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지극히 현실적인 노부부 이야기를 담은 영화 한 편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평생을 예쁜 꽃처럼 살고 싶던 아내가 치매에 걸리며 서서히 붕괴되는 가족의 모습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담은 <그대 어이가리>(감독 이창열)가 그것. ‘사랑의 품격을 보여준 영화’(블랙스완국제영화제)라는 평을 받은 것처럼, 지난해 국제영화제 51관왕을 수상하며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다.
이창열 감독은 일곱 살에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영화학과에 진학한 그는 장남이라는 위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 꿈을 유예했다. 굴지의 대기업에서 최연소 특진을 거듭하면서 언젠가는 영화판으로 돌아갈 것을 꿈꿨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2016년 입봉한 이후, 이번 <그대 어이가리>로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영화는 이야기의 힘’이라고 말하는 이창열 감독을 만나 영화와 그의 삶 이야기를 들어봤다.
개봉을 앞두고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굉장히 설레요. 그동안 준비할 때부터 개봉을 앞둔 지금까지 전쟁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현장에서 우왕좌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크랭크인 4개월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은 만나서 리딩 작업을 했습니다. 그 덕에 현장에서 호흡이 잘 맞아서 여기까지 무사히 온 거 같아요. 기분이야 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인데, 생각만큼 막 떨리지는 않네요.
<그대 어이가리>는 어떤 영화인지 관객들에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인생을 어떻게 잘 살고 죽을 것인가에 대한, 삶에 대한 관찰을 다룬 영화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진솔하게 영화에 담았어요.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는데,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잖아요? 사실 인생이 참 짧은데, 그걸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또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어떤 목표점에 도달하면 행복이나 성공이 거기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거기에 도착해도 그게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관객들이 했으면 싶었어요. 살면서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는데요. 첫 번째는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1998)입니다. 오프닝 시퀀스 때문이죠. 묘하게 분위기가 닮으면서도 또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감독님은 어떤 계기가 있었길래 1965년으로 돌아가서 초상집의 풍경을 담을 생각을 하셨나요?
제 고향 금산은 전라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에 있습니다. 상여 문화를 굉장히 많이 접하고 살았어요. 그 익숙한 기억이 좋았고요. 왜냐하면 상여가 나가지만 저희에게는 축제였거든요. 먹을 것이 많기도 했고요. 그리고 상여가 되게 이뻐요. 너무너무 예쁜 상여가 나가는데, 제가 그 어린 나이에 죽음이란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장례문화가 세계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예전에 느꼈던 추억의 장례식 문화를 오프닝에서 한 번 재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연출자로 한국의 전통적인 모습을 어떻게 보여주려고 하셨는지 궁금해요.
찍을 때는 거의 원 씬, 원 컷으로 했어요. 카메라를 고정해서 찍으면 생동감이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오프닝 시퀀스에 동원된 배우만 한 80명쯤 될 겁니다. 모두 불러서 여기서는 이걸 해주세요, 저기서는 이렇게 해주시고요. 제가 큐 들어가면 그대로 재현해주시면 됩니다 하고 말했죠. 마치 제가 어렸을 때 본 상여 나가는 모습을 그대로 다큐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 생동감 있는 전통 시골의 장례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죠.
롱테이크로 찍으셨더라고요
맞아요. 원래 한 5분 정도 되는 롱테이크였고, 전부 핸드헬드로 찍었어요. 중간에 약간 흔들린 장면이 있어서 너무 속상하긴 했지만요.
<그대 어이가리>를 보고 떠올린 두 번째 영화는 <아무르>(감독 미카엘 하네케, 2012)입니다. 이 영화도 치매 걸린 늙은 아내를 돌보는 남편의 이야기죠. 혹시 이 영화를 보셨는지, 어떤 점에서 다르게 만들려고 하셨는지 궁금해요.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인데, 그때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못 봤어요. 누가 이야길 하길래, 영화 작업이 거의 끝나고서야 봤어요. 보고 나서 ‘아이고 또 이런 이야기네’ 했던 기억이 있네요. 하지만 결이 달라요. 표현 방식도 좀 다르기 때문에, 설령 알고 봤다고 해도 <그대 어이가리> 시퀀스를 바꿀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우리 영화는 처음부터 계획했던 콘티대로 찍었어요.
치매에 걸린 한 여인(정아미)을 돌보는 남편(선동혁)의 이야기가 큰 줄거리입니다. 각본도 직접 쓰셨는데,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으셨는지, 또 에피소드들은 어떻게 구성하셨는지 궁금해요. 혹시 자전적 요소가 들어가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시나리오를 처음 기획할 때 두 가지가 영향을 끼쳤어요. 첫 번째는 뭔가 관객들에게 좋은 주제를 전달해 사회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죠. 집사람이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는데요. 상담을 하니 많은 사람을 만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상담 때마다 거의 살아있는 송장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분이 있대요. 소방관인데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신 거죠. 요양병원에 보내도 케어가 안 되니 다 거부해서 결국 집으로 모셔서 방에 가둬놓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힘든 그분의 모습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그분의 삶이 <그대 어이가리>의 인물들과 비슷한 모습인 거 같기도 합니다. 어머니를 자식의 도리로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치매라는 병이 이제는 너무 흔해졌죠.
제가 시나리오를 쓸 때였는데요. 조사하니까 환자가 그 당시만도 88만 명이더라고요. 거기에 환자 가족까지 더하면 450만 명에 달해요. 거의 인구의 1/10인데, 이건 정말 너무 큰 문제구나, 내가 만약 그 입장이라면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서 가슴이 정말 아팠어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늘 질문했는데, 마침 그것이 시나리오와 매치가 된 거죠. 이 문제를 영화로 만들어 사회적으로 환기한다면, 정치인들이나 관련 기관 분들이 영화를 보고 조금이나마 이 여건을 더 좋게 만들 계기가 돼준다면 보람 있겠지 하는 생각이 첫 번째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통문화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대 어이가리>에는 창(唱)이 많이 나옵니다. 선동혁 배우가 원래 창을 잘하는 걸 알고 있었어요. 만약 영화에서 이 두 축의 밸런스가 잘 맞아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치매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는 영화의 2시간을 끌고 가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거든요. 우리 전통문화에서의 죽음에는 상여가 나오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는 가족의 입장에서 봐야 하고요. 여기에 사람이 살면서 힘든 감정을 노래로 풀기도 하는데, 그걸 창으로 표현해 한을 불어넣어 준다면, 영화에 생동감이 들지 않을까 해서 치매와 창을 결합한 방식을 취했습니다.
시나리오 작업은 얼마나 걸렸나요?
인터뷰를 한 달 정도 했어요. 코로나19로 요양병원 방문이 어려웠죠.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관찰하고, 몇 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시나리오를 끝냈어요. 없는 이야기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인터뷰를 통해 한 작업이다 보니, 다른 시나리오들보다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아서 조금 빨랐죠.
촬영은 얼마 동안 하셨고요?
15회차로 끝냈습니다.
정말 빡빡하게 하셨네요.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오프닝에 상여가 나오잖아요. 에필로그에도 상여가 나오고요. 그걸 하루 만에 다 찍었습니다. 정말 힘들었죠. 우이동에서 상여가 나가는 장면을 촬영한 다음에, 그 큰 상여를 싣고 대전으로 이동했어요. 대전 엑스포다리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아 글쎄, 비가 계속 내리는 거예요. 장소도 하루 빌린 거고 밤 11시까지는 마쳐야 하는 건데 말이죠. 8시에는 촬영에 들어가야 되는데 하면서 속이 탔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처럼 10분 전에 비가 그친 거예요. 복을 받은 거죠. 지금도 그 장면을 촬영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영화에서 보시면 바닥이 비로 다 젖어 있어요. 빛 반사 때문에 조명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웃음).
연희의 남편 동혁은 국악인이죠. 일 년에 몇 달씩 전국을 떠돌며 공연하고, 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해요. 앞서 잠깐 말씀하셨지만, 남편의 직업을 소리꾼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소리꾼이었냐면, 오프닝 시퀀스를 보시면 주인공의 아버지가 상여잡이입니다. 어머니는 곡잡이죠. 초상이 난 집에서 대신 곡을 해주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주인공은 그 피를 갖고 태어난 거예요. 자연스럽게 국악인으로 살았다는 설정인 겁니다.
캐스팅은 처음부터 선동혁 배우를 염두에 두셨나요?
70% 정도는 그렇죠. 창을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면 완전히 사실감이 떨어지죠. 감동도 없겠다 싶어서 사실 선동혁 배우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원래 창을 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선동혁 배우는 한 번에 오케이 했나요?
시나리오를 건넸더니, 일산에서 대전까지 3시간을 단숨에 달려왔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너무 감사하다. 평생 해보고 싶던 배역을 받은 거 같아서 너무 감사하다고요.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인데, 선동혁 배우 어머니께서 치매를 오래 앓으셨대요. 15년이나요. 장모님도 치매시고요. 더 놀라운 건, 어머니께서 촬영 2주 전에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본인도 그렇게 오랫동안 어머니를 간병했던 거잖아요. 그래서 <그대 어이가리>에서 배우의 몸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든 겁니다. 촬영을 마치고 선동혁 배우가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을 갖고 연기해준 거죠.
정아미 배우는 소녀 같은 아내에서 치매 환자로 변해가는 모습을 정말 잘 표현했더라고요. 현장에서 어떤 연기를 주문하셨는지, 또 정유미 배우는 현장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정아미 배우는 연극에서 내공이 다져진 분이에요. 연기를 너무 잘 하죠.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연극 특유 방식으로 연기하는 모습이 보여요. 일반 관객들이 느끼긴 어렵지만, 감독으로서 그게 노출되면 안 되겠다 싶어서 4개월 리딩 기간 동안 독해하면서 호흡을 맞췄습니다. 정아미 배우뿐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서로를 계속 탐구한 거죠. 워낙 준비를 많이 해서 이미 캐릭터를 다 맞췄으니, 카메라가 돌면 생활을 하듯 자동적으로 연기가 나오니 따로 주문할 게 없더라고요. 빡빡한 촬영 일정이었지만, 현장에서는 단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어서 크랭크업날 헹가래도 받았답니다(웃음).
영화에 판소리 장면이 참 많이 나와요. 아내를 보내고 홀로 남은 남편이 방에서 나지막히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요, 정신병원 말고는 답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남편이 개울에서 구슬프게 창을 부르기도 하죠. 이런 곡들은 어떻게 선정하셨나요?
동혁이 다리 아래 개울에서 노래하는 장면에서 부르는 노래는 <육자배기 공산명월아>고요, 마지막 호숫가에서 부르는 노래는 진도씻김굿 중 길닦음 대목에 나오는 상여소리예요. 아내에게 수의를 입히는 장면에서 동혁이 부르는 노래는 <흥타령> 중 꿈이로다 라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모든 곡들은 선동혁 배우가 다 준비해온 겁니다. 시나리오가 나오고 촬영 들어가기까지 6개월의 준비 기간이 있었는데요. 선동혁 배우가 거의 매일 제게 노래 부른 장면을 영상으로 촬영해서 보냈어요. 제가 ‘이건 좀 세다’라고 말하면 다시 불러서 보냈죠. 하루에 2번씩 거의 매일 부르면서 고른 곡들입니다
남편이 일도 쉬면서 헌신적으로 돕지만 아내의 치매는 더 악화되고, 결국 요양원으로 가게 됩니다.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나서 부녀가 대화하는데, 저는 왜 자장면을 먹는지가 궁금하더라고요. 백반집도 아니고요.
촬영한 요양원 건물 아래에 중국집이 있었어요(웃음). 저희 때는 통상적으로 외출하면 가장 많이 먹는 게 짜장면 아니었나 싶어요. 가장 보편적이면서 편하게 가는 곳이 중국집이었던 거죠. 거기에 약간의 영화적 장치라고 하면, 밥은 떠먹잖아요. 짜장면은 비벼야 하고요. 아버지가 헛헛한 마음에 짜장면을 못 비비는 모습을 딸이 보고 ‘내가 비벼줄게’하면서 감정이 터지는 걸 생각했어요. 그래서 중국집이 이상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에 흡입력이라고 할까요, 몰입감이 대단하더라고요. 화면도 안정적으로 느껴지고요. 카메라가 픽스(카메라를 고정한 상태)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컷 사이즈도 클로즈업보다는 인물에서 좀 떨어져 있고요. 이렇게 찍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대 어이가리>를 찍으면서 영화에서 다섯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절제, 여백, 빛, 소리, 관조 이렇게 다섯 개죠. 사실 대변도 나오고 여러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 모든 걸 타이트하게 클로즈업하기보다는, 멀리서 관조하듯 보여주는 컨셉을 잡은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호숫가 장면은 멀리서 찍었지만, 우측 공간을 비워두기도 했어요. 관객에게 생각할 여백을 주려고요. 영화로 설명하지 않으려 절제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그냥 보고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요. 또 영화에 유독 밤에 찍은 씬이 많은데, 조용한 가운데서 빛이란 것이 주는 의미가 있으니 그 모든 컨셉을 기획 단계부터 가지고 갔던 겁니다.
치매는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잠식합니다. 영화에서는 처음엔 남편, 그다음엔 딸의 가정불화까지 생기죠. 그런데 영화는 치매 환자를 둔 가족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안락사죠. 평생을 꽃처럼 살고 싶었던 엄마가 남편에게 딸에게 죽음을 부탁하는 거죠. 안락사에 대해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저는 크리스천이에요. 기독교에서는 죄라고 여기죠. 그럼에도 영화를 만드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조금 다르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태어나는 건 자신의 선택이 아니죠. 그런데 살다가 치매에 걸려 아이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모르고 산다면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정말 고통스러워서 하루를 살기가 힘든데, 연명하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주변에서도 그런 사례를 종종 봤는데,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행복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제가 죽음을 생각하고 대했던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사해 보니 실제로 이런 사건들이 참 많더라고요. 남편이 치매에 걸린 부인을 죽이고, 딸을 죽이는 일들이요. 얼마나 소중한 가족인데, 그런데 돌보는 입장이든 본인의 입장이든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니,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 말미도 해석을 관객들에게 열어둔 측면도 있고요
존엄한 죽음의 모습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또 죽음을 대하는 가족, 주변인의 모습은 어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해요.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면, 사실 죽음이란 것이 존엄하다는 건 굉장히 힘든 말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누구라도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사람이 있나요? 하나도 없을 겁니다. 본인도, 지켜보는 주변인과 가족에게도요. 제가 죽음에 대해 감히 존엄하다 성스럽다고 말하기도 죄송스럽고, 제 입으로 표현하기 쉬운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화가 장례식에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시선이 달라졌어요. 오프닝 시퀀스의 장례식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시선으로 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례식에서 그 아이는 온몸으로 절절하게 죽음을 경험하죠. 수미상관 형식을 취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했어요. 오프닝에서는 상여가 집 밖으로 나가고, 엔딩에서는 카메라가 상여를 지나가죠. 죽음의 의미도 다른 모습입니다. 동혁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축제와도 같은 죽음과, 살다가 당한 죽음은 완전히 다른 거죠. 그것이 현실입니다. 상여가 나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는 것은 의미 자체가 달라지니까요.
<그대 어이가리>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살짝 탄생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요.
사실 영화 버전이 2개입니다. 해외 영화제에서는 딸이 엄마의 죽음을 보면서 외면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국내 개봉 버전에서는 딸이 엄마를 찾으러 나갑니다. 나머지가 사실 상상이고, 그러고 나서 딸이 미안하다고 하죠. 그런데 배급팀과 홍보팀과 회의 중에 우리 정서에서 아무래도 엄마가 죽는데, 그걸 어찌 외면하겠나 싶냐는 의견이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 장면을 덜어냈어요. 어쨌든 딸이 임신해서 초음파 사진을 보는 장면이 있잖아요. 탄생이 분명 있는 영화입니다. 굳이 강조를 안 했을 뿐이고요.
해외에서 먼저 호응한 영화입니다. ‘해외영화제 51관왕’이란 타이틀을 차지하셨어요.
사실 칸 영화제같이 큰 영화제는 아니고요(웃음). 기술 시사를 처음 했을 때 반응이 참 좋았어요. 의견을 듣고 최종본을 편집했습니다. 해외 영화제 리스트가 있는 ‘필름웨이’라는 사이트가 있어요. 칸 영화제 빼고는 거의 모든 해외 영화제들이 모여 있는 사이트입니다. 최종본을 여기에 제출한 거죠.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연락이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공식 선정이 되었다고요. 코로나19 때문에 대부분 온라인으로 열려서 좀 안타깝긴 했죠. 온라인 영화제는 오프라인 영화제처럼 일주일씩 하지 않고 이틀 만에 끝나요. 속도가 빠른 거죠. 거의 일주일에 두 개씩 상을 받은 건데요.
사실 51관왕도 의미가 있지만, 제50회 남부영화예술아카데미영화제에서 6관왕(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남우·여우주연상, 촬영상)을 받았고요, 몇 개월 뒤 파이브콘텐츠국제영화제에서는 수상 카테고리에 있는 11개 전 부문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뭔가 잘못되었나 해서 문의를 했는데, 정말 다 받았더라고요. 또 오대양육대주의 영화제에서 골고루 상을 받은 것도, 그런 것들이 의미가 있었죠.
감독님은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나요?
전혀 아니라고 하면 교만한 대답이겠죠. 영화를 본 지인들이 그러더라고요. <그대 어이가리>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모습과 창 그리고 죽음이 잘 어우러져 있다고요. 죽음이란 건 동서양 공통적인 화두이니, 반응이 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죠. 하지만 영화제 규모를 떠나서 이렇게 많이 사랑해주실 거라고 생각은 못 했습니다. 공식 초청받은 영화제까지 하면 75개 정도 되니까요.
어떤 이유로 해외에서 박수를 보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피렌체한국영화제에 초청을 받고 가서 관객 반응을 보고 알았어요. 극장에서 영화를 트는데, 영어 자막이 있고, 그 아래 이탈리아어 자막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딱 보니 이탈리아어 자막이 반 박자 늦는 거예요. 대사 나오고 바로 나와야 하는데, 0.1초씩 늦으니 싱크가 안 맞는 거죠. 아, 이거 큰일이구나 싶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치는 겁니다. 울면서 객석을 떠나는 관객도 많았어요. 불이 켜지고 극장 밖으로 나왔는데, 아 글쎄, 복도에 관객들이 가득한 거예요. 집에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때 느꼈죠. 아, 정서라는 건 동서양이 다른 것이 없구나 하고요. 그때 이후로 이 영화가 해외에서도 반응이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영화감독의 꿈은 언제부터 꾸신 건가요?
일곱 살 때부터요.
아니, 이 질문하면 감독님들이 보통 중학생쯤으로 이야기하시는데, 너무 빨랐던 거 아닌가요?(웃음)
제가 금산 출신이에요. 아버지께서 인삼 농사를 지으셨는데요, 추석이 되면 인삼을 팔러 금산시내로 나갔죠. 아직도 기억이 나요. 일곱 살에 아버지 따라 금산시장에 간 일이요. 아버지는 장사를 하셔야 하니, 저를 친구분 구둣방에 맡겨두셨거든요. 마침 구둣방 앞에 극장이 하나 있었어요. 거길 마치 홀리듯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겁니다. 그때 상영하던 영화가 <대부>(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3)였어요. 그러고는 기억이 없는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보통 극장에 가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가 되겠다, 출연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너는 저런 걸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 하셨어요. 어린 나이에 충격을 많이 받았던 거 같습니다. 그 강렬함이라는 것이요. 그 후로 저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죠. 중학생 때부터는 시나리오도 써보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지만요.
영화 공부는 본격적으로 어떻게 하셨나요?
영화학과로 진학했습니다. 사실 사연이 좀 많습니다. 서울 반포동 작은아버지 댁에 얹혀살았어요. 작은아버지가 당시 좀 큰 회사의 임원이셨어요. 보수적이셨죠. 그런데 시골에서 올라온 조카가 영화를 공부한다고 하니 마뜩잖으셨나 봐요. 매일 ‘딴따라’라고 뭐라 하시니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습니다. 결국 한 학기 다니고 군대를 갔습니다. 그리고 복학하지 않고 다른 대학을 갔어요. 젊은 시절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방황하게 했다는 생각에 한 20년간 만나지도 않고 지냈습니다. 그러고는 우리나라 최대 기업에 입사해서 오래 일을 했어요.
대기업에 입사했는데, 어떻게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올 결심을 하신 거예요?
12년을 일했습니다. 원래는 그렇게 오래 다닐 생각이 없었죠. 3년 정도 일해서 돈 좀 벌면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죠. 그런데 현실이 안 그렇잖아요. 저는 목표가 너무 뚜렷하다 보니까, 오히려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거예요. 인사고과에서 맨날 최고 등급을 받았죠. 동기들은 평사원, 주임, 대리, 과장, 차장 달려면 10년 아니 그 이상이 걸리는데, 저는 4년 만에 다 했어요. 특진이었죠. 지점장까지 되어서 관리도 해야 하니 책임감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죠. 언제 그만둬야 할까 고민하는데, 부장 진급이 다가왔습니다.
그때가 몇 살 때였나요?
30대 후반이었던 거 같아요. 부장이 되면 본사에 올라가서 일을 해야 했어요. 영화라는 건 한 10년은 투자해야 뭔가 성과물이 나올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나름 계획을 세운 후, 가족에게 알렸죠.
반대가 심했을 거 같아요.
물론이죠. 회사에도 말리고, 주변 친구들도 다 말렸어요. 아이도 있는데, 집사람도 너무 힘들어했고요. 그런데 그때가 아니면, 나는 앞으로 영원히 영화를 못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트레스도 너무 많았기에, 내가 살자고, 살기 위해서 영화를 해야겠다고 설득해서 2009년에 퇴사하고 영화판으로 왔습니다.
직장생활만 하셨는데, 영화판에 아는 사람이 있었나요?
다행히 재직했던 기업 계열사에 큰 엔터 업체가 있었어요. 거기에 사람들을 소개받고, 제가 썼던 시나리오를 가서 보여주고 했죠. 다행히 1년 만에 피드백을 받았어요. 배급의향서라는 게 있는데, 그게 있으면 투자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시작했던 영화가 회사 대표 사정이 생기면서 엎어졌고, 결국 7년이 지난 후 2016년에 <트릭>으로 장편 데뷔를 했습니다. 물론 그전에는 무수히 단편을 찍었고요(웃음).
따로 영화 공부는 어떻게 하셨어요?
예전에 대전에 살았어요. 당시 박철수 아카데미가 생기면서 틈틈이 다니면서 박철수 감독님께 어깨너머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로는 전문적으로 영화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직장 생활을 해야 하니까요.
정말 고된 길을 걸어오셨네요. 감독님들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서인지 더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겨요. 이번에 <그대 어이가리>로 51관왕 하시고, 주변에서 축하 인사 많이 받으셨죠?
참 재미있는 게요. <그대 어이가리>가 화제가 되고, 개봉을 앞두면서요. 제가 대학생 되고 영화 한다고 했을 때 그렇게 뭐라 하셨던 작은아버지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영화 보러 가도 되느냐고요(웃음). 저는 사실 20년간 연락도 안 하고, 어찌 보면 의절하고 산 거죠. 물론 그 덕에 제가 대기업에서도 오래 일했고, 경험도 쌓은 거라고 생각하면, 지금이야 용서가 되긴 하지만요. 스무 살 때의 저는 멘탈이 약했던 거죠. 나이도 어리고 그냥 하고 싶다는 목표만 있었지, 겁이 많이 났던 거 같기도 하고요.
영향받은 감독이나 좋아하는 감독은 누구인가요?
꼽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당연히 많죠. 외국 감독 중에서는 다르덴 형제입니다.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감독이죠. 우리나라 감독은 너무 많은데요(웃음). 당연히 봉준호 감독님, 박찬욱 감독님을 너무 존경합니다. 정말 배우고 싶은 감독님입니다.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인가요?
제 삶입니다. 생명과 같은 거로 생각합니다. 영화 외에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영화판에 온 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중간에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그런 일들을 다 겪으면서도 단 한 번도 영화 외적인 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나리오도 계속 쓰고 있고, 계속 영화를 보는 게 저의 생활이고 현재 삶이에요.
차기작은 어떤 걸로 준비하고 있으세요?
감사하게도 제가 시나리오를 써놨던 게 좀 많습니다. 그래서 드라마 쪽에서 진행 예정인 게 하나 있고요. 피렌체에서 찍을 시나리오를 써둔 것도 있어요. 만약 드라마 계획이 좀 늦어지면, 올 하반기에는 피렌체에서 영화를 찍을 생각이에요. 한 투자사와 사극도 논의 중이에요. 민초들, 의병들의 실화 바탕으로 한 역사 이야기인데, 배우 캐스팅만 잘 되면 내년에 들어갈 계획이고요.
앞으로 어떤 영화를 찍고 싶으신가요?
제가 잘하는 건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인 거 같아요. 또 어떻게 인생을 잘 살고, 잘 죽을까 하는 이야기겠죠. 그런 이야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음 일단 영화를 보시면, 다른 건 모르지만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가치관은 확실히 정립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대 어이가리>는 주변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좀 더 사랑을 베풀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바쁘시겠지만, 많이들 극장에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