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 카스트로 거리로 이주할 때만 해도, 하비 밀크(숀 펜)는 정치인이 될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그저, 카스트로 거리에는 성 소수자들이 보다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내고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랑하는 남자 스캇(제임스 프랑코)과 함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을 뿐이다. 군인 출신에 학교 선생, 금융회사 연구원, 보험회사 직원을 거쳐온 모범생 하비의 삶에서 이건 가장 큰 일탈이었다.

하지만 카스트로 거리에 카메라 가게를 내자마자 이들을 반긴 건 이웃 상인의 저주였다. “가게를 열면 상인 조합에서 경찰을 동원해서 당신 라이센스를 뺏을 거예요. 이 동네랑 하느님의 법, 이 도시의 법에 의거해서요. 샌프란시스코 경찰도 기꺼이 강제집행할 거요. 좋은 하루 되슈.”

미국 전역에서 가장 성 소수자 친화적이라는 거리에서조차 노골적인 증오와 마주친 하비는, 성 소수자 조합을 만드는 것으로 응수했다. 하비는 특유의 모범생 기질을 발휘해 성소수자들에게 친화적인 가게와 적대적인 가게의 목록을 정리했고, 그 목록을 주변과 공유했다. 상인들은 자연스레 성 소수자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하비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건 하비 자신의 지위 변화였다. 카스트로 구역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낸 하비 주변으로, 자연스레 성 소수자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성애자들도 성 소수자 집단의 규모를 파악하고는 도움이 필요할 때 하비에게 손을 벌렸다. 하비에게는 ‘카스트로 거리의 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여전히, 성 소수자들은 길거리에서 경찰에게 얻어맞고 연행되는가 하면 집에 가다가 칼에 찔려 죽기도 했다. 그 모든 게 가장 성 소수자 친화적인 거리라는 카스트로에서 벌어졌다. 하비는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시 의원에 출마했다. 주류 사회에서 차별과 소외를 경험한 노인들, 블루칼라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낙선을 거듭했지만, 거듭할 때마다 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세 번의 낙선 끝에 1977년 샌프란시스코 시 의원이 되었고, 미국 역사상 최초로 오픈리 게이(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 동성애자) 정치인으로 기록됐다. 동료 의원 댄 화이트(조쉬 브롤린)에게 암살되기까지 11개월 동안, 하비 밀크는 성 소수자 권리 조례를 제정하고, 성 소수자의 권리를 제약하는 법안 ‘프로포지션 식스’를 막아내며, 소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일했다.


2.

미국 최초의 성 소수자 정치인 하비 밀크(1930-1978)의 생을 다룬 전기 영화 〈밀크〉(2008)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그저 행복하게 살 수 있기만을 바랐던 하비가 투사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투사는 날 때부터 투사인 것으로 오인하곤 한다. “게이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학생들을 꼬드겨 멸종을 막으려는 거 아닙니까?”라는 궤변에 “난 이성애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이성애자 선생 밑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러면 나는 어째서 게이가 되었단 말입니까?”라고 맞받아치는 하비는 얼핏 타고난 지도자감처럼 보인다.

하지만 뉴욕에 있을 때만 해도 하비는 ‘뉴욕에서 가장 거대한 옷장’ 안에 숨은 사람이었다. 그게 싫어서 카스트로 거리로 왔을 때에도, 그의 목표는 그저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저 행복하고 싶었을 뿐인데 온 세상이 그의 행복을 부당하게 방해할 때, 하비에게 남은 선택지는 뭐가 있었을까? 고개를 숙이고 행복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게 행복할 수 있길 바라며 카스트로 거리로 이주한 하비에게 전자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처음 스캇이 “이 정치적 행동주의는 다 뭐람? 자기 공화당원 아니었어?”라고 물어볼 때만 해도, 하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사업가야. 고객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해야지.” 맞다. 처음엔 그래서 시작한 거였다. 수학을 전공하고 보험 약관을 설계하고 돈의 흐름을 읽던 사람다운 행보였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알면 알수록 더 잘 보이게 되고 잘 보이게 되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자신의 행복을 바랐을 뿐이었던 하비는 투사가 된다.

사람들은 특정 정치적 주장을 하는 이들을 보며 ‘이슈 파이팅’을 한다고 쉽게 말한다. 하비도 그런 오인을 샀다. 하비의 명성을 질투하던 동료 의원 댄은 술에 취해 하비에게 말한다. “당신 보고 많이 배웠어요. 당신은 각광받을 거예요. 늘 그렇잖아요. 당신한테는 동성애자 이슈가 있으니까. 그게 당신의 강점이죠.” 화제가 될 만한 소재를 잡고 그것으로 정치적 자본을 키우는 거 아니냐는 주장, 어디서 많이 들어본 주장이다.

하지만 댄의 말을 들은 하비는 정색하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댄, 그건 그냥 이슈가 아니야. 내가 지금껏 사귄 사람이 4명이 있는데 그중 세 명이 자살을 기도했어. 내 잘못이지. 내가 숨겨두고 조용히 있으라고 시켰거든. 나도 벽장에 숨어 나약했거든. 그러니까 이건 그냥 일자리 문제나 정치적 이슈거리가 아니야. 우리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개인의 정치적 자본을 키우고 명성을 얻는 건 하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비는, 처음부터 행복해지길 원했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숨기지 않고, 혐오하지 않고, 솔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 평범한 행복을.


3.

오소리(김용민)와 소주(소성욱)는 7년의 연애 끝에 2019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환경에서, 오소리와 소주 부부는 여느 부부가 누리는 법적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신혼부부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도 없었고, 부부 중 한 명이 아픈 상황이 와도 나머지 한 명이 보호자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도 없었다.

둘 중 하나가 아파도 보호자로 같이 하기 어려우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그런데 건강보험에서도 차별을 받는다. 부부 중 한 명이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여도, 나머지 한 명은 피부양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 지역가입자로 분류되니까. 결혼 1주년이 되던 지난 2020년 5월, 고심하던 부부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문의를 넣었다. 직장가입자인 오소리의 피부양자로 동성 배우자인 소주를 올릴 수 있는지. 공단은 ‘사실혼 관계면 가능하다’는 취지의 답변을 보내왔고, 오소리는 피부양자 자격취득 신고를 했다. 소주는 오소리의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됐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의외로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 전향적인 사건이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며 상황은 변한다. 오소리와 소주는 다른 성 소수자 부부들도 이와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언론 인터뷰에 응했는데, 기사가 화제가 되자마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동성 배우자를 피부양자로 등록해 준 건 착오에 의한 실수였다고, 소주는 오소리의 건강보험 피부양자가 아니라 별개의 지역가입자라고, 지난 8개월 동안 누렸던 건강보험 혜택만큼 돈을 납부하라고. 납득할 수 없었던 오소리와 소주는 2021년 소송을 시작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손을 들어준 1심 재판부와 달리, 항소심 재판부는 오소리와 소주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사실혼과 같은 생활공동체 관계”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사회보장제도의 취지를 보았을 때, 생활공동체 내 직장가입자에게 생계를 의지하는 이의 건강보험 수급권을 “성적 지향만을 이유로 차등을 두는 건 평등의 원칙에 반하는 자의적 차별”이라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판결문 말미에 이런 문장을 덧붙였다. 칼럼이 길어질 걸 각오하고 인용해본다.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

오소리와 소주도 투사가 되고 싶어서 이 싸움을 시작한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행복해지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들일 테다. 마치 하비 밀크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끈질긴 싸움이 저 단단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끌어냈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나는 판결문을 들여다보며 울컥하다가 〈밀크〉를 다시 떠올린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을 투사로 만드는 세상을, 그리고 그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숭고함을 생각한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