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보션>

2023년, 지난 설 연휴에 뜨거운 감자가 인터넷을 휩쓸었다. 음력 설, 그러니까 '설날'을 영어로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지였다. 스타들의 설 인사를 시작으로 'Lunar New Year'와 'Chinese New Year'가 뜨겁게 대립했다. 음력이니 '루나'가 맞다는 쪽과 음력이 중국에서 기원했으니 '차이니즈'가 맞다는 쪽.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BTS가 설 인사 영상 제목을 'Seollnal'로 표기해 'Seollnal'의 승리가 됐다. 갑자기 이 무슨 설 표기 얘기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한국 명절을 두고 영미권과 중국의 의견이 맞붙는 모습이 '할리우드산 중공군과 싸우는 한국전쟁 참전 군인'을 다룬 <디보션>이 연상됐기 때문. 하필 넷플릭스가 설 연휴 전날 공개했으니 타이밍도 좋은 것 같아 이참에 <디보션>을 소개한다.


<디보션>

<디보션>은 6.25 한국전쟁 중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이어진, 함경남도 장진군 일대에서 일어난 장진호 전투가 배경이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우세가 이어지던 중 인천상륙작전을 중심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의 우세로 기세가 넘어갔다. 그러다 중공군이 북한과 동맹을 맺고 참전하면서 한국전쟁은 다시 고착상태에 빠졌다. 패퇴하는 북한군을 대신해 남으로 진격하려는 중공군과 최대한 빨리 한반도를 수복하려는 유엔군의 여러 차례 충돌이 이어졌고 장진호 전투가 그중 전쟁의 방향을 바꾼(다르게 말하자면 장기화한) 전투로 꼽히는 편이다.

영화는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미군 중 미 해군 조종사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실제 참전 조종사 제시 브라운과 톰 허드너를 주인공으로 한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 J.D. 딜라드가 연출을 맡았는데, 그의 전작들처럼 특정 장르의 극한을 선보이기보다 드라마로 참전 군인들의 서사를 쌓은 후 그를 기반으로 장르적 쾌감을 선하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는 후반부에 액션을 몰아넣었기에 흔히 말하는 전쟁 영화, 항공 액션 영화와는 궤를 다소 달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디보션>

다만 <디보션>은 굉장히 오랜만에 나온 할리우드산 한국 전쟁 영화기에 놓치기엔 또 아쉽다. 특히 2021년 중국에서 <장진호>라는 '중뽕영화'로 엄청난 흥행 성적을 기록했었는데, <디보션>은 <장진호>의 중뽕에 보내는 일종의 반박문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디보션>이 '미국 만세'를 내세우는 영화는 아니다. 흑인 최초 조종사 제시 브라운이 주인공이라서 오히려 당시 미국의 민낯까지도 드러내는 데 망설임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사상에 매몰된 영화가 <장진호>라면, 인물에게 집중한 영화가 <디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사에서 공개한 촬영 현장. 실제 기체를 동원했다.

현재 항공 액션이라 하면 당연히 <탑건: 매버릭>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실제 기종을 가져다 찍는 아날로그 연출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며 2022년 흥행 돌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한국전쟁 배경인 <디보션>은 당연히 <탑건: 매버릭>처럼 화려하거나 시원한 쾌감은 없으나 일견 닮은 구석이 있다. 뭐냐하면 <디보션> 역시 실제 기기를 사용하여 영화를 채웠다는 것이다. F4u 콜세어(Corsair), AD 스카이레이더(Skyraider), F8F 베어캣(Bearcats) 등 해당 영화에 등장하는 전투기에 심지어 소련이 만든 공산국가의 대표 전투기 MiG-15기까지 실제 항공기를 공수해 사용한 것. 물론 액션 장면처럼 격한 장면이야 CG로 대체했겠지만, 일반적인 비행 장면들은 실제 기기를 운행해 촬영했다고.

<디보션>

단순히 비행기를 띄운 것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일부 장면에서 전투기에 탑승해 촬영을 진행했다. 제시 브라운을 연기한 조나단 메이저스는 탑승 중 멀미에 블랙아웃 증상까지 겪었지만 관객들에게 비행이라는 경험을 전하고 싶어서 모든 장면을 끝까지 소화했다고 한다. 이런 장면은 호커 씨 퓨리(Hawker Sea Fury)의 뒷좌석을 F8F 베어캣의 조종석과 비슷하게 가공해서 실제 F8F 베어캣에 탑승한 것처럼 배우들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관객들에게 시각적 체험을 제공했다. 물론 전투 장면 같은 경우는 보유한 기체로 모두 소화할 수 없어 CGI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탑건: 매버릭>을 좋아한다면, 앞선 촬영 방법들이 굉장히 친숙하게 들릴 것이다. <탑건: 매버릭> 또한 이런 방법으로 배우들을 전투기에 태워 촬영했기 때문. 기시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 <디보션>은 <탑건: 매버릭>에도 참여한 항공촬영 코디네이터 케빈 라로사가 참여했다. '비행 중인 전투기에 탑승한 배우'를 촬영하는 데 그의 능력이 십분 발휘됐을 듯하다. 물론 그 바탕에는 실제 비행 장면 촬영을 결심한 J.D. 딜라드 감독의 결단이 있었다. J.D. 딜라드는 해군 조종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영화에 진짜 비행기를 넣고 싶었다고(촬영 중 아버지가 세트에 방문해 조언도 해줬다).


글렌 포웰

<디보션>과 <탑건: 매버릭>의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글렌 포웰이란 배우의 존재다. 글렌 포웰은 <탑건: 매버릭>에서 행맨 역을 맡아 눈도장을 찍었다. 행맨은 루스터(마일즈 텔러)를 깔보고 자신이 에이스라고 우쭐대는 라이벌로 등장하는데, 막판에는 의외의 쿨한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호감을 산 인물. 글렌 포웰은 <디보션>에선 제시 브라운의 윙맨 톰 허드너 중위를 맡았다. <디보션>이나 <탑건: 매버릭>이나 실제 전투기에 탑승해서 촬영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음에도 그는 두 작품 모두 출연했다. 특히 <디보션>은 그가 원작 소설을 읽고 직접 영화 제작을 추진한 작품. 그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 조종사였기 때문에 이런 작품에 관심을 두고 있다가 소설을 읽게 된 것이 아닐까. 포웰은 <탑건: 매버릭>으로 내한하기 전에도 할아버지에게 조문하고자 한국에 방문한 이력이 있었다.

조나단 메이저스

제시 브라운을 연기한 조나단 메이저스는 글렌 포웰처럼 극적인 사연은 없지만 가족 중 복무 중인 군인들이 있어 <디보션>의 해군 조종사를 연기하는 것에 끌렸다. 거기에 제시 브라운은 미 해군 사상 최초 흑인 조종사. 그가 비행 장면처럼 힘겨웠던 촬영도 끝까지 소화한 건 일종의 의무감도 있었을 것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합류해 앞으로 자주 볼 얼굴인데, <디보션>으로 그의 연기를 미리 만나보면 더욱 기대가 될 것이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