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스센스〉(1999)의 경미한, 결정적이지는 않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 버리는 것 말고,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일 말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가장 큰 관심사인 탓에 타인의 삶을 힘주어 경청하지 못한다. 솔직히 말하자. 딱히 관심 없는 주변 사람들의 근황을,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방적인 신세 한탄을, 어디서 전해 듣고 온 건지 알 수 없는 온갖 루머를,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기괴한 신념을, 성의를 가지고 가만히 들어주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 탓에 적잖은 양의 스몰 토크는 제대로 수신되지 못한 채 허공을 둥둥 떠다닌다.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게 싫어서 택시를 타면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가자’고 부탁하고, 내 이야기를 오롯이 들어줄 사람이 간절해서 돈을 주고 상담치료를 받는다. 때론 같은 지붕 아래에서 밥을 먹고 잠을 청하는 가족의 이야기도 들어내기 어렵다. 듣는 일은 어렵고, 온전히 귀 기울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숭고한 노동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식스센스〉(1999)는 바로 그 어렵고 숭고한 ‘들어주는 일’에 관한 영화다. 악명 높은 “아무개가 무엇무엇이다!”라는 반전은 영화를 안 본 사람들조차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고, 그 반전이 할리우드 스릴러 장르의 역사를 어떻게 바꿨는지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반전 탓에 정작 영화가 뭘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들어주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준 사람이 드물다는 이 역설이란.

엄마 린(토니 콜레트)과 둘이 살고 있는 콜(헤일리 조엘 오스먼트)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다. 사람들은 콜의 말을 안 믿을 거니까. 콜의 귓가에 나쁜 말을 속삭이는 것도, 콜의 눈앞에 깜짝 등장해 콜을 놀래키는 것도, 사람들이 안 볼 때 찬장 문을 죄다 열어젖히는 것도 모두 영혼들의 소행이지만, 사람들은 그 모든 게 콜이 저지르는 일이라 짐작하고 이 모든 게 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상담의 말콤(브루스 윌리스)을 만날 때까지 콜은 계속 혼자였다.

말콤에게도 제 말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하다. 1년 전 자신의 오진으로 평생을 고통받은 환자 빈센트(도니 월버그)에게 공격을 당한 이후로, 아내 안나(올리비아 윌리엄스)와 말콤의 사이는 냉랭하기 그지 없다. 말콤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안나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말콤은 남편으로서는 거절당한 것 같고 의사로서는 실패한 것만 같다. 그래서 말콤은 콜에게 각별히 더 마음을 쓴다. 빈센트를 제대로 돕지 못한 실책을 만회라도 하듯, 이 단추를 잘 끼워내면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믿으며.

그러나 말콤 역시 죽은 자들의 영혼을 본다는 콜의 고백을 곧이곧대로 들어주지 못한다. 콜이 영혼을 볼 때마다 느끼는 구체적인 증상을 고백해도, 말콤은 앞에서만 고개를 끄덕거리고 뒤에선 혼자 녹음기를 켜고 중얼거린다. “생각보다 병세가 심각하다. 심각한 아동조현병을 앓고 있다. 난 도움이 못 되고 있다.” 자신의 말을 듣지만 실은 듣지 않고 있는 말콤에게 콜은 호소한다. “선생님은 제 말을 믿으시죠? 선생님은 제 비밀을 믿어주시는 거죠? 저를 믿지도 않는데 저를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죠?”

이 대화 직후 말콤이 취하는 행동은 의미심장하다. 콜에게 추궁을 당한 뒤, 말콤은 빈센트와의 상담 내역 녹음테이프를 꺼내어 다시 ‘듣는다.’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들어야 하는 걸 못 들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본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말콤은 백색 소음 뒤에 숨겨져 있던 영혼들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빈센트도 콜과 같은 상황 속에서 괴로워했다는걸, 자신이 너무 자명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말콤은 더 정확하게 듣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제라도 더 잘 들어야 했다.

콜의 입장을 이해하고 난 뒤 말콤은 콜이 겪는 어려움을 타개할 방도를 떠올린다. 그건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자신이 콜에게 그랬듯. 너무 늦었지만 빈센트와의 녹음테이프를 다시 꺼내어 들었듯.

“유령들이 네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니? 생각해보렴, 콜. 아주 잘 생각해야 돼. 그들이 뭘 원할까?”

“그냥 도움이요.”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무섭게 생겼어도 그냥 도움을 원할 뿐이야. 그들을 떠나게 만들 방법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요?”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거야.”

“도움을 원치 않으면요? 그냥 화가 나서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거라면요?”

“그런 게 아닐 거야.”

“어떻게 확신하세요?”

확신을 묻는 콜에게 말콤은 답한다. “확신은 못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더라도 일단은 들어보라고, 거기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콜은 공포를 이겨내고 간신히 한 발을 내딛는다. 죽어가던 순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영혼들은 끔찍하고, 뒷덜미에 돋아나는 소름과 온몸을 사로잡는 한기는 견디기 어렵다. 그 모든 두려움을 가까스로 이겨낸 콜은 영혼에게 묻는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지상을 떠돌던 영혼들은, 콜이 들을 준비를 취하자 비로소 콜에게 제 사연을 털어놓는다. 콜의 치료도, 말콤의 번민도, 영혼들의 원한도, 결국 서로를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를 잘 들어줄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린 같은 지붕을 공유하는 가족의 말도 때론 듣기 귀찮아하니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난 타인의 말을 듣는 일이 버겁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도 모르겠고,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보겠노라 다짐해 봐야 3일을 채 못 넘기지 않을까 싶어 민망스럽다. 그러나 작심삼일도 3일씩 열 번 반복하면 한 달이 되는 것처럼, 그때그때 새롭게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이런 걸 다짐해보면 어떨까. 새해에는 서로의 말을 조금은 더 성의 있게 들어보려 노력하겠다고. 내가 동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단 당신의 말을 듣겠다고. 그게 당신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내가 나을 수 있다면, 조금은 더 열심히 당신의 말을 들어보겠다고. 비록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 일단은 들어보겠다고 말이다. 말콤이 그랬듯, 콜이 그랬듯.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