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빠른 두뇌 회전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 ‘샤퍼.’ 극의 서문을 여는 이 정의가 앞으로 펼쳐질 두뇌 싸움을 예고하는 듯하다. 게다가 시놉시스에 따르면 ‘무자비한 조작과 앞뒤를 가리지 않는 파워 게임’이 펼쳐진다고 하는데. 과연 <샤퍼>는 화려한 수식어에 걸맞은 재미를 선사할까?

애플 tv+ 오리지널 영화 <샤퍼>는 노련한 사기꾼 맥스-매들린 듀오와 이들의 장기 말인 산드라와 톰의 이야기로 축약할 수 있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의 제목에는 캐릭터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톰, 산드라, 맥스, 매들린 순으로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산드라의 챕터로 매듭을 짓는다.


사냥꾼, 사냥개, 사냥감

<샤퍼> 포스터

이야기는 산드라가 지도 교수에게 선물할 책을 구하기 위해 톰의 서점에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서점 주인 톰은 지적이고 활달한 산드라에게 운명적인 끌림을 느낀다. 데이트를 신청하지만 거절당하는 톰. 그러나 이내 산드라가 마음을 바꾸고 데이트에 응하면서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우울증을 앓고 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진 톰에게 산드라는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산드라가 수심 어린 얼굴로 고민을 털어놓는다.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35만 달러, 한화로 약 4억 5천만 원 상당의 빚을 진 것. 괴로워하는 연인을 위해 톰은 어머니의 유산을 털어 대신 갚아주겠다고 말한다. 동생을 외면할 수 없던 산드라는 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35만 달러를 건네는 날, 톰과 산드라는 첫 데이트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그날 저녁, 톰이 애타게 기다려도 산드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펼쳐진 챕터 2에서 산드라의 과거가 드러난다. 앞선 챕터 1에서 대학원생으로 소개된 산드라의 실제 정체는 마약 중독자였다. 출소 이후에도 마약에 손을 대 직장에서 해고되고 다시 감옥에 들어갈 위기에 처한 산드라. 그런 그에게 의문의 남성 맥스가 머물 거처와 생활비를 제공하겠다고 손을 내민다. 조건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이란 인상을 주는 것. 수개월에 걸친 훈련을 통해 산드라는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는 박사생으로 거듭난다. 그렇다. 맥스는 산드라를 완벽한 톰의 이상형으로 탈바꿈시켰다. 맥스는 사냥꾼, 산드라는 길들여진 사냥개라는 진실이 챕터 2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최종 목표는 따로 있다. 맥스와 그의 오랜 파트너 매들린은 톰의 아버지이자 억만장자인 리처드 홉스를 노려왔다. 매들린이 리처드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면 톰이 방탕한 아들로 등장해 조용히 사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계획이다. 하지만 리처드의 사랑이 당초 예상보다 크자 매들린은 계획을 수정한다. 원래는 돈을 뜯어낸 뒤 둘이 도주할 예정이었지만, 매들린은 아예 리처드의 법적 부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정체가 탄로 날 것이라는 맥스의 경고에도 매들린은 자신만만하다. 이제 매들린은 리처드가 사망할 경우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 톰을 치우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착수한다.


너무 긴 캐릭터 빌드업

신분을 위조해서 속이는 대표적 영화에는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도덕성이 결여된 자들이 사기 공조를 펼치는 영화에는 <오션스 일레븐>이 있다. 그러나 <샤퍼>는 앞선 영화들과 결이 다르다. 시각적으로 화려한 트릭을 선보이지 않고 오락적인 재미도 크지 않다. 그보다는 캐릭터의 매력에 의존하면서 잔잔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 빌드업에 너무 긴 러닝타임을 할애한다. 챕터 1은 톰을, 챕터 2는 산드라를, 챕터 3는 맥스를 설명한다. 아직 본격적인 사건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50분이 지났다. 심지어 포스터 중앙에 있는 줄리안 무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상태다. 활력을 불어넣을만한 액션이나 유머도 전무해서 극의 온도도 낮게 형성된다. 본격적인 게임이 펼쳐지는 중후반부까지 관객을 붙잡아 둘 수 있느냐는 관객이 캐릭터에게 설득됐는지에 달린다.


재미를 반감하는 설정과 허점

<샤퍼>가 보여주는 게임은 두뇌 싸움보다는 연극에 가깝다. 게다가 설정에 구멍이 있어 완벽한 연극과 거리가 멀다. <샤퍼>의 핵심은 표적으로 삼은 인물들을 속이는 것인데, 이 과정이 너무 단순하거나 압축돼서 재미를 반감시킨다. 억만장자는 자신의 부를 노리는 여자에게 너무나 쉽게 마음을 열어주고 매들린이 그를 유혹한 과정도 생략됐다. 정확히 몇 년 전인지 모를 과거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외로웠던 빈자리를 마침 매들린이 채워줬다는 설명이 전부다.

그의 외아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버지와 달리 심리적으로 불안하다는 설정이 덧붙여 있기는 하나, 톰 역시 너무나 손쉽게 산드라에게 넘어간다. 이탈리아어를 구사하고 제인 에어 초판본을 소장할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은 톰이 고등학교를 중퇴한 산드라의 얕은 지식을 꿰뚫어보지 못한다니? 심지어 알고 지낸지 고작 몇 주 밖에 안된 산드라에게 수 억 원을 빌려주기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믿고 싶은 것만 믿고 겉모습에 쉽게 넘어가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술집에서 스친 산드라를 고용하는 맥스의 행동은 생뚱맞게 느껴진다. 어떤 사람이든 훈련시킬 수 있는 맥스의 자신감을 보여주려는 의도일까? 하지만 이번 계획에 걸린 돈을 고려하면 치밀함이 떨어지기에 이러한 즉흥적인 행동은 샤퍼라는 맥스의 정체성에 흠집을 남긴다.


<샤퍼>가 가진 의외의 힘, 멜로

<샤퍼>는 누아르 스릴러를 표방하지만 스릴의 고점이 높지 않다. 표적들이 너무 쉽게 당해 위기감을 조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치열한 싸움 끝에 적을 물리치며 터트리는 카타르시스를 <샤퍼>에서는 느끼기 힘들다. 이렇듯 장르적 재미가 떨어진다는 건 <샤퍼>의 큰 약점이다. 하지만 스릴러라는 테두리를 내려놓고 보면 흥미로운 포인트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톰과 산드라의 로맨스다. 챕터 1은 톰과 산드라가 우연히 만나 운명처럼 빠져드는 모습을 그렸다. 이들의 순수하고 달달한 사랑이 관객을 <샤퍼>로 끌어당긴다. 톰과 산드라는 동네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산드라의 아파트에서 문학에 대해 조곤조곤 대화를 나눈다. 밤에는 영업을 마친 톰의 서점에서 친구들을 모아 파티를 열기도 한다. 이렇듯 소박하고 귀여운 커플의 모습은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내고 따뜻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동시에 관객의 경계심을 낮춰 이후 챕터 2에서 밝혀질 진실과 그에 따른 충격을 배가한다.


믿고 보는 줄리안 무어

예상치 못한 발견 브리아나 미들턴

<샤퍼>의 다른 강점은 줄리안 무어의 연기다. 줄리안 무어가 맡은 매들린은 리처드 앞에서는 상냥하고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인이다. 그러나 리처드가 사라지면 곧바로 냉정하고 시니컬한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 전환이 인격을 갈아끼우는 수준이다. 톰과 함께 있을 때도 고상한 어투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그를 처리할지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산드라의 배신에 분노한 톰과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매들린의 동거는 후반부에 흥미진진한 구도를 형성한다. 산드라 역의 브리아나 미들턴 역시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순진한 대학원생과 거친 마약 중독자의 모습을 오가며 거의 두 명 분을 연기한다. 이 영화의 진주 같은 존재다.


시청자의 인내심이 관건

사냥꾼이 치밀하게 훈련한 사냥개를 우리 안에 풀어 넣는 <샤퍼>. 사냥꾼과 사냥개, 그리고 사냥감들의 관계 구도와 반전이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챕터마다 드러나는 캐릭터들의 진실도 놀랍지만 마지막 10분에 밝혀지는 반전이 하이라이트다. 이야기에 설정 구멍이 보이기는 하나, 캐릭터들의 관계성과 매력이 관객을 납득시킨다. 단, 이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긴 러닝타임을 소비한 점이 아쉽다. 1시간가량 이어지는 이 시간 동안 관객이 캐릭터에 몰입하느냐 마느냐가 관람 만족도를 결정지을 듯하다.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