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셋이 바다에서 표류 중에 소원을 들어준다는 마법 물고기를 잡았다. 한 친구는 집에 가서 아내와 있고 싶다고, 또 한 친구는 자식들과 뛰어놀고 싶다고 말했다. 둘은 배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남은 한 명이 사라진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그들이 여기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다. 이 짧은 우화가 주는 교훈은? 소원과 관련된 옛이야기에는 꼭 함정이 있다는 것이다. 소원을 빈 사람은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어렵다. 소원은 반드시 대가를 동반한다.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는 눈앞에 정령 지니(이드리스 엘바)가 나타나자 그 사실을 떠올리고 입을 다문다. 지니는 얼른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자유를 얻고 싶다. 그래야 작은 병에 갇혀 보낸 3000년간의 지난한 사연이 비로소 끝장을 볼 테니까. 신중한 알리테아는 결말을 향한 지니의 열망을 부드럽게 좌절시킨다. 그러다가도 지니가 가여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싶다는 가벼운 소망을 말해보지만 소용없다. 이때 소원이란 마음속에서 강하게 샘솟는 갈망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우리니까 함정을 피할 수 있어요.” 지니의 설득은 호기롭긴 하지만 비극적 결말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주인공의 대사처럼 위태롭게 들리기도 한다. 졸지에 운명의 공동 저자가 된 서사학자와 정령은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3000년의 기다림>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조지 밀러가 7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오래전 A.S.바이어트의 단편 소설 「나이팅게일 눈 속의 정령」을 읽고 깊이 매혹된 감독은 딸 어거스타 고어와 함께 각색한 시나리오로 이야기에 관한 매혹적 우화를 완성했다. <3000년의 기다림>은 엘리테아가 강연 차 방문한 이스탄불의 호텔 방에서 내내 진행된다. 그런 점에서 아주 작은 이야기다. 한편, 영화는 알리테아에게 지난 3000년간 겪은 일을 들려주는 지니의 목소리를 따라 과거로 여행한다. 그런 점에서 아주 큰 이야기다. 지니가 처음 황동 병에 갇힌 건 성경에 기록된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시대. 시바를 사랑했던 지니는 갈망을 숨기지 못한 탓에 솔로몬의 저주를 받아 바다 깊숙이 처박히고 만다. 이후 그에겐 몇 차례 기회가 주어졌다. 페르시아 왕국의 여자 노예에게 발견되거나, 근대 사회에 이르는 길목에서 천재 소녀 제피르(불쿠 골게다르)를 만나며 희망의 빛을 엿봤던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자유는 얻지 못했다. 결정적 순간마다 일은 어그러졌고 그는 번번이 병에 다시 갇혔다. 어쩌면 소원 이야기에 해피엔딩은 없다는 유구한 교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당신의 손에 안기게 된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니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엘리테아에게 별안간 소원이 생긴다.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날 사랑해줬으면 해요.”

여성과의 대화를 즐기는 탓에 여전히 수감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자조하지만, 그런 성격이야말로 지니의 고유한 매력이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인간을 관찰하는 이 호기심 많은 정령은 아마 그 넘치는 애정이 아니었다면 진작 자유를 얻었을 인물. 위험한 소원을 빌었던 노예 소녀를 진심으로 걱정해 그녀의 운명에 개입하려 했던 건 물론이고, 제피르를 너무나 사랑해서 모든 걸 포기하려고까지 했다니 참으로 정 많은 정령이다. 알리테아는 여러모로 지니와는 다른 인물이다. 자기소개에 따르면 그녀는 “적당히 행복하고 홀로인 여성”으로 딱히 갈망하는 게 없다. 친구가 없던 어린 시절엔 ‘엔조’라는 상상 속 남자아이와 놀았을 만큼 고독한 삶을 살았다. 전남편은 알리테아를 타인의 감정을 읽을 능력이 없는 여자라고 평했는데, 그녀 역시 동의하는 바다. 다만 알리테아는 서사학자답게 이야기에서 감정을 찾는다. 지니의 이야기가 그녀 마음의 빗장을 연 이유가 여기에 있을까. 단정하긴 어렵지만 호텔 방에서 한나절 동안 벌어지는 대화는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을 준다. 배우들은 즐기는 티가 역력한 모습으로 새로운 버전의 천일야화를 만들어낸다. 맞장구와 끼어들기가 만들어내는 리드미컬한 대화의 묘미 역시 톡톡히 살아있다.

<해피 피트>(2006)의 얼음 대륙과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사막 위에서 디지털 합성과 컴퓨터 그래픽의 가능성을 한껏 펼쳐 보였던 감독답게, 조지 밀러는 <3000년의 기다림>을 신비한 볼거리가 가득한 입체 동화책 같은 영화로 만들었다. 솔로몬 왕이 시바 여왕에게 구애하며 연주하는 악기는 괴이한 만큼 환상적이고, 간혹 등장하는 불의 정령이나 악마 왕의 추종자는 도마뱀과 거미의 형상을 하고 있다. 게다가 지니는 전자기파로 이뤄진 유기체로 설정돼있어 몸에서 계속 증기와 미세 입자를 뿜어낸다. 제피르가 세계의 모든 지식에 통달해 스스로 답을 얻는 장면은 독특한 상상과 컴퓨터 그래픽의 표현력이 무척 아름답게 만난 예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국적 풍광들 역시 디지털 합성의 결과물인데 여기엔 코로나19가 영향을 미쳤다. 국경을 넘기 어려워진 시기에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완성하며 조지 밀러는 “오늘날 당신은 디지털 방식으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따지고 보면 이건 <3000년의 기다림>에 고스란히 적용되는 얘기다. 정령과 역사학자가 호텔 방에 앉아 3000년의 역사를 마음껏 유영하는 영화니 말이다.

종장에 이르러 <3000년의 기다림>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고 우릴 우리의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는” 사랑에 관해 말한다. 우리가 인생 이야기를 아무리 신중하게 써나가려 해도 사랑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판도를 바꿔 놓는다는 뜻일 테다. 아름다운 진술이지만 다소 빤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다. 알리테아는 영화를 여닫는 내레이터 역할을 하는 데다 ‘3000년의 기다림’이라는 책을 쓰기도 한다. 지니의 청자였던 그녀는 저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건 결국 이야기 쓰기에 관한 영화일까? ‘정령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는 아무래도 믿기 어려울 테니 동화라고 해두자던 알리테아의 말을 상기해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누구든 자기 삶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의 형태로 소화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라이프 오브 파이>(이안, 2012) 같은 영화는 이야기의 바로 그러한 측면을 건드린다.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의 주제를 그와 같은 이야기의 효용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알리테아는 살기 위해 이야기하는 인물은 아니니까. 영화에서 이야기의 끝은 계속해서 지연된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지니의 이야기는 무려 3000년이나 지속되지 않았던가. 이야기가 지연되면 삶은 연장된다. 지니는 “그녀가 죽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3000년의 기다림>은 기다림에 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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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