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포스터. 사진 제공=CJ ENM

1933년, 일제강점기 시대 경성.

항일조직 ‘흑색단’의 스파이 ‘유령’이

비밀리에 활약하고 있다.

새로 부임한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는

‘흑색단’의 총독 암살 시도를 막기 위해

조선총독부 내의 ‘유령’을 잡으려는 덫을 친다.

영문도 모른 채, '유령'으로 의심받고

벼랑 끝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쥰지(설경구),

암호문 기록 담당 차경(이하늬),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박소담),

암호 해독 담당 천계장(서현우),

통신과 직원 백호(김동희).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기필코 살아나가 동지들을 구하고

총독 암살 작전을 성공시켜야 하는 ‘유령’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들 사이,

의심과 경계는 점점 짙어지는데…

<독전>(2018)으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이해영 감독이 돌아왔다. 5년의 공백을 깨고 들고 온 영화는 <유령>이다. 1933년 일제강점기에 이름도 얼굴도 없이 활약했던 ‘유령’이라는 독립운동가들을 그린 픽션이다.

전작 <독전>에서 ‘그래서 도대체 이 선생은 누구야?’라는 질문을 영화 끝까지 뚝심 있게 끌고 갔던 연출을 선보였던 이해영 감독. 복귀작 <유령>에서는 ‘밀실극’임에도 불구하고, 추리극의 외연을 탈피해, ‘첩보-액션’ 영화로 장르를 비틀었다. 더불어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만의 색깔로 피어오르는 ‘캐릭터 무비’로 설정했다. 일제강점기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전해지는 네 개의 공간도 영화에서 놓쳐서는 안 될 볼 거리.

길었다면 길 수도,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5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복귀한 이해영 감독은, 정작 지난 5년간 단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고, 하루하루를 매일같이 열심히 살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해영 감독의 지난 5년간의 시간이 이번 <유령>의 러닝타임 2시간에 온전히 녹아 있다는 말이다. 이해영 감독을 만나 지난 5년 그리고 <유령>을 만나 영화화하기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의 모습들에 대해 들어봤다.


<유령> 이해영 감독. 사진 제공=CJ ENM

<독전> 이후 5년 만에 메가폰을 잡으셨어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독전> 이후로 매일매일 열심히 일했어요. 하루도 쉬지 않고요. 그래서 후반작업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진짜 끝난 게 맞나, 뭔가를 더 해야 하나 생각도 들어요. 실감이 잘 안 나네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후반작업을 얼마 동안 하셨길래요?

1년 반 정도 걸렸어요.

코로나19 때문에 더 오래 걸린 건가요?

아니에요. 그냥 할 게 너무 많아서 오래 걸렸어요. 개봉일과는 무관하게 물리적으로 시간이 정말 많이 필요했거든요. 난이도 높은 CG 작업도 굉장히 많았고요.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모니터 시사도 두어 번 하면서 반응들을 반영하느라 꼼꼼하고 성실하게 후반작업을 한 거죠. 디테일한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제 성격도 한몫했죠(웃음).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영웅> 윤제균 감독님도 후반작업을 길게 했다더라고요. 배우들을 고생시키면서요. 혹시 감독님도?(웃음)

배우 몫은 후시녹음만 하면 끝나니까요. 다만, 후시녹음에서 배우들 고생이 많았죠. 정말 ‘역대급’으로 했습니다. 카이토 역을 맡은 박해수 배우는 혼자서만 5일을 했을 정도니까요. 일본어 때문이죠(웃음). 호흡 하나, 음절 하나까지 잡아가면서 열정을 불살랐는데, 정말 5일째 되는 날에는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게 보이더라고요. 박해수 배우도 5일 사이에 2kg이 빠졌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유령>은 원작 소설이 있더라고요. <풍성>이라는 중국 소설이요. <바람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고요. 혹시 원작 소설이나 영화는 보셨나요?

원작 소설은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출간된 적이 없어요. <유령>이 개봉하니 앞으로 출간될 수도 있겠네요. 저는 연출 제안을 받으면서 번역 파일을 받아 읽었습니다. 원작 소설은 완전히 밀실 추리극이에요. 밀실 추리극이라는 장르에 굉장히 충실한 이야기였고, 유령이 누구인지 밝혀나가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유령이 밝혀지면서 끝납니다.

연출 제안을 받고 바로 OK하신 건가요?

2018년 가을에 제안받고 고민을 사실 좀 오래 했습니다. 자신이 없더라고요. 제 안의 것들과 동기화도 잘 안되고요. 그래서 제작사 대표를 만나 “이 이야기가 내 안에 잘 안 들어온다”라고 말하고 거절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돌리신 건가요?

영화제작사가 강남에 있었어요. 그날 미팅을 마치고 심야 영화를 한 편 보려고 강변북로를 달려 신촌 메가박스로 이동하는 중이었어요. 한 달이나 고민하고 거절을 하고 나니, 그제야 좀 이 이야기가 객관적으로 보이더라고요. 거리감도 생기고요. 운전하면서 반추해 봤죠. 원작이 추리극이라는 점이 저에게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던 거였더라고요. 그러면 이걸 유령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유령 이야기로 시작을 하면 어떨까. 그러면서 스파이액션 장르를 타고 이야기가 흘러가면 재미있고, 새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극장에 도착해서 제작사 대표에게 전화했죠. 방금 거절했던 사람이(웃음), 역으로 제안한 거예요. 시놉시스를 다시 써서 제안하겠다고. 그러니까 <유령>은 강변북로에서 운전하면서 이미 머릿속에서 작업이 시작된 겁니다.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2018년에 제안을 받은 <유령>이 극장에 걸리기까지 5년이 흘렀네요.

그때는 <독전>으로 국내외 영화제 다니느라 바빴죠. 외국 다니면서 반은 놀기도 하고 반은 시놉시스를 쓰기도 하면서 2018년을 보낸 거예요. 2019년에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2020년에 캐스팅을 해서 2021년에 1년 반 촬영을 하고 후반작업을 직전까지 한 거죠. 시기는 오래 걸렸지만, 나름 바쁘게 지냈습니다. 영화 한 편이 나오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래도 안 엎어졌음 된 거죠.

그렇네요(웃음).

원작 소설과 가장 큰 차별점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큰 건 추리를 배제했다는 점입니다. 원작 소설에서 완전히 거꾸로 접근해 반대로 영화를 출발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죠. 사실 밀실추리라는 장르도 그렇고,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역대급 밀실추리극 소설과 영화가 너무 많이 떠오르잖아요. 그들과 견주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도 처음 연출을 고사한 이유 중에 하나였거든요. <독전>에서 이 선생이 누구인가를 끝까지 밀어붙였었죠? 관객의 궁금증을 계속 가져가는 형식을 <유령>에서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해보죠. 영화 도입부가 정말 인상적이더라고요. 암호문을 따라 모든 등장인물을 카메라가 유려하게 따라가는, 그럼으로써 관객에게 각각 인물들에 대한 전체적인 정보를 주는 영화적인 문법이 돋보이는 장면이더라고요. 공들여 찍으신 것 같은데, 어떻게 구상하신 건가요?

일단 박차경(이하늬)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의 포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중요한 주변 인물들 소개를 곁들이면서요. 동시에 암호 지령이 어떻게 조선총독부에 전달되는지, 이걸 어떻게 빼돌리는지, 빼돌린 지령이 흑색단의 암호로 바뀌어 다시 어떤 과정을 거쳐 행동대원들에게 지령으로 전달되는지, 그래서 어떻게 접선하고 마침내 거사를 치르기까지 가는지 등등의 수많은 정보들을 설명적이지 않고 직관적으로 따라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설계에서 출발했습니다. 영화를 보시면 차경과 난영이 접선하는 첫 씬이 하나의 배경음악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시작부터 그 지점까지 음악을 따라 편안히 가다 보면, 필요한 정보들이 입력되고,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는 거죠. 이 과정에서 영화적 리듬감을 만드는 데 신경을 썼습니다.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영화의 공간들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중간에 이동하면서 만나는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영화의 공간이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처음에 조선총독부 건물, 비밀이 전해지는 극장인 황금관, 다섯 인물이 고립되는 절벽 위 호텔, 그리고 마지막 거사가 일어나는 공회당이죠. 네 공간의 분위기가 모두 다른데, 어떻게 각각의 공간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하셨는지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떻게 미술 디자인을 주문하셨는지 궁금해요.

일단 조선총독부 건물은 내부를 명확하게 묘사하려고 했어요.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만들었죠. 조선총독부 안에도 몇 개의 공간이 있습니다. 굉장히 사무적인 공간도 있지만, 과시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가 자신들의 권력에 자아도취되어서 상징적인 위치에 상징적인 규모로 의도적으로 만든 건물이잖아요. 그들의 뻔뻔한 야욕을 허영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좀 과시적인 느낌이 나도록 세팅했습니다. 특히 암호를 해독하는 천계장(서현우)이 일하는 공간은 더 전문적이고 복잡한 체계처럼 느껴졌으면 했어요. 마치 사무실 전체가 암호문 같은 미스테리한 느낌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래서 천계장이 일하는 장면을 직부감으로 찍은 장면이 있는데요. 모든 각을 맞추고 오와 열을 결벽적으로 맞춰 찍느라 애썼던 기억도 납니다(웃음).

황금관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 같은 느낌이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유령> 전체 이미지랄까 비주얼을 견인하는 역할을 황금관이 했다고 봐요. 흑색단의 본부 같은 곳이기도 하니 실질적으로도 중요한 공간이기도 했고요. 사실 비극의 시대였잖아요. 그 시대를 표현하는 방식을 많이 고민했는데요. 화려함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그리고 그 화려함 뒤에 깔린 비극이라는 배경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느낄 수 있도록 더 휘황찬란한 조명이나 반짝이는 금속의 재질감을 도드라지게 표현했죠. 역설적으로요.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상영 중인 영화 <상하이 익스프레스>(감독 조세프 본 스텐버그, 1932)에도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 같아요.

영화 프롤로그 부분에 상해 육삼정에서 의거가 있었다고 나와요. 사료에 흑색공포단이라는 단체가 있고요. 이 의거가 상해에서 미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바통을 이어 받아 경성에서 계승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 거죠. 상해라는 지역에서 근간이 되는 역사와 링크되는 공감이라고 할까요? <상하이 익스프레스>는 그런 점에서 지명이 역사 속에서 링크됩니다. 그리고 굉장히 아이코닉한, 뭔가 아이콘적인 배우가 나오는 영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여기에서 릴리 역을 했던 마들렌 디트리히 배우가 딱 맞아떨어지더라고요. 당시 여배우들에게 으레 요구되던 섹시함을 초월하는, 한 여성으로 소구하기보다는 성별 위에 초월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영화 <상하이 익스프레스>를 본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유령>의 스토리와 약간 액자식으로 닮아 있어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다섯 인물이 모두 모여서 본격 밀실극이 시작되는 공간인 호텔이 주는 위용이랄까요, 압도감이 대단하더라고요.

호텔은 지형적으로 쉽게 탈출할 수 없는 요새 같은 공간이어야 했습니다. 서해안 어딘가에 있을 법한, 깎아지는 듯한 절벽을 찾아야 했죠. 거기에 공간이 기본적으로 규모가 좀 되고, 덩치가 있는 건물이어야 했어요. 그런데 과연 일제강점기에 이 정도의 건물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호텔로 설정한 거죠. 호텔이라고 정하고 나니 디자인을 약간 모던하게 하더라도 영화적으로 용납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호텔은 세트인가요, 아니면 직접 만드신 건가요?

아, 이거는 좀 영업비밀인데(웃음). 넓은 부지 공터에 호텔 현관 일부랑 옆에 식당 창문 정도를 실제로 지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총격씬이 벌어지는 호텔 앞마당은 태안의 어떤 공터였고요.

나머지는요?

다 그렸어요. CG로요. 바다 쪽에서 바라본 절벽 위 호텔 전경은 태안이 아니라 변산반도 어디쯤이었던 거 같아요. 이걸 말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호텔 자리에 군부대가 있었어요. 드론을 날려서 바다에서 찍은 후, 군부대를 지우고 절벽 높이를 더 높였어요. CG 작업이 정말 어렵더라고요. 한 1년 정도 걸린 거 같아요. 실제로 작은 현관을 만들었지만, 그 위에 벽돌 한 장 한 장을 놓고, 옆에 풀포기 하나하나를 심으면서 진짜 집 짓는 느낌으로 마감했죠. 1년 넘게 호텔을 지은 셈이네요. 그래서 후반작업도 오래 걸렸고요.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그런 비하인드스토리가 있었군요! 호텔이 압도적인 느낌도 들지만, 후반부 액션씬의 무대가 되기도 해서 공간 구현에 더 심혈을 기울이셨을 거 같아요.

맞아요.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 그러니까 공간과 이야기와 인물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리고 영화가 액션으로 변주되는 순간이기도 하고요. 그때 이 공간이 파괴되어야 하는 거고요. 어둡고, 질감도 굉장히 젖어 있어서 질척되는, 그런 더러운 공간의 민낯을 영화 중반 이후에 보여주려면, 역으로 처음 시작하는 공간의 모습은 모던하고 아름다우며, 안락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기에 후반에 그 더러운 이미지를 깨트릴 수 있으니까요. 그런 콘트라스트를 고려해 호텔을 디자인했습니다.

경성공회당은 마지막 거사가 일어나는 공간이죠.

지금 시대로 치면 시민회관 같은 곳이었겠죠. 이건 실제 공간을 참고한 건 아니고, 오히려 액션의 동선에 맞춰 설계한 공간입니다. 사람은 가로의 운동성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몸싸움, 총싸움 등 규모있고 스펙터클한 액션을 많이 보여줘야 하는데, 가로만으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럼 90도 틀어서 수직의 운동성을 보여주면? 그렇게 사람의 처형 방식을 약간 관객이 상상하지 못하게 수직으로 날리는 방식으로 고안했어요. 수직의 운동성을 위해 층고도 높였고요.

경성공회당 무대 뒤 공간의 커튼도 마치 살아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경성공회당은 수직으로 컨셉을 잡았잖아요. 두 주인공의 최후를 위한 공간인데, 누군가 처형당해서 수직으로, 그러니까 하늘로 날려보내면, 누구 한 명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아주 깊은 바닷속, 심해 느낌이죠. 그래서 커튼도 푸른 계열의 색을 선택했어요. 마치 심해 안에서,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누군가는 죽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설계한 거죠.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혹시 이 공간들 외에 영화적으로 중요하게 설정한 공간이 있을까요? 관객들이 눈여겨볼 만한 공간이요.

중요한 공간들은 다 말씀드린 거 같아요. <유령> 작업하면서 우리나라에 적산가옥이 많이 남은 것 같지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어요. 다른 영화에서 봤던 공간들을 결국 재활용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정말 기존에 보지 못했던 공간을 찾으려 전국을 샅샅이 돌아다녔어요. 그렇게 헌팅하던 중에 전라남도 장흥에서 놀라울 정도로 보존이 잘 된 2층 적산가옥 한 채를 발견했습니다. 이 공간에서 <유령>의 많은 장면을 찍을 수 있었어요. 차경의 집 내부 장면, 쥰지의 과거 회상 씬, 차경과 군인이 만나는 장면이 모두 그 집에서 찍은 거예요. 저에겐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죠. 아쉬운 건 <암살>(감독 최동훈, 2015)과 <밀정>(감독 김지운, 2016)을 찍은 상하이 세트장에서도 찍을 계획이었는데, 코로나19로 길이 막혀서 합천 세트장을 이용했어요. 최대한 합천처럼 안 보이게 찍으려 부단히 애를 썼던 기억이 나네요.

이제 배우 이야기를 해볼게요. 일본 영화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본어 대사가 많더라고요. 배우들이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누가 제일 힘들어했나요?(웃음)

누구를 딱히 꼽기가(웃음). 설경구 배우와 박해수 배우 둘 다 분량이 많아서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설경구 배우는 <역도산>(감독 송해성, 2004)에 출현해 일본어 감수성이 있었으니 조금 더 나았겠죠. 박해수 배우는 정말 ‘생으로’ 처음 하는 언어라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거든요. 2주 정도?

크랭크인까지 2주를 앞두고 합류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어떻게 그런 일이!

긴 이야기인데요, 사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사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설경구 배우가 말씀하셨으니, 저도 봉인을 해제하겠습니다(웃음). 사실 <유령> 연출을 맡으면서 저의 첫 번째 전제조건이 ‘일본인 캐릭터는 일본인 배우로 캐스팅한다’였어요. 일본어가 정말 부담되었거든요. 카이토 역은 일찍부터 일본의 유명하고 존재감 있는 배우를 캐스팅했어요. 줌으로 미팅도 많이 하면서 준비했죠. 그러다 코로나19가 터지고, 한일 관계가 악화하면서 한일간 무비자 협정이 깨지게 되었죠. 비즈니스 비자 발급도 잘 안되던 때였어요.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우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의사 소견으로 코로나19 상황에서 출국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갑자기 카이토 캐릭터가 공석이 된 거죠. 일본 배우 스케줄에 맞춰서 세트 공사까지 거의 마무리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그래서 대체 배우를 물색하다가 박해수 배우는 어떻게 컨택하신 거예요?

크랭크인이 3주 정도 남은 상황이었어요. 멘붕이었죠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첫 번째 전제조건을 과감히 포기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일본어는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면 그다음은? 연기력이죠. 언어에 대한 위기를 다 눌러버리고 압살해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가진 배우가 필요했어요. 더불어 시간이 없으니 성실한 배우를 찾아야 했죠. 정말 열심히 찾았어요. 그때 박해수 배우가 눈에 들어왔고, 전작들을 보면서 박해수 배우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겠다, 포스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실하단 이야기도 전해들었고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건넸습니다. 막연한 마음으로요.

박해수 배우가 한번에 OK 했던가요?

첫 만남의 자리였어요. 이틀 정도 밤을 새우면서 고민했다더라고요. 하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면서요. 지인들과 상의하기도 하고 고민도 토로했대요. 그런데 워낙 마음이 고운 사람이라, 혹시나 민폐를 끼칠 것 같다는 생각에 사실 거절의 의사를 밝히러 나온 자리였던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제가 그 자리에서 처음 박해수 배우를 대면한 순간, 그냥 반했습니다. 이 배우 너무 근사하다. 사람 자체가, 태 자체가 너무 멋지더라고요. 카이토 캐릭터를 맡겨도 될 정도의 포스가 느껴졌달까요? 저는 확 반했는데, 박해수 배우는 거절하려고 나온 거잖아요. 말로는 영화 너무 좋다고, 너무 하고 싶은데 민폐가 될 것 같다는 거절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데, 느껴지더라고요. 이 배우의 표정에서 너무 하고 싶다, 카이토 캐릭터를 욕망하고 갈망하는 것이요. 그냥 지켜보다가 쿡 찔렀죠. 합시다. 당신이 카이토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요. 그랬더니 와르르 무너지더라고요(웃음). 사실 너무 하고 싶었다고요. 2주 만에 괴물 같은 성실함으로 자신의 모든 일본어를 다 암기하고, 상대 배우의 일본어 대사까지도 암기했어요. 자기가 알 수 없는 언어지만, 매 순간 뱉는 대사와 연기를 다 진짜로 느끼면서 연기하고 리액션 하더라고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감독님께 박해수 배우가 구원자였네요.

세트장을 미리 지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군중씬에서 카이토가 리드하는 장면을 크랭크인 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 찍었어요. 그러니까 박해수 배우는 영화 합류한지 불과 몇주 만에 최고의 역량과 기량을 다 발휘해야 했습니다. 제가 촬영 중간중간에 박해수 배우의 손을 덥석 잡고 “이 영화를 구원해줘서 고맙다, 당신은 우리 영화의 수호천사”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정도니까요.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카이토 대사가 일본어라 관객들이 자막을 봐야 하잖아요. 혹시 N차 관람을 할 계획이라면, 두 번째부터는 자막을 보지 않길 권합니다. 박해수 배우의 엄청난 연기, 그러니까 매 순간 증오, 경멸, 애증, 욕망의 감정들이 밀도 있게 응축되어 녹아 있는 연기를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오죽하면 제가 “방금 박해수 배우 얼굴에 우주가 스쳐갔다”라고 표현했을까요. 괴물 같았습니다.

쥰지 역할을 맡았던 설경구 배우의 연기도 다채롭더라고요. 플래쉬백에서 계속해서 과거의 행동이 바뀌어서, 저는 마지막까지 정체가 헷갈리기도 했어요. 다만 영화 후반부에 대사가 좀 늘어진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쥰지는 혼란한 캐릭터에요. 이 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에서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히 알 수 있죠. 그런 면에서 공회당의 연설 부분은 감독인 저에게 가장 핵심에 있는 이야기였고, 모든 대사에 목적이 담겼어요. 목표가 명확하다 보니 대사도 굉장히 빨리 썼던 기억이 납니다. 쥰지가 굉장히 뜨거운 감정으로 경멸적인 연설을 하잖아요. “조센징,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나라 관뚜껑을 붙잡고 뭔가 할 수 있다고 믿는 너희들!”이라는 대사도 있죠. 그때 설경구 배우의 연기가 너무 엄청나다고 느꼈어요. 경외심이 드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설경구 배우의 마지막 연설 장면 찍을 때 실제 촬영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영화에서 다른 장면은 감독인 제가 뭔가 열심히 노력했고, 준비해서 구현하려고 했는데요, 그 장면은 정말 설경구 배우가 오롯이 만들어낸 겁니다. 사실 원래 그렇게 계획한 컷이 아니었어요. 짧게 끊어서 화면 사이즈도 다르게 만들어서 이어 붙이려고 했거든요. 제가 설경구 배우에게 “선배님, 여기는 대사가 긴데, 앞에 여기까지만 해주시면 됩니다”라고 전달했고, 촬영감독, 조명감독도 다 그렇게 약속하고 찍은 장면이에요. 그런데 촬영에 들어갔는데, 제가 연출하는 느낌이 아니었어요. 정말 엄청난 걸 목도한 느낌이랄까요? 그저 멍하게 ‘컷!’도 외치지 못할 정도였어요. 제가 컷을 외치지 않으니 설경구 배우도 한 호흡으로 다 가더라고요. 촬영감독도 연기에 빠져 멍하게 있다 아차 싶어서 한박자 늦게 카메라를 뺐어요. 영화적으로는 완벽하지 않다고 해도, 그 모든 걸 압살하고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죠. 다른 장면은 제가 감독의 입장으로 보는데, 그 장면만큼은 오롯이 관객으로 보게 되는 장면이었어요. 영화의 품격을 높여줬다고 할까요? 관객분들도 그걸 같이 느끼신다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지난 언론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박소담 배우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던 게 화제가 되었어요. 암 투병 중에 찍었다고요. 그걸 모르고 강행군한 미안함이겠죠. 박소담 배우와의 인연이 궁금해요. 연출하셨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에서 처음 만난 건가요? <유령>의 유리코역으로 캐스팅은 어떻게 한 건지도요.

<경성학교>에서 처음 만났죠. 그때 막 한예종을 졸업해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에 나서던 시기였던 거 같아요. 그런데 신인배우들 사이에서도 한눈에 딱 들어오더라고요. 오디션도 봤지만, 처음 대본 놓고 리딩할 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냥 형식적으로 대본을 읽는 자리일 수도 있는데, 박소담 배우가 읽는 순간 제가 그동안 머릿속에서 계획했던 것들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이미 완성되어 있는 배우였어요. 그때부터 박소담 배우는 제게 무궁한 신뢰를 줬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신뢰를 배신한 적이 없는 배우입니다. <유령> 캐스팅으로 다시 만나면서 박소담 배우를 다시 생각했어요. 앳된 외모지만 목소리도 약간 저음이고, 에너지가 안에는 많은데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느낌의 배우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그걸 거꾸로 써보자고 제안했죠. 안에 있는 걸 다 밖으로 내지르자, 미치게 날뛰어보자고요. 박소담 배우가 너무 좋다고 하더라고요. 몇 년 사이에 엄청난 감독들과 엄청난 작품을 거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더라고요. 이 배우의 발밑에 저는 받침대 하나 놓아줬을 뿐인데, 사뿐히 밟고 올라 영화 내내 훨훨 날아다녔습니다(웃음). 그 비상이 너무 뿌듯하고 기뻤고 대견했죠.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박차경 역은 이하늬 배우가 맡았어요. 영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전반적으로 무게를 잡아주는 역할이 눈에 띄었어요. 에너지가 과하게 폭발하지 않지만, 늘 끓어넘치는 무언가를 마음에 담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현장에서 이하늬 배우는 어땠었나요? 박차경이란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해요.

이하늬 배우는 지금까지 에너지 넘치고 긍정적인 캐릭터를 많이 보여줬죠. 관객들도 그 부분을 좋아했고요. 그런데 에너지를 발산하는 유리코와 달리 차경에게서는 에너지를 밀도 있게 꾹꾹 눌러 담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면 이하늬 배우가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굉장히 새로운 얼굴의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처음 시나리오를 본 사람들이 이하늬 배우를 유리코로, 박소담 배우를 박차경으로 알더라고요. 거꾸로 읽는 걸 보고 캐스팅을 잘했다 싶었어요.

이하늬 배우에게 가장 많이 주셨던 연기 디렉션은 무엇이었나요?

큰 사람 같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사사로움에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 앞에서도 담대한 사람이요. 본인에게 꽤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워낙 어려운 감정이 많은 인물이잖아요. 비극적인 걸 견디면서도 마음속에는 뜨거움을 품고 있는데, 밖으로는 차가워보이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이하늬 배우가 현장에서도 그 에너지를 유지하더라고요. 단전 어딘가에 촬영 내내 그 뜨거운 걸 유지하면서요. 어떤 촬영에서도 기능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속의 에너지를 조금씩 꺼내서 깊이 있게 연기하는 걸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그 와중에 성격은 좋아서 그렇게 에너지를 응축한 채로도 주변 스태프나 배우들을 챙기더라고요. 누가 지쳐 있으면 앞에 가서 춤도 추면서요(웃음). 모든 이들을 품으면서 자기의 캐릭터를 놓지 않는 에너지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관객들에게 배우로서 이하늬가 새로워졌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저에게도 보람일 것 같네요.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만의 가치를 지켜 내기 위해 투쟁하던 얼굴들로 기억되는, ‘캐릭터 무비’로 남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에 맞섰던, 뜨거운 사람들의 이야기로 회자되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고양이를 끔찍이 위하는 천계장과 통신과 직원 백호(김동우)의 역할이 생각보다 도드라지지 않았던 거 같아 아쉽더라고요. 촬영분이 있는데 나중에 편집에서 덜어낸 건지 궁금해요.

특별히 더 편집된 건 아니에요. 원래 시나리오에서 세팅된 분량만큼의 결과물입니다. 캐릭터 무비는 캐릭터간 앙상블이 중요하잖아요. 어떤 캐릭터에는 관객이 많이 이입하고, 어떤 캐릭터에는 덜 이입할 수도 있는데, 그 자체로 만들어가는 것도 캐릭터 무비의 하나의 매력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모든 캐릭터에 에너지가 다 들어가 있어요. 천계장 캐릭터에 대해 주변에서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라고 하더라고요. 관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를 영화에서 조금 빠르게 박탈해버리면, 그로 인해 생겨난 텐션들로 인해 결과적으로 그 캐릭터가 더 사랑받는 거라 생각해요. 더 말씀드리면 스포일러가 되니까, 영화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웃음).

<유령>은 첩보 액션물입니다. 총격씬이 굉장히 화려하고요. 또 총에 맞아 구멍 난 얼굴, 낭자한 피까지 저는 물론 진짜인지 모르지만,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 거 같아요. 액션씬을 찍을 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액션별로 접근을 다르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쥰지와 차경이 붙는 호텔에서의 맨몸 액션씬 같은 경우는 길게 찍었죠. 다른 액션은 컷도 나누고 영화적 리듬을 살리도록 애초부터 설계했거든요. 배우들이 여기까지는 주먹 한번 날리고 컷, 맞고 난 다음부터 다시 액션, 이렇게요. 대역배우들도 도와줄 수 있죠. 그런데 맨몸 격투씬은 진짜 두 사람의 몸과 몸이 부딪히는 그런 타격감이 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르게 접근했어요. 무술감독과 상의도 했는데, 그렇게 하면 대역배우를 쓸 지점이 줄어들어 배우들이 고생이죠. 성별 대결이 아니라 계급장 떼고 두 인간이 격돌하는 느낌을 주려고, 배우들에게 여기서 멱살 잡고 시작하면 카메라는 따라만 갈 거라고 했습니다. 핸드헬드로요. 이하늬 배우가 생각보다 설경구 배우에게 전혀 밀리지 않더라고요(웃음). 놀라운 운동신경으로 격돌했어요. 여성으로, 여성임에도 잘 싸운 게 아니라요.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아무래도 전작인 <독전>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독전> 관객이라면 끝까지 그래서 이선생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추리하는 재미가 있었잖아요. <유령>에서는 조금 구성이 다르던데, 관객들이 어떻게 감상하면 좋을까요? 관전 포인트랄까요?

원작 이야기를 관객들이 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한다면,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유령>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즐기려면 추리가 배제되어 있다는 걸 알고 보면 좋을 것 같다고요. 추리극이 아니라는 거죠. 초반에 스파이 장르로 차가운 느낌으로 영화가 진행되다가, 중후반부터 액션으로 달궈지고 마침내 에너지가 폭발하는 이야기로 치달아가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영화를 좀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지난해 말 개봉한 <영웅>부터 올해 초에는 <유령>까지 항일투쟁 블록버스터들이 극장가에서 관객을 만나는데요. 감독님께서 영화를 준비하면서 또 찍으면서 일제강점기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생각하셨을 거 같아요. 그 시절을 영화로 구현하면서 어떤 부분을 가장 드러내고 싶으셨나요?

일제강점기라는 소재가 한때 영화계에서 터부시되던 때가 있었죠. 그런데 <밀정>, <암살>이 많은 관객과 뜨겁게 소통해준 덕분에 일제강점기를 영화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는, 장르적으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게 된 거죠. 관련 자료를 많이 찾아보면서 공부했어요. 그걸 영화에 적극적으로 녹여냈다기보다는, 감독으로서 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부로 얻은 감수성을 이 이야기와 인물들에 녹인 거니까요. 영화 어딘가에는 있겠죠.

그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한마디로 말하면 찬란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인생을 걸었던 싸움들이 찬란했다는 것. 이 찬란함을 뜨겁게 전달하려면 영화에 장르적 쾌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비주얼적이나 감성적으로 무언가 관객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면서 묘사되고 전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미장센과 음향 전체에 그런 감성을 담으려고 더 노력했어요. 일제강점기가 우리에게는 승리의 기억이 아니잖아요. 묘사하다 보니 찬란함의 끝을 그러니까 승리의 순간을 영화에 담고 싶다는 욕심이 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실제했던 역사는 아니지만, 찬란한 승리의 순간을 영화에서 경험하고 나면, 오히려 아, 그때 우리의 시대와 역사가 얼마나 아픔이었고 슬픔이었는지 역설적으로 환기하는 기능을 하겠구나 싶었죠. 이 찬란함이 찬란함 자체로 관객에게 느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영화에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유령> 스틸컷. 사진 제공=CJ ENM

영화를 안 본 관객들에게는 스포일러일 수 있지만, <유령>도 요즘 흐름에 맞는 ‘걸크러쉬’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처럼요! 이 역시 원작을 따른 건지, 아니면 각색에서 변경한 건지 궁금해요.

원작과는 달라요. 여자 캐릭터가 중요하긴 한데 중요한 캐릭터 중 하나인 거죠. 원작 소설에서는 초반에 설정된 세팅을 차용한 것일 뿐이고요, <유령>은 그 이야기의 기초적인 설정을 제외한 전반적인 플로팅과 이야기, 캐릭터 감성은 매우 다릅니다.

우리가 보통 일제강점기의 독립군을 생각하면, 우선 남자들을 떠올리잖아요. 최근 <영웅>에서도 여자들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서기보다는 조연으로 그쳤고요. 각본을 쓰면서, 영화를 찍으면서 일제강점기하의 여성들의 삶을 곰곰이 곱씹어보셨을 거 같아요. 영화에서는 여자들도 다들 사연이 있고요. 연대하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유령>에서 일제강점기의 여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으셨는지 듣고 싶어요.

일단 저는 <유령>이 여성, 남성이라는 성별 프레임으로 읽히지 않길 간곡히 바랍니다. 보통 우리가 이런 류의 장르영화 안에서 남녀 성별을 의식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리는 위계가 있는 거 같아요. 저는 그것들이 영화 안 인물들에게 개입되지 않길 바랐고요. 성별을 떠나서 인물들로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많은 거죠. 어떤 의도를 갖고 세팅한 건 아니고요, 본능적으로 감각적으로 이야기를 설계하면서 만들어진 인물들이기에 성별에 대한 기준은 딱히 없었다고 말씀드립니다.

혹시 <유령> 2도 계획 중이신가요? 그렇다면 배우와 이야기는 어떻게 구성하실 건지도 궁금해요.

전혀요. <독전>도 <유령>도 다 그래요. 누군가 저에게 40대 중반을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어보면, <유령> 영화 두 시간 안에 다 있다고 대답할 겁니다. 40대 초반은 <독전> 2시간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처럼요. 이 영화들의 러닝타임 안에 제 몇 년 동안의 모든 것들이 다 녹아들어 있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연소한 것 같기도 해요. 이 이야기 안에서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완전 연소해서 떠나보냈으니, 이제 다음 행보에서는 <유령>은 잊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야겠죠.

<유령> 포스터. 사진 제공=CJ ENM

감독님 이야기를 조금 여쭤보고 싶어요. 각본가로 영화계에 입문하셨잖아요. <신라의 달밤>(2001) 원안자이기도 하시고,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과 <26년>(2012년)의 각본을 쓰기도 하셨어요. 아예 <천하장사 마돈나>(2006)부터는 <페스티발>(2010),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 <독전>(2018)까지는 각본과 감독을 겸하셨고요. 질문드릴게요. 좋은 각본은 무엇인가요?

너무 어렵네요(웃음). 아시다시피 저는 시나리오 작가로 먼저 데뷔했어요. 전업작가 생활도 몇 년 했죠.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는 건 어딜 가도 따라오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요. 아직도 시나리오 쓸 때마다 매번 처음 쓰는 느낌이에요. 이제 뭔가 알 것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한 번도 없거든요. 그래서 좋은 각본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거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에게는 늘 인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영화든 시나리오든 보거나 읽고 나서 ‘아, 이 안에 이 인물을 나는 결국 알 것 같아, 이 인물을 알게 되었어’라고 느껴지게 만든다면 좋은 시나리오 아닐까요?

그러면 좋은 시나리오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찾는 편이세요?

딱히 어딘가에서 찾아지는 루트나 통로를 찾은 적은 없고요(웃음). 시나리오는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있죠? 예전에는 이 말이 참 오글거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느껴요. 정말 엉덩이 말고는 답이 없구나 하고요. 오래 앉아서 모니터 안에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인물들에게 계속 말을 건네요. 질문하면서 말을 거는 거죠. 그 관찰에서부터 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거기서 얻게 되는 답이 결국 좋은 시나리오로 인도해주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열심히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하얗게 불태웠어요(웃음).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거기서 보태서 더 했다는 느낌까지 들거든요.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을 만큼 열심히 만든 영화를 관객들도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극장에서 만나요!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