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해볼까 하는데, 조금 뜬금없을지도,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진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 투성이라는 걸 관대하게 이해할 거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혹시 게이 아니냐는 얘기를 어릴 때(특히 30대 때) 곧잘 들었다. 곱상하게 생겼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귀고리, 팔찌, 목걸이, 반지 다 하고 다니던 시절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몸태나 말버릇이 여자 같다는 얘긴 꼬마 때(당시엔 얼굴도 진짜 태국 소녀 같았다)부터 많이 들었고, 그게 콤플렉스라 여겨 사춘기 때는 위악을 부리기도 했다. 대학에 강의 다닐 때는 한 부류의 여학생들이 근거 없는 확증도 찍은 바 있다. 웃고 말았다.

나는 왜 여자(남자)가 아니고 남자(여자)인가

주변에 알고 지내는 게이들로부터 나 같은 스타일은 게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길 들은 적도 있거니와, 남성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낀 적은 군대 시절 이후 없다. 어딘가 황홀하고도 무서우면서 스스로가 징그럽다고 느껴진 경험이었다.

얼마 전에도 누군가에게 게이 아니냐는 소릴 들었다. 그렇지 않다고 웃으며 대꾸했다. 바이섹슈얼이었던 여성과 잠시 알고 지낸 적 있는데, 당시 그녀는 어떻게 동성과 사랑이 불가능하냐며 외려 심각하게 여긴 적 있다. 그쪽에서 듣기에 옹색하게 들릴 대답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 안 난다.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에 사로잡힌 건 분명했다.

사회화 과정에서 스스로도 모르게 자신을 남성 혹은 여성이라 규정 내려진 게 많을 거라는 건 (적어도 한국에서는) 요즘에서야 본격적으로 담론화되기 시작한 문제다. 지금도 때로 친구들한테 “계집애 같아 재수없다”는 소릴 듣곤 한다. 나이 먹을수록 자주 만나게 되는 술친구들도 거의 여성이고 여성을 대할 때가 더 편할 때가 많다. 업무적 관계에서도 여성과 일하는 게 더 무난한 편이다. 곧이곧대로 들을 바는 아니지만, 사주 보는 사람한테 여자로 태어났어야 대성했을 거라는 소릴 들은 적도 있다.

옷을 입을 때도 골반 차이 때문에 청바지는 남자 옷을 입지만, 여성 의류 매장을 기웃거릴 때가 많다. 눈에 딱 띄는 게 있으면 무조건 엑스라지 사서 입곤 한다. 그럼에도 감정적으로 민감해지는 순간이 발생하면 여지없는 남자(가부장 꼰대의식?)처럼 굴 때가 있다. 그러면서 곧 후회한다. 그때마다 사로잡히는, 내가 쓰레기 같다는 자괴감은 늘 당혹스럽다.

내 몸이 다른 사람 몸 같았다

느닷없이 무슨 이런 야릇한 소릴 하나 싶다. 얼마 전 새벽, 잠에서 깨며 어떤 영화가 문득 생각난 까닭이다. 꿈에 그 영화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알 파치노가 젊은 시절 출연한 <광란자>란 영화다. 1980년 작품이니 알 파치노가 막 ‘알’(?)에서 깬 직후 촬영한 작품이다. <스카페이스>로 미국 영화사의 중심인물로 떠오르게 된 건 몇 년 후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스릴러의 거장 윌리엄 프리드킨이 연출했다.

살인사건을 추적하던 형사가 당시 미국 서부에서 성행하던 게이 클럽을 드나들다가 자신이 게이가 되어버린다는 대충의 스토리만 기억한다. 원제는 ‘Cruising’, 소위 이성을 유혹하려 껄떡거리는 짓거리를 뜻한다. 거 참 묘한 영화네, 라면서 보다가 이상한 기시감에 빠졌었다. 내가 언젠가 저런 느낌을 가졌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장면이나 대사의 디테일은 기억 안 나는데, 보는 내내 내 몸을 마치 남의 몸인 양 기웃거리며 손으로 쓰다듬은 기억이 또렷하다. 자위의 차원이 아니라 뭔가 낯선 것을 탐색하는 기분이었다. 요즘도 그런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로션 등도 여성용을 주로 쓰는데, 피부가 약해서이기도 하지만, 남성용 화장품 냄새가 스스로 역겨울 때가 많아서이다. 립스틱이나 마스카라를 장난 삼아 누가 발라주면 좋아라 까불기도 한다. 20대 때 한번은 술 먹고 마스카라 한 채로 지하철 탔다가 시선 집중 받은 적도 있다. 요즘 같았으면 SNS에 동영상이 떠돌만한 정황이었다. (아닌가? 이젠 많이들 익숙해졌으려나?)

새벽은 시커먼 거울과도 같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잊혔거나 묻어뒀던 게 불쑥 튀어나와 내가 나를 점검하고 의심하게 되곤 한다. <광란자>가 떠올랐던 게 꿈속이었는지 깨고 나서 스스로 재편집한 상념 속에서인지 문득 헷갈린다. 한국 제목은 걸맞기도 어이없기도 하다. 스펠바운딩되는 게 광란적 행위임엔 분명하지만, 원제의 미묘하고 적나라한 뉘앙스가 지워지는 느낌이다. 영화는 굉장히 눅눅하고 칙칙하면서도 당시 미국의 비주류 문화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나는 ‘내가 아는 나’가 아니다

1980년이면 에이즈라는 게 슬슬 명명되기 시작하면서, 질병 알레고리를 통해 낯선 것과 비틀린 것에 대한 공포 분위기가 표면에 떠오르던 무렵이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미국 서부를 여행 다니면서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활용한 일종의 ‘생체실험적 철학 행위’(?)를 섭렵하던 시기가 딱 그 무렵이다. 푸코 전기 중 제임스 밀러가 쓴 <미셸 푸코의 수난>에 그런 내용이 상세히 나온다. 디디에 에리봉이 쓴 더 유명한 평전은 외려 그 사실을 흐리거나 사자 명예존중을 위해 덧칠한 느낌이 강하다.

<광란자>의 마지막 장면은 섬세하고 기이하다 못해 어딘지 호러의 느낌도 강하다. 공포는 결국 낯선 것에 대한 편견과 왜곡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사람이 공포를 즐기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하다. 스스로, 혹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정체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다가 어떤 특수한 계기로 자기 자신에게 내재한 이질성을 깨닫게 되는 건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유발하다. 비단 젠더나 성 정체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모종의 계기를 통해 잠재된 폭력성을 자각하거나 감정의 극단에 치달아 평소에 상상도 못한 행동을 저지르면서 자중지란을 겪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 이미 확립되었던 정체성을 되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나는 오로지 내가 아는 나’이어야 한다는 강박의 소산일 것이다. 그런데 그걸 부러 깨뜨리고자 한다면?

성인이 될수록 사람은 오히려 오래 알던 자신이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인간도 결국 유기체고 그런 만큼 무한한 변형 가능성이 있다. 그로 인해 숨어있는 잠재력이 폭발할 수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감행할 수도 있다. 그런 자각이야 말로 자기관리의 시발이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뒤져봤지만 내 주변머리로는 찾기가 힘들다. 뇌리에 딱 박혀 있는 장면 몇 개의 스틸만 발견해서 그 중 한 장면을 베껴 그려 보았다. 혼란을 겪던 알 파치노가 본격적으로(?) 화장을 하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영화 후반부이다. 이전까지 그는 우직하고 매몰찬 터프가이 형사였다. 수사를 하러 게이클럽을 드나들면서 서서히 자신 안의 다른 정체성을 찾게 되는 게 이 영화의 핵심이자 매력인데, 어두침침한 듯 현란한 영상만큼 야릇하게 진전되는 심리의 변이가 아스트랄한 느낌이었다. 중간중간 일상의 평범한 모습들이 삽입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장면들의 평범함이 외려 더 괴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형사는 자기도 모르게 억눌렀다가 스스로 인정하기 싫었던 진짜 얼굴을 되찾은 건지도 모른다. 나아가, 자신이 진짜라 믿었던 세계가 오히려 허구이고, 도저히 자신이라 인정할 수 없는, 이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자기 안에서 빛을 밝히며 떠오르는 또다른 삶의 가능성을 깨달은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이미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다. 말 그대로 커밍 아웃‘인 셈이다.

당신은 정말 ’당신 자신‘인가

이건 성 정체성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은 대개 유일무이한 정체성을 유지하기를 강요 받는다.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인데, 타인의 정체성이나 성격, 능력에 대한 일방적 확증만한 폭력도 없다. 아니, 그런 자기 확증에 의해 타인에 대한 유형 무형의 폭력이 발생한다. 성인이 될수록 사람은 오히려 오래 알던 자신이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인간도 결국 유기체고 그런 만큼 무한한 변형 가능성이 있다. 그로 인해 숨어있는 잠재력이 폭발할 수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감행할 수도 있다. 그런 자각이야 말로 자기관리의 시발이다.

앞서 미셸 푸코를 인용했었다. 푸코 말년의 철학적 화두가 다름아닌 ’자기에의 배려‘였다. 그보다 150여 년 전, 시인 랭보는 ’나는 타인이다‘라고 선언한 적 있다. 지금 당신은 정말 존재하는 그대로 ’자기자신‘인가.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