(?)한다. 어머니는 그런 제시카의 행동이 못마땅하다. 억지로 약을 먹여 제시카의 꿈을 지우려고 할 정도다. 고지식하고 쌀쌀맞은 어머니(카트리오나 맥콜)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기 전, 광기에 휘말렸던 걸 끝끝내 외면했다. 제시카의 외할머니는 2층 창가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 광기와 자살의 내막, 그리고 끊임없이 제시카를 괴롭히는 말 머리 몽마의 정체를 밝히려 하는 게 영화의 기본 줄거리다.

스토리 골격만 들어내면 영화의 내용은 이게 다다. 하지만 그것을 이끌고 가는 모든 장치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과거와 현재, 꿈과 생시, 제시카와 어머니, 제시카와 외할머니, 외할머니와 어머니 등이 겹겹으로 혼재되어 개인의 정체성이나 시공 곡률 따위 아랑곳 않는 듯하다. 두 세 겹의 뫼비우스라 할만한데, 견고했던 물질이 무슨 파쇄기 같은 데에 들어가 갈가리 분해되어버린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장면 하나하나만 살피면 잘 세팅된 특수효과와 정밀한 소도구들이 제각각 또렷하고 화려하다. 이리 뭉치든 저리 나누든 편집하기에 따라 여러 편의 영화가 다시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을 정도다. 뭐 이런 황홀한 누더기 영상이 다 있나, 싶다가도 문득 영화의 핵심을 짚어보면 이렇게밖에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였겠거니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의외로 명징한 자각이다.

호러도 고어도 기대하지 말라

앞서 꿈의 여러 불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던 바, 꿈을 일상 논리로 설명하는 것 역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크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다.”고 했지만, 실상 ‘무의식’이라는 단어 자체가 구조를 벗어난 범주, 이를테면 언술 가능한 언어 바깥을 두루뭉술하게 넘겨짚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 자체가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꿈을 무의식의 작용이라는 흔히 일컫는 것도 그런 단정에 의한 거다. 꿈은 인간의 의식 심연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방어기제, 혹은 대체활동 혹은 억압 분출이 모종의 육체적 현상으로 공감각화되어 드러나는 현상이다.

꿈은 어떠한 '그것'을 ‘그것 자체’로 드러내지 않는다. 꿈은 그 자체가 '그것 자체'가 된다. 그러면서 실체가 없다. 살갗에 난 멍이나 상처를 그 자체만으로 어떤 질병의 요인 또는 결과라 단정 지을 수 없듯, 꿈은 '꿈'이라 여겨지게 되는 것보다 훨씬 전면적이고 육체적인 형태, 심지어 ‘현실적’인 '그것 자체'보다 더 '그것 그대로'로 작용한다. 꿈이 사람의 행동이나 말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꿈을 꾼 당사자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꿈에 대해 얘기하는 많은 것들에 숱한 언어적 첨삭과 수사가 동원(인용한 라캉도 포함)되는 것도 그 까닭이다. 모두 거짓도 아니고 모두 진실도 아니다. 꿈은 그 너머다. 그러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분명한, 그러나 정확한 재연도 설명도 불가능한 현실 너머의 현실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홀스헤드>는 과감하고 솔직한 영화다. 이 영화는 현실에 떠오른 꿈의 표면이 아니라, 꿈의 한가운데에서 현실을 꿈처럼 되비춘다. 제시카와 어머니,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공통된 상처는 꿈속에서가 아니라면 확인할 수 없다. 거기엔 현실의 억압과 그로 인한 완강한 침묵의 걸쇠가 잠겨 있기 때문이다. 제시카를 꿈속으로 끌어들이는 말 머리 몽마는 죽음의 전령이자 갱생의 메신저이기도 하다. 제시카와 몽마 사이의 끈질긴 숨바꼭질과 싸움은 종교적 규율과 도덕적 체면, 그리고 개인의 본능 사이의 사투가 어떤 징그러운 괴물을 탄생시키게 되는지 보여주는 심리적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선 카를 융을 인용하며 말이 모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그 몽마는 넋 놓고 있는 관객을 어리둥절 누군가의 꿈속으로 데리고 가 놓고선 빨간 커튼(몽마는 잠든 제시카의 방 빨간 커튼 뒤에서 나타나고 숨는다) 뒤로 숨어버리는 대사 없는 21세기형 변사 같기도 하다. 영화란 게 어차피 시작부터 꿈의 재현이지 않았던가. 꿈은 얘기되어질 수 없다. 다만,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라고 이 영화는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하다면 이 영화는 영화의 존재 방식을 되묻고 반증하는 영화일 수도 있다.

반복건대, 현실에서 말해지지 않는, 혹은 말할 수 없는 3대에 걸친 여인의 공통환부는 꿈속에서가 아니면 확인도 증명도 불가능하다. 100년 가까이 혈육이라는 더께로 응혈진 상처와 오해를 현실의 언어로 타협하려는 건 기만이 될 공산이 크다. 사람은, 더욱이 성년이 지나고 노년이 된 사람은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다고 믿고, 스스로의 정체성이 확고하다 여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릴 적의 원형적 상처나 억압 등은 이미 다 지나쳐 온 과거의 터널이 아니다.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나 자신은 현실이라는 위압적인 구조와 형식이 가공해 놓은 자신의 엉터리 이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제시카와 몽마 사이의 끈질긴 숨바꼭질과 싸움은 종교적 규율과 도덕적 체면, 그리고 개인의 본능 사이의 사투가 어떤 징그러운 괴물을 탄생시키게 되는지 보여주는 심리적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나 자신은 가공된 나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어머니는 제시카의 집요한 물음에도 외할머니와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 수치스러워서일 수도 상처가 도질까 봐 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말로 설명 못할 그것의 전말을 제시카는 스스로 몽마가 되어 꿈속에서 꿈 바깥으로 꿰어 낸다. 그러고도 영화는 그 어떤 결론도 화해도 해석의 기미도 남기지 않은 채 별안간 암전한다. 더 분명해지는 건 현실이라는 붉은 커튼 뒤에 여전히 숨어있는 몽마의 그림자다. 커다란 창으로 변한 비밀의 열쇠를 스스로 찾아내어 자기 자신의 껍질과 베일을 벗겨내지 않는 한, 오늘 밤도 누군가는 자신만의 몽마에 시달릴 것이다, 라는 암시가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인지 모른다.

모든 사람의 삶은 상처와 억압, 그로 인한 욕망의 비틀린 전도와 상실의 잔여에 불과할 수 있다. 그걸 숨기거나 감추거나 다른 걸 갖다대는 과정이 삶의 실질이라고 해도 아주 틀리진 않을 거다. 숨기고 가릴수록 내상은 곪고 엉뚱하게 터져 영혼은 피투성이가 된다. 반복되는 악몽에서 깨려면 숨겨진 비막(飛膜)을 펼쳐 스스로 꿈의 사냥꾼이 되어 비밀의 틈새를 거듭 들여다 보는 수밖에 없다. 반복은 결국 차이를 낳고 그 차이의 자각이 곧 모두 똑같아 보이는 현실의 질곡 속에서 유일무이한 자신의 꿈이 된다. 꿈은 타인이라는 벽 안에 숨어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비밀 창고이자 그 열쇠이다. 삶의 봉인은 그제서야 살짝 문틈을 보인다.

이 영화의 주요한 단서가 '자각몽'이라는 것 역시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영화는 물론, 모든 예술이 그런 식으로 시공 초월하여 존재 명분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악몽도 흉몽도, 대책없는 희망의 미망도 결국 자신의 삶을 여는 열쇠이자 그것을 찔러죽이는 창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이 영화가 몰래 전하고 있다 하더라도 역시 엄마(?)한테는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