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바라보는 TV 화면 안은 타인의 일상으로 가득하다. 이 모든 걸 제공하는 TV의 시선은 누군가의 집 밖 사회생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수중분만이 이뤄지는 병원부터 이혼한 부부의 재회 현장까지, 더 이상 TV가 가지 못하는 곳은 없다. TV가 한 번 선을 넘고 나니 사람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일상을 판매대에 내놓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의 삶에까지 접근권이 생기자, 서로의 인생을 나란히 놓고 견주어 보는 행위는 놀이처럼 바뀌었다. 이 '비교'라는 놀이는 매우 간단하고 재미있어서 중독을 유발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위안을 얻고, 위를 쳐다보면 열등감을 얻는다. 애초에 비교가 스스로의 삶에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 결괏값이 부정적일수록 중독성은 더 강해진다.
비교의 횟수가 늘고 범위가 커질수록 그 기준은 더 정교하고 엄격하게 바뀐다. '부자는 아니지만 적당히 먹고사는 집단'을 가리키던 중산층의 의미가 '4인 가구일 경우, 순자산을 약 10억 원 이상 보유하고 있는 집단'으로 구체화한 것처럼 말이다. 이에 따라 매우 잘게 쪼개진 개인의 정체성들은 공통적으로 '소비자'라는 특징을 띤다. 사회로부터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불확실할 만큼 많은 정체성을 강요당한 사람들은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얻은 소비 강령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한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말에 모두가 공감하는 구조에서 '해야 하는 것'은 곧 '사야 하는 것'이다. 결국 소비를 자양분으로 삼는 사회는 개인에게 불확실성을 주입하고, 개인은 비교를 바탕으로 한 소비로 안정감을 찾는다. 그래서 TV가 개인의 내밀한 일상을 비추며 조장하는 비교는 소비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는 자신의 이름을 딴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이다. 리얼리티 쇼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지만, 트루먼의 쇼가 특별한 이유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태아 시절부터 TV에 나왔던 트루먼의 삶은 모두 '트루먼 쇼'의 디렉터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가 짜 놓은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세트장이며, 인생의 모든 장면에 등장한 인물들은 배우다. 입학, 졸업, 연애, 결혼, 취직까지 각본이지만 정작 트루먼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만 스스로를 똑같은 일상 속 작은 변화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트루먼이 30살이 될 때까지, 그를 쫓는 카메라는 5000개까지 늘어났으며 전 세계 17억 명의 시청자들이 '트루먼 쇼'를 보게 됐다. 크리스토퍼는 이 프로그램에 속임수는 없으며, 트루먼은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의 인생을 "약간 통제할 뿐"이라고 덧붙인다. '트루먼 쇼'의 시청자들에게 크리스토퍼가 선사하는 건 '위안'의 탈을 쓴 오락이다. 트루먼의 평범성이 매우 흔해 보이지만 정작 손에 넣기 힘든 것임을 아는 시청자들은 자신의 삶과 트루먼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한다. 동시에 트루먼이 오로지 자신들의 오락 만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것에 우월감도 느끼고 있다. 이는 실로 마약 같은 중독성으로, 영화 속 시청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트루먼 쇼'를 보는 데 할애한다. 프로그램에 나오는 모든 물건들이 소비를 장려하는 광고의 대상이다. 이를테면 죽마고우 말론(노아 에머리히)이 늘 트루먼에게 맥주를 건네며 상표를 보여준다든가,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만나는 이웃이 트루먼을 광고판으로 밀어 더 잘 노출되게 하는 식이다. 작은 나라 하나만큼의 경제 효과를 내는 '트루먼 쇼'에서는 트루먼조차 죽지 않는 한 하차할 수 없다.
본래 모험가 기질이 있던 트루먼은 자신이 사는 섬을 둘러싼 바다 너머를 상상해 왔다. 어릴 적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한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처럼 되고 싶다는 꿈도 꿨지만, "이미 발견되지 않은 땅은 없다"라는 말과 함께 묵살당한다. 그럼에도 모험을 하고 싶어 아버지와 종종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트루먼에게, 크리스토퍼는 물 공포증을 심는다. 세트장에 폭풍과 거친 파도를 조성해 아버지를 익사시켜 버린 것이다.
크리스토퍼의 계획대로라면, 트루먼은 대학에 입학한 후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메릴(로라 리니)와 연인으로 발전해 결혼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대학 내 엑스트라였던 실비아(나타샤 맥켈혼)에게 반하고 만다. '트루먼 쇼'의 스태프들은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지만, 이런 방해는 오히려 트루먼에게 실비아를 가슴 깊이 각인시키는 원인이 됐다. 그 후로 트루먼은 30살까지 크리스토퍼가 쓴 각본대로 살았지만, 스태프에게 끌려나가던 실비아의 행선지 피지섬은 잊지 못한 채였다.
그러던 중 트루먼의 늘 비슷한 일상을 깨는 이상한 징후들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큰개자리'라고 적힌 조명이 떨어지고,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건 속에서 트루먼은 자신이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단순히 섬만 빠져나가려고 해도 온 세상이 이를 가로막는 상황에서 그의 특별한 평범은 의미가 없었다. 완벽한 석양과 아름다운 바다가 있는 그의 고향은 트루먼에게 가 본 적 없는 피지섬만큼의 가치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바다 끝으로 배를 띄웠다. 아무도 막지 못하는 트루먼의 항해 앞에, 크리스토프는 그가 죽든 말든 세트장에 엄청난 폭풍을 가한다. 하지만 트루먼은 끝까지 살아서 마치 마젤란이 그랬듯 세트 끝 다른 세상을 발견하고, 그리로 향한다.
새장은 새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새장을 만든 사람을 위한 발명품이다. 그리고 '트루먼 쇼'의 세트장은 트루먼이 아닌 크리스토프와 시청자들을 위한 새장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영화 말미 인터뷰에서, 트루먼에게 '역겨움 없는 세상', 고난과 역경 없이 평탄한 삶을 살 기회를 줬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하면 '트루먼 쇼'에 구현된 것은 소비 사회의 어떤 표준이다. 하지만 트루먼은 자신의 삶이 쇼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도 잘 다듬어진 표준을 벗어나길 택했다.
르네 데카르트는 '데카르트의 악마'라 불리는 사고 실험을 했다. 한 개인이 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얻은 정보가 사실은 전부 악마의 개입에 의한 거짓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를 눈치챈 순간, 나를 포함한 세상은 온통 가짜가 될까? 하지만 그곳, 그 시점에는 악마의 농간을 깨달은 한 인간이 있다. 트루먼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지라도, 그 사실을 사유한 트루먼은 거기 분명히 존재했다. 세트장 속 '표준'이라는 안락한 거짓을 깬 모험의 시작은, 끝내 비교하고 비교당하기를 거부하기로 결정한 트루먼을 '진짜'로서 존재하게 하는 사유의 출발이기도 했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