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해로한 부부도 이별은 피할 수 없다. 먼저 떠난 배우자의 마지막 말이 ‘함께 해서 행복했어’라면 후회 없이 이번 생을 마감할 수 있겠지만, 톰 하퍼(티모시 스폴)는 그렇지 못한다. 아내 메리(필리스 로건)와 생전 이루지 못했던 마지막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도착하기 전에. 그렇게 90대 노신사 톰은 평생을 아내와 함께 했던 집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다. 이동 수단은 버스. 손에는 작은 가방과 지도뿐. <라스트 버스>(감독 길리스 매키넌)는 한 노인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마지막 여행을 담담히 따라간다.
톰 할아버지의 마지막 여정은 그가 아내와 평생을 보낸 집인 존오그로츠(John O’Groats, 스코틀랜드 최북단 지점)에서 최남단인 랜즈엔드(Lands End, 잉글랜드 남서부)까지 약 1,300km에 달하는 거리이다. 톰은 이 영국 종단을 자가용이 아닌 버스만으로 실행하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안전하고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여행의 자유를 자신만의 공간에서 만끽할 수 있는 자가용과 달리, 버스는 가장 진입장벽이 낮은 대중교통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노령인 톰은 무료 연금수급권을 활용해 마지막 버스 여행을 떠난다.
버스 창밖으로 영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스쳐 간다. 팬데믹으로 여행할 수 없었던 시절에 그나마 스크린으로 경험할 수 있는 대리 여행처럼. 하지만 마치 폐허처럼 주름지고 피곤해 보이는 톰의 얼굴 클로즈업이 대비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녹아든 노신사의 모습은 멀리서 보기엔 한 폭의 그림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수십 년 동안 변해버린 영국의 현재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비극이다.
여행 도중에 톰 할아버지는 여러 사람과 일련의 만남을 갖는다. 그의 기분을 맞춰주는 척하면서도 왠지 불안해 보였던 소녀는 그가 유일하게 움켜쥐고 있던 대상인 가방을 훔쳐 달아난다. 다른 이의 도움으로 소녀를 붙잡아 가방을 돌려받은 그는 소녀를 꾸짖는 대신 용돈을 쥐여준다. 버스에서는 부르카와 히잡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조롱당하는 무슬림 여성을 옹호하기도 한다. 깜빡 잠이 들어 정류장을 놓치고 차고지 근처에 내려 쓰러져버린 그를 돌보는 건 유쾌한 다문화 가정의 사람들이다. 그렇게 톰은 마지막 버스 여행에서 지금의 영국을 만난다.
그렇다고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 <라스트 버스>가 노인 톰의 현대 영국 관찰기로 남는 것은 아니다. 버스 여행을 시작하고 첫 번째 만남은 도로 한가운데 멈춰 서버린 자동차로 어쩔 줄 모르는 한 청년이다. 버스 기사가 짜증을 내는 상황에서 톰은 청년의 증조부가 운영하던 카센터에서 일했다며 자동차를 고쳐준다. 이 모습을 본 몇몇의 젊은 승객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다. ‘#버스맨’이라는 태그를 달아서. 그의 버스 투어에서 눈물을 자아내는 장면 중 하나인 노래 장면 역시 지금의 젊은 영국인의 마음을 울린다. 술에 취한 청춘 남녀들이 유행가를 주고받으며 오늘 밤을 함께 보낼지 주판알을 튕기는 한 가운데서(실제 톰은 남자 쪽, 여자 쪽의 가운데 앉아 있다), 나지막하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부른다. 수십 년 모진 풍파를 견디고 살아온 한 노인의 노래는 젊은이들의 SNS에 올라가고, 그렇게 그는 어느덧 영국에서 가장 힙한 할아버지가 된다. 영화에서 톰이 관찰자에서 대상자로 전환되는 장면들이다.
이제 톰 할아버지는 유명 인사다. 라디오 방송에도 나온다. 청취자 여러분 중에 오늘 버스를 타셨다면 ‘미스터 미스터리’가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라고. 인사하고 사진을 찍어 제보해 달라고. 여행 초기에는 무료승차권이 스코틀랜드 지역에서만 유효하다고, 이미 500km 이상을 무임승차했다고 버스에서 쫓겨나는 신세였지만, 이제는 어떤 버스를 타도 모두 그를 알아보고 미소를 짓는다. 버스비를 대신 내주겠다는 사람들도 생기고, 여행에서 처음 만난 우크라이나인에게 아내의 생일 파티에 와달라 초청받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 우여곡절을 거치며 여행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톰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으로 이송된다. 의사들도 간호사들도 지극정성으로 그를 돌보고, 마침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에게 입원을 권유한다. 톰의 육신이 무려 세 종류의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톰은 지금 병원으로 돌아가면 결코 제 발로 걸어 나올 수 없을 거라며 다시 버스를 타러 떠난다. 그렇다. 지켜야 할 약속이 있는 사람은 강하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덮쳐버리기 전에 그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톰 할아버지는 아내와 도대체 어떤 약속을 한 것일까? 그는 도대체 왜 처음 가정을 꾸렸던 랜드엔즈를 떠나 그렇게 먼 존오그로츠까지 가서 살아야 했을까? 영화는 플래시백 기법을 통해 부부의 예전을 보여준다. 손가락이 처음으로 맞닿는 떨리는 순간부터 마침내 그들이 부부가 되던 날들, 그리고 부부에게 축복처럼 찾아온 아이의 탄생까지.
하지만 아이는 채 1년이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그 모든 공기를 더 이상 이겨낼 수 없었던 아내를 위해 고향을 잊을 수 있는 곳, 고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존오그로츠까지 가야 했던 과거의 모습을. 그러니까, 톰의 마지막 여행은 생전에 아내와 함께 하지 못했던 여행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우직하고 따뜻해만 보였던 톰이 움켜쥐고 있는 단 하나의 존재, 가방에 감춰진 비밀과 맞닿아 있다.
영화가 종장에 접어들면서 톰의 긴 여행도 서서히 끝이 난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고 다시 돌아온 마을. 버스에서 내리는 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을 몸으로 보여준 톰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며. 떠날 때는 혼자였는데, 돌아올 때는 모두가 함께다. 한 노인의 묵묵하게도 힘겨웠던 여행이 팍팍한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울린 것이다. 그림책에 실린 풍경 사진집이 영국의 모습을 담아낸 것처럼, <라스트 버스>는 톰이 대중교통을 타면서 만난 영국인들의 단면을 보여주면서 톰의 착한 마음을 그렇게 살짝살짝 드러낸다.
이보다 더 완벽한 톰은 없다. 세상을 먼저 떠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버스로 영국 종단 여행을 시작한 톰 할아버지 역을 맡은 티모시 스폴은 자신의 나이 64세보다 서른 살 가량 많은 노인을 연기했다. 일견 고집불통 할아버지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하면서도 헌신적인 모습을 인상적으로 표현해냈다.
티모시 스폴은 영국 왕립 연극학교(RADA) 출신으로 로열셰익스피어(RSC)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이후 마이크 리 감독의 작품에 출연, 영국 하층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주목받았다. 특히, 19세기 가장 위대한 풍경 화가로 추앙받는 윌리엄 터너의 황혼기를 다룬 영화 <미스터 터너>에서 주연을 맡아 제67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다. 우리나라 관객에게는 그 유명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피터 페티그루’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사랑을 받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라스트 버스>에서 노부부로 호흡을 맞춘 티모시 스폴과 필리스 로건이 이전에도 부부로 합을 맞춘 적이 있다는 것. 제49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여우주연상 수상작 <비밀과 거짓말>(감독 마이크 리, 1996)에서 두 배우는 부부로 출연한 바 있다. 특히 두 배우는 이 영화에서 가족이라서 말하지 못했던 비밀과, 가족이라서 할 수밖에 없었던 거짓말들로 남보다 못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가족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 명연기를 선보였다. <비밀과 거짓말> 이후 27년 만에 다시 두 배우가 부부로 <라스트 버스>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혹자는 이 영화가 한 노인의 응시와 자연 풍광의 대비만으로 영화 전반을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고 불평할지도 모른다. 또는 현재 영국에 대한 한 노인의 관찰자적 시선이 너무 겉핥기 식으로 그치고, 사회 문제의 본질까지 닿지는 못했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티모시 스폴이 보여준 헌신적인 연기가 그 모든 것을 상쇄한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낸 날들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그와의 마지막 약속을 오롯이 지켜내는 묵묵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엿본다.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존경할 만한 노년의 모습을.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