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EU(DC 확장 유니버스)는 확실히 위기였다. <아쿠아맨> 1편이 10억 달러 흥행에 성공하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가 했지만 이후 DC가 선택한 것은 거대한 세계관을 넓혀가는 작업이 아닌 영화 한 편의 개별적 완성도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섣부른 팀업 무비가 프랜차이즈의 성공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혔었기에 어쩌면 올바른 선택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이후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가 기존 DC 실사화 영화들과는 별개의 세계관을 내세우며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고, <저스티스 리그>의 벤 에플렉이 아닌 로버트 패틴슨을 기용한 <더 배트맨>이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옳은 선택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샤잠' 빌리 뱃슨의 숙적 블랙 아담의 솔로무비 <블랙 아담>은, 흥행 보증수표 배우 드웨인 존슨을 기용하고도 성공의 단맛을 맛보지 못했다.
요컨대 세계관과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 영화는 대체로 실패했고, 별개의 토대를 세운 영화는 대체로 성공했다. 지금까지 쌓아 온 저스티스 리그를 위시한 DCEU의 영화들은 그저 실패의 잔재일 뿐일까. 결과적으로는 왠지 단순히 영화를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연계의 문제가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만든다. 한편만 만들면 잘할 수 있었잖아! 싶기도 하고(처음부터 한편씩 만들었으면…).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11년간 그랬던 것처럼 DC도, 자체 유니버스를 토대로 한 영화들을 다수 등장시키며 팬들을 만족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곳곳에 숨겨둔 이스터에그부터 코믹스 팬을 반갑게 맞이할 캐릭터 사이의 연계점, 그리고 거대한 목표를 위해 함께 협력하는 히어로들…. 왜 매력적이지 않겠나. 각자의 원대함을 가진 영웅들이 한데 모이는데. 하지만 DCEU 기반의 영화들은 그렇지 못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데는 아마 누구도 이견이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 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람은 다름아닌 제임스 건이다.
위기를… 기회로?
제임스 건이 디즈니에서 경질된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DC 스튜디오에게 호재였던 모양이다. 트위터가 인생의 낭비라는 퍼거슨의 명언을 몸소 실천해 보인 제임스 건은 다수의 MCU 영화 제작에 참여했으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이하 <가오갤>) 시리즈를 성공 가도에 올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잘렸다. 뒷얘기를 파고들어 보면 제임스 건의 과거 언행(상당히 심각한 수준의)과 할리우드 영화업계에 갖고 있던 불만이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터져나온 것이었으나, 어쨌거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제임스 건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 디즈니의 결정에 일말의 불만 토로 없이 사과문을 올리고 이전 트위터 게시물을 전부 삭제했다. 하지만 크리스 프랫과 조 샐다나, 데이브 바티스타를 비롯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출연진 일동은 이 사건에 보이콧을 펼쳤으며 덕분에 <가오갤> 시리즈의 향방은 미궁으로 빠졌다.
바로 이 시점, 워너브러더스는 제임스 건에게 초대장을 내민다. 실사화 예정에 있는 DC의 작품들 중 하나를 골라 연출직을 제안한 것이었다. 이후 후일담에 따르면 그 선택지 중에는 <그린 랜턴>의 리부트도 있었다곤 하는데, 제임스 건이 택한 것은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리부트였다. 세계관은 유지하되 새롭게 영화를 제작하는 '리런치' 형태로 다시금 부활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대체로 호평을 받는 데 성공한다.
물론 2016년 당시 팬들이 기대했던 '조커'와 '할리퀸', 그리고 DC의 빌런들이 다수 등장하는 팀업으로서의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아니었지만 DC 영화가 이제까지 거쳐왔던 진지하고 웅장한 분위기와는 달리 가볍고 화려한, 그러면서도 쫄깃한(그가 늘 해왔듯이 B급의) 재미가 있는 영화였다. 액션이나 고어적 표현이 과하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전작 <수어사이드 스쿼드>와는 달리 리런치 버전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HBO MAX에서 역대 DC 콘텐츠 중 1위를 하는 등 괜찮은 성과를 낸다.
이후 디즈니는 제임스 건을 재기용했으나 제임스 건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를 끝으로 마블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 다음 그가 들고 온 소식은 다름 아닌 워너브러더스 산하 DC 스튜디오의 공동 대표 취임이었다. DCEU를 ‘DCU'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새롭게 시작할 키 카드가 된 셈이다. 돌이켜 보면 최대 경쟁사의 유력 인사였으므로 꽤나 이유 있는 헤드헌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굴러온 돌이었는데…. DC의 수장으로
지난 2022년 10월을 기하여 제임스 건과 함께 DC 스튜디오에 공동 대표로 취임한 인물은 <샤잠!>과 <아쿠아맨>의 제작자로 참여했던 피터 사프란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피터 사프란은 사업 및 제작 부문을 담당하고, 제임스 건은 창작 부문을 전담으로 맡는 분업 형태라고 한다. 말하자면 각자 잘하는 분야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아쿠아맨>은 아직 선보인 적이 없었던 심해 아틀란티스 왕국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옮겨온 최초의 히어로무비였으며 <샤잠!>은 코믹스 키드의 향수를 담은, 귀여운 분위기의 패밀리무비로 성공을 거두었으니(물론 한국에선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공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단독 각본을 담당하는 일이 거의 없는 할리우드에서 늘 제임스 건은 단독으로 각본 작업을 해왔고, B급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듣기는 하나 어쨌든 흥행에 실패한 적 없는 감독이다. 여기에 MCU 인피니티 사가의 후반 작업 기획에도 참여했으니 능력은 보증된 셈이다.
DC 스튜디오로서는 자사의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제작한 사람과, 흥행은 성공했음에도 망작으로 남아 역사의 뒤안길에 갇힐 뻔 했던 타이틀(<수어사이드 스쿼드>)을 다시 건져낸 사람 둘을 대표로 앉혀 놓은 셈이다. 억대의 제작비가 손쉽게 오가는 할리우드 영화 시장에서는 일견 당연한 일일 것이나, 왠지 이제는 더 이상 모험적인 선택을 할 수 없는 워너브러더스의 상황이 투영된 것만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제임스 건, DC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소싯적의 워너브러더스라면 제임스 건 같이 악동 같은 감독을 CEO 자리에 취임시켰을 거라고는 생각이 잘 안 된다. DCEU의 영화들이 내세웠던 장점은 웅장하고 장대한 스케일과 액션이었기 때문에. 물론 이런 장대함도 탄탄한 시나리오 위에서 꽃 필 수 있는 것이겠으나, 제임스 건이 이제까지 보여준 영화는 장대하기보다는 과감함에 가까웠으므로…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DCEU가 대격변을 맞이할 때가 온 것일까.
워너브러더스가 그렇게 생각했건 아니건 간에 대격변은 찾아왔다. 두 사람이 CEO에 공동 취임한 후 발표된 소식들 때문이었다. DCEU의 슈퍼맨으로 출연했으나 이후 이렇다 할 등장도 제작 소식도 없어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배우 헨리 카빌이 '슈퍼맨' 역할에서 완전 하차한다는 소식이 첫 번째였다. 헨리 카빌은 지난달인 12월에 본인의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통해 공식 하차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배우 본인이 이 역할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다가 꾸준히 슈퍼맨 역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왔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었다. 여기에 최근 개봉했으나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블랙 아담>의 드웨인 존슨까지 하차 소식을 알렸다. 한편으로 DC 실사화 이력을 끝내는 셈이라 배우 본인도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은데.
거기에다 <원더우먼> 시리즈를 맡아 온 감독 패티 젠킨스 역시 시리즈에서 빠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리즈의 첫 편 <원더우먼>은 걸출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 2편 <원더우먼 1984>는 그보다는 떨어지는 성적이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2편 개봉 직후 감독직 확정이 된 상황이었고 3편의 집필까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태였는데 갑작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패티 젠킨스의 3편 시나리오가 스튜디오에 제출되었으나 건과 사프란 모두 이를 동의하지 않았고 의견 충돌이 발생한 끝에 패티 젠킨스의 하차로 이어졌다고 한다.
명확한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을 노릇이지만, 헨리 카빌과 드웨인 존슨에 이어 패티 젠킨스까지 하차하는 상황 속에서 걱정 반 기대 반, 여기에 불안감까지 한 스푼 더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DCEU에서 ‘DCU’로, 멀티 콘텐츠 프랜차이즈로의 도약이 될 수 있을까
기존 DCEU가 갖고 있던 문제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지나치게 진지하고 어둡다는 평과 스토리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점, 캐릭터의 내면과 개인적 사건에 대한 묘사 없이 섣불리 팀업 무비를 시도하는 바람에 관객에게 DCEU의 세계관에 녹아들 여유를 주지 않았다는 점 등이 있을 것이다. 제임스 건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고, 어느 프랜차이즈에나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새롭게 시작되는 ‘DCU’가 좋은 성과를 내기를 바라는 것은 아마 대부분의 히어로무비 팬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바일 것이다.
제임스 건은 최근 ‘DCU’가 8~10년의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계획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헨리 카빌의 하차를 통한 새로운 슈퍼맨의 등장도 이와 연관이 깊을 것으로 보이는데, DC코믹스에서 슈퍼맨의 존재감은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중요하기에 유니버스를 새롭게 시작하기에 앞서 전면 개편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헨리 카빌이 21세기의 새로운 슈퍼맨으로서 쌓아 올린 이미지가 있기에 반발도 매우 거센 상황이지만, 하차는 이미 공식화되었고 앞으로의 상황을 지켜볼 일이다. 여기에 스크린 개봉작뿐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과 드라마가 세계관을 공유하는 대형 프랜차이즈로서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CW버스와 DCEU로 분리되어 있던 기존의 TV 시리즈/영화가 본격적으로 연계될 것으로 보인다. DC가 영화보다 드라마가 낫다는 오명(?)에서 진짜로 벗어날지, 그런 평가를 제대로 활용할지 기대 포인트 중 하나다.
사실 자체 플랫폼을 통해서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영화를 공통적인 세계관 토대 위에 세우는 작업은 MCU가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이미 했던 작업이다. 물론 이런 연계 때문에 진입장벽이 더 견고해졌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DC의 경우라면 얘기가 약간 다를 수 있다.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세계관을 토대로 필요한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하는 방법도 있고, 이제 대중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멀티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니까.
제임스 건이 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리런치 작업을 돌아봤을 때 일단 지나치게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캐릭터는 물론이고 민간인까지 어이없을 만큼 엄청나게 죽어나가는데도 이상하게 인간미가 있는 영화 아니었나. 적어도 유머러스하게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근본적으로 대중적인 상업영화가 가져가야 할 어떤 노선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는 이야기. 이런 감독의 손에 DC 히어로라는 강력한 소재와 공동대표라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했을 때, 뭐가 나올지는 나름대로 기대해 볼 만한 결과가 아닐까.
제임스 건은 올 초 DCU에 대한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어 10개년의 계획 중 개괄적인 청사진만은 조만간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캐릭터들이 얼마나 유지될지, 캐스팅이 얼마나 변경될지도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마도 사프란과 건이 함께 펼쳐 나갈 DCU라면 지금까지와는 확실히 다를 것 같다는 예감은 든다.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