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팬메이드 포스터

4년 전 겨울, 그 해엔 올해만큼 춥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꽤나 화려한 영상미로 무장한 애니메이션 한 편이 개봉했다. 빌보드 Hot100 차트에서 1위를 한 OST, 2D와 3D를 넘나드는 이색적인 영상미에 원작과 비슷한 듯 다른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이야기였다. 바로 마일즈 모랄레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다.

아카데미상을 수상할 정도로 평단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후 3D 애니메이션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새로운 영상미를 선보였지만 흥행 성적은 애매했던 비운의 작품이기도 한데. 첫편의 호평에 힘입어 비교적 빠르게 확정된 2편이 내년 6월 개봉을 앞두고 지난 13일 공식 예고편을 공개했다. 이번에는 과연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솔직히 말해 큰 기대를 하고 보러 갔던 건 아니었다. 제작사인 소니 픽쳐스 애니메이션 업력은 꽤 오래된 편이지만 <몬스터 호텔> 이후로는 딱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었고 주인공이 피터 파커가 아니라 마일즈 모랄레스라는 점 역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4D 상영관의 의자에 앉자마자 생각이 많이 달라지긴 했다. 뭐랄까, 재미나 스토리를 떠나서 그냥 이런 독특한 영상을 스크린으로 봐둘 수 있었다는 것이 꽤 괜찮은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형광 핑크와 레드가 눈앞에 선연한 기분이기는 했으나 오랜만에 눈과 귀에 (4D여서) 전신이 즐거웠던 걸로 기억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흥행은 별로 좋지 않았다. 관객의 기대감이 곧 예매율로 이어지기 때문일까. 여러 가지 문제는 있었지만 국내에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요 고객층을 위한 더빙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좀 컸다. 그리고 MCU에 스파이더맨이 재등장한 이래 다시금 대중성과 인기를 꽉 잡은 히어로로 우뚝 올라선(물론, 전 세계 시장 관점에서는 스파이더맨이 인기 캐릭터가 아니었던 적은 아마 단 한순간도 없겠지만) 피터 파커가 아닌 마일즈 모랄레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한몫하긴 했을 것이다.

91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 수상작

하지만 장점이 없는 애니메이션은 아니었고, 실제로 비평가들의 호평은 물론이고 유수의 시상식에서 그 해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했으며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흥행 성적은 글로벌 총 수익을 따진다 하더라도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긴 수준이었으니,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으로서는 희비교차가 따로 없었다. 매번 혹평 받기 일쑤였던 작품성에서는 극찬을 받았는데 흥행은 실패하지는 않은 수준이라는 게... 뭐, 어쨌든 이래저래 이후 애니메이션 시장에도 큰 영향을 준 건 사실이니 역사에 족적을 남긴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영상미였다. 히어로 코믹스 이슈 특유의 만화적인 표현을 기반으로 한 평면적인 2D 아트워크가 3D 비주얼 그래픽과 만나 상당히 독특한 결과물이 나온 것인데, 3D 애니메이션 영화라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동글동글한 캐릭터들이 '뭔가 다른' 비주얼 속에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은 이슈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온 느낌을 주는 '스타일라이즈드 퀀티제이션', 현란하기까지 한 조명 효과를 내는 '스크린 톤' 기술 2종에 특허를 신청하기까지 했을 정도.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영상미는 기존 애니메이션과 확연히 달랐다.

여기에 소니 픽쳐스가 오랫동안 보유해 왔고,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해 왔던 바로 그 '스파이더맨' IP라는 강점이 있었다. '스파이더버스', 즉 다차원 멀티버스를 기반으로 여러 차원 속에 공존하는 갖가지 스파이더맨 캐릭터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원작 코믹스의 팬이라면 꽤나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익숙한 듯 새로운 오마주와 이스터에그도 있어 장점은 꽤 많았다.

어쨌거나 손익분기점을 넘겼으니 흥행에 실패했다고는 할 수 없었고, 평단의 평가는 지금까지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받아보지 못한 수준이었으니 2편이 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주었으니 이제 흥행 성공을 위한 행보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리하여 주인공 마일즈 모랄레스는 다시금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게 됐다.


2020년 게임 <마블스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도 마일즈 모랄레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전편에 이어 주인공으로 낙점된 마일즈 모랄레스는 얼티밋 유니버스의 피터 파커가 사망한 이후 스파이더맨의 자리를 이어받은 10대 소년이다. 코믹스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2011년으로, 얼티밋 유니버스를 기점으로 등장했으며 시크릿 워즈 이후 메인 유니버스에 합류해 다양한 히어로들과 함께하며 어벤져스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인기 캐릭터로 자리 잡아 2세대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자리가 확고해지자 소니 픽처스는 마일즈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PS4 게임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던 <마블스 스파이더맨>에서 피터 파커를 돕는 소년으로 등장했고, 이후 속편의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마일즈 모랄레스가 주역으로 등장하고, 이 세계의 피터 파커는 이미 죽었으며 그나마 등장하는 피터 파커(E-616의 피터 B.파커)는 어쩐지 나사가 빠진 채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다. 불행의 연속이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의 트레이드마크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다른 스파이더맨 콘텐츠와는 달리 마일즈가 주인공이고, 피터 파커는 그의 조력자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스파이더버스>

첫 속편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스파이더버스>는 전편에서 등장해 마일즈와 함께 싸웠던 '스파이더 그웬'이 마일즈와 좀 더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면서 메인 빌런인 스팟에 맞서 함께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마일즈는 좀 더 성장했고,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이번에는 더 많은 세계의 스파이더맨들이 정말 '와르르' 등장 예정이다. 본격적으로 스파이더버스라는 스파이더맨 전용 멀티버스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처럼 보이며, 차원을 이동하며 다양한 스파이더맨들과 엮이는 모습을 보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히어로 무비나 콘텐츠에서 쓸데없이 캐릭터가 많아지면 집중을 못 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전편에도 스파이더버스 속 다양한 스파이더맨들이 등장했지만 놀랍게도 마일즈 모랄레스라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서사가 크게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캐릭터가 다수 등장한다고 해서 걱정할 일은 아니다. (물론 이번에도 잘 해낸다는 보장은 없지만....)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아트북 표지

소니 픽처스에서 제작한 소위 오리지널 트릴로지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기억한다면 MCU의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상당히 다른 캐릭터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만큼 시간적 간극이 길었고, 마블 코믹스 영상화에 대성공한 MCU의 파급력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관객의 상당수가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을 더 익숙하게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영 반응이 좋지 않았던 페이즈 4의 작품 가운데 유독 인기를 끌었던(팬들의 염원 성취였으니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보면, 역시 스파이더맨은 스파이더맨이다 싶다. 팬들이 오랫동안 원했던 바로 그 장면이 등장한 것도 큰 요인이었겠지만, 어쨌거나 어딘가 좀 부족하고, 어설프고, 모자란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강하고 선한 히어로인, 그래서 더 마음 아파하는 인간적인 '스파이더맨'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 어딘가에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처음 등장한 마일즈 모랄레스에게는 피터 파커만한 인지도는 아직 없지만, 무엇보다도 그 인간적인 히어로라는 매력 포인트만큼은 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스파이더버스>

아무래도 현재로서는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가 더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소니 픽처스와 마블 스튜디오는 지지부진했던 판권 협의를 팬들의 요구에 맞추는 방향으로 결정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스파이더맨 IP가 인기를 계속 유지해야만 소니 픽처스는 계속해서 스파이더맨 IP를 활용한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콘텐츠에는 물론, 마일즈 모랄레스를 필두로 한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도 포함되어 있다.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의 이야기를 쭉 보고 있자면, 언젠가는 소니 픽처스가 마일즈 모랄레스를 주인공으로 한 실사영화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참 애매한 영화이긴 했으나 <베놈>과 <모비우스>를 필두로, 다시 시니스터 식스 실사화를 계획하고 있는 듯한 것처럼. 물론 아직은 추측에 지나지 않으니, 6월 개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두 번째 애니메이션이 첫 편의 화려한 영상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돌아와 주기를 먼저 기원해 본다. 그리고 이번에는…. 멋지게 흥행에도 성공해 주기를.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