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안 읽어보셨구나. 콜로디의 원작에서 피노키오는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인간이 되고 싶어하진 않아요. 대체로 인형의 삶에 만족하고 살죠.” 작년 11월 이 지면에 쓴 〈에이 아이〉 칼럼을 읽은 한 독자가 내게 귀띔했다. 그 칼럼에서 나는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최초의 SF 소설 〈프랑켄슈타인〉부터 시작해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아이작 아시모프의 〈바이센테니얼 맨〉 등 다양한 작품들이 “인간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는 피조물들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주었다.” 독자의 지적은 아마 이 대목을 두고 한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뜨끔했다. 디즈니의 〈피노키오〉를 비롯해 피노키오 모티프를 지닌 작품들을 많이 접해온 터라 내심 원작의 내용도 다 꿰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콜로디의 원작 〈피노키오의 모험〉을 각 잡고 정독한 기억은 없었다. 내가 읽었던 건 아마 후대에 축약되고 윤색된 ‘어린이 동화집’ 판본이었겠지. 그러니 난 다이제스트판을 읽고는 원작을 다 알고 있노라고 착각한 것이다.

새삼스레 나의 게으름을 고백하면서 글을 시작한 까닭은,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가 남긴 감상 때문이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그레고리 만)는 단 한 순간도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 그래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세상을 떠난 아들) 카를로처럼 말 잘 듣는 아이가 되라”는 제페토(데이비드 브래들리)의 말에 피노키오는 “하지만 난 카를로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꾸한다. 피노키오는 처음 겪어보는 삶을 사랑하고, 처음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신기해 하며, 제페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기를 원한다. 피노키오를 ‘진짜 사람 아이가 되고 싶어 하는 목각인형의 모험담’으로 기억할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피노키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시대 배경을 파시즘이 창궐한 1930년대로 가지고 오면서 제법 과격한 각색을 거친 작품이지만, 적어도 그 지점만큼은 콜로디의 원작에 충실한 이야기인 셈이다.

피노키오가 목각인형 어린아이인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동안, 그를 둘러싼 어른들은 피노키오에게 ‘피노키오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당장 제페토부터 피노키오에게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들 카를로 같은 아이가 되기를 요구하지 않나. 그래도 피노키오를 어떤 식으로든 아들로 받아들이려는 제페토는 사정이 낫다. 서커스 단장인 볼페 백작(크리스토퍼 발츠)은 피노키오에게 줄 없이도 혼자 노래하고 춤추는 신기한 볼거리가 되기를 요구하는데, 전 이탈리아가 파시즘의 광풍에 휩싸여 있던 1930년대 이탈리아에서 피노키오는 모형 총을 들고 행진하는 춤을 추며 무솔리니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진심이 아닌 노래와 내키지 않는 춤을 추며, 피노키오는 말 그대로 꼭두각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당 당원이자 시장 포데스타(론 펄만)는 피노키오가 진짜 인간 아이가 아니라서 죽지 않는다는 점에 매료되어, 피노키오에게 ‘죽어도 죽지 않는 이탈리아 소년의 기백을 상징하는 불굴의 군인’이 되기를 요구한다.

디즈니가 비슷한 시기에 선보인 애니메이션판 〈피노키오〉(1940)의 잔영 때문에 종종 잊혀지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는 피노키오가 파시즘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목각인형에서 ‘진짜 사람 아이’가 되는 피노키오의 여정은, 규율이 잡히지 않은 어린 소년들이 어엿한 파시스트 소년단의 일원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은유하는 것으로 윤색되었다. 자유분방하게 이탈리아를 떠돌아다니며 모험을 겪는 피노키오의 모험은, 파시스트 소년단의 일원이 되기 위한 엄격한 규율과 훈육의 과정으로 둔갑했다. 어른들의 광기가 피노키오를 심벌 삼아 어린아이들을 파시즘의 한복판으로 내몰았던 어두운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듯,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속 피노키오는 어른들의 등에 떠밀려 춤과 노래로 파시즘을 홍보하고 파시스트 소년단의 훈련을 받는다. 델 토로의 〈악마의 등뼈〉(2001)에서 그랬고 〈판의 미로〉(2006)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쟁과 파시즘의 광기는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들부터 사정없이 집어삼킨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를 조롱하듯,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어느 곳에서도 적응하기를 거부한다. 볼페 백작이 어렵사리 모셔온 무솔리니 앞에서 피노키오는 대놓고 무솔리니를 조롱한다. 그 전까지는 잘만 부르던 군가의 가사는, 무솔리니의 면전에서 원초적인 조롱의 언어로 둔갑한다. “저기 저 똥싸개 갓난애 때문에 똥을 쥐고 싸우리라. 총통님, 총통님 방귀를 뀌셨네.” 피노키오의 고집은 포데스타 시장의 손에 이끌려 파시스트 소년단 훈련소에 가서도 꺾이지 않는다. 시장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구인 캔들윅(핀 울프하드)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 피노키오는 싸움으로 승부를 겨루는 대신 캔들윅과 크게 한번 웃어 보이고는 사이좋게 비기는 길을 선택한다. 피노키오는 단 한 순간도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피노키오를 ‘피노키오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만들어보려 했던 어른들의 시도는 모두 실패한다. 그리고 피노키오를 찾아 오래 헤맨 제페토 또한, 다시 만난 피노키오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기에 이른다. “내가 너를 네가 아닌 다른 아이로 만들려고 했구나”라고 탄식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목각인형이 진짜 인간 아이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페토가 진짜 아버지가 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한 쪽 귀는 미처 만들어주지도 못했고 몸통에는 채 다듬지 않은 못들이 듬성듬성 튀어 나와 있는 목각인형을 아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 남들과 다른 아이에게 ‘남들처럼 살라.’고 요구하는 대신 ‘너는 너로 살려무나.’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걸 꼭 끌어 안아주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 그래서 난 더 많은 사람들이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를 만났으면 좋겠다. 현실 세계에서 목각인형이 진짜 인간 아이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상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건 어려워도 불가능하진 않을 테니까. 제페토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