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탄생은 쉽지 않다. 작품을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듯 만들 수 있도록 해주는 환경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귀한 골동품이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고물인 것처럼,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히트작이 수많은 거절을 받다가 간신히 제작에 착수한 사례들이 있다. 인기작, 명작 소리를 듣지만 많은 거절 끝에 제작될 수 있었던 드라마들을 모았다.


기묘한 이야기

많은 방송국→넷플릭스

넷플릭스의 견인차, 대들보, 대박의 주역. <기묘한 이야기>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모자랄 만큼 인기를 끈 시리즈이다. 1980년대 인디애나주 호킨스에서 한 아이가 실종되고, 초능력을 가진 소녀가 나타나며 시작되는 드라마는 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와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즌 4까지 이어진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들지만, (최소 15곳 이상의) 수많은 방송국에서 <기묘한 이야기>의 제작을 거절했다. 쇼러너(드라마의 주요 제작자) 더퍼 브라더스는 '주인공을 성인으로 바꾸자' '어린이들이 주인공이니까 좀 더 어린이에 맞는 이야기로 전개하자'는 방송국 측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그게 <기묘한 이야기>의 핵심 컨셉을 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기묘한 이야기>는 수많은 곳을 떠돌다가 넷플릭스에 안착할 수 있었다. 결과는 보다시피 플랫폼의 성장까지 이끈, 그야말로 '게임 체인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밀리 바비 브라운, 핀 울프하드, 게이튼 마타라조, 케일럽 맥러플린, 찰리 히튼 등 청소년 스타들을 탄생시킨 건 말할 것도 없다.


브레이킹 배드

많은 방송국→AMC

“미드 추천 좀” 하면 무조건 나오는 <브레이킹 배드>는 폐암 진단를 받고 아내와 선천적 뇌성마비 환자 아들을 위해 결국 마약 제조에 손 댄 화학교사 월터 화이트의 이야기다. 참신한 설정과 시청자들을 들었다놨다 하는 전개로 마지막 시즌 5까지 걸작이란 극찬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 드라마 역시 제작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대부분은 마약을 제조하는 교사라는 주인공의 설정을 꺼려 했고, 타 드라마와 유사해서 안된다는 말까지 들었다(어떤 드라마인지 알 수 없지만 대마 판매에 뛰어든 가정주부가 나오는 <위즈>일 듯하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HBO는 이 드라마의 제안을 받고 거절 의사조차 전달하지 않을 정도로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브레이킹 배드>는 방영 시작부터 엄청난 화제를 모았고, 그 인기와 훌륭한 완성도는 스핀오프 <베터 콜 사울>까지 이어졌다. 이 드라마를 받아들인 AMC 방송국이 축포를 터뜨리며 파티라도 하지 않았을까.


워킹 데드

HBO, NBC→AMC

AMC의 승리 스토리는 하나 더 있다. <워킹 데드>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워킹 데드>는 좀비로 뒤덮인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다. 좀비야 영화에서 이미 써먹을대로 써먹은 소재인데, <워킹 데드>는 협력을 하든 배신을 하든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내세워 시청자들을 끌어들였다. 2010년 첫 방영을 시작해 2022년까지 총 시즌 11까지 이어졌고, 이후에도 인기 많은 캐릭터 중심의 스핀 오프까지 만들고 있다(물론 하락세를 보인 시즌 8부터는 애증의 시청자가 폭증했지만). <워킹 데드>는 HBO, NBC에 제작을 받았으나 두 방송국 모두 난색을 표했다. 폭력 수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두 방송국은 제작진에게 수위를 낮춰주길 제안했지만 제작진은 그 부분을 포기할 수 없어 다른 방송국을 찾았다. 그렇게 <워킹 데드>는 AMC 방송국의 간판 프로그램이 되는 첫 발을 내딛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노만 리더스, 스티븐 연, 존 번탈, 앤드류 링컨, 다나이 구리라 등이 인지도를 얻고 스타로 발돋음했다.


릭 앤 모티

많은 방송국→어덜트 스윔

미쳤다. 이상하다. 그런데 인기도 있다. 애니메이션 <릭 앤 모티>는 미치광이 과학자 릭과 그의 소심한 손자 모티의 모험을 그린다. 시간여행을 하고 행성을 오가는 등 스토리만 보면 SF 어드벤처의 색이 강하지만, 툭하면 섹드립에 욕설에 신체가 훼손되는(!) 장면이 이어지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다. 드라마 <커뮤니티>로 유명한 댄 하몬과 애니메이터 저스틴 로일랜드가 힘을 합쳐 완성한 괴랄하기 짝이 없는 애니메이션. 단편영화제 '채널101'에 출품한 저스틴 로일랜드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본 댄 하몬이 시리즈로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 시리즈의 출발점. 이렇게 '약 빤' 시리즈 제작에 선뜻 나서줄 방송국이 얼마나 있겠나. 결국 '어덜트 스윔'에서 방영을 확정지어 우리가 <릭 앤 모티>를 만날 수 있게 됐다. 뭐, 지금은 저스틴 로일랜드가 가정폭력 혐의로 하차하면서 다음 시즌이 제대로 나올 수나 있는지가 문제지만.


소프라노스

많은 방송국→HBO

단순히 '인기작'을 넘어 '미국 드라마 역사에 남을 걸작'이란 극찬까지 받는 <소프라노스>는 지역 마피아 부두목 토니 소프라노를 주인공으로 한다. 마피아 일과 가정불화에 스트레스를 받던 그는 어느 날 의식을 잃고, 이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촘촘한 각본과 배우들의 열연으로 시즌 6까지 이어진 이 드라마는 HBO가 아니었으면 좌초될 뻔했다. 방송국 대부분은 이 드라마 제작을 거절했고, 그나마 호의적인 CBS마저 '정신과 상담 부분이 불필요하다'며 해당 부분을 줄이자고 제안했다. 쇼러너 데이비드 체이스는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런 식으로 각본의 일부분을 삭제하는 일을 자주 겪었기에 <소프라노스>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원하는 각본을 최대한 반영하기로 약속한 HBO는 <소프라노스>로 명작 미드 방송국의 명성에 날개를 달았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 HBO는 드라마 <매드맨> 기획을 듣고 '데이비드 체이스가 참여하면 제작함'이라고 조건을 걸었는데, 이미 <소프라노스>로 드라마 업무에 지킨 체이스가 거절하면서 <매드맨>은 AMC로 넘어갔다고 한다.


빅뱅 이론

CBS

너드'미'가 아니라 그냥 너드들의 일상을 그린 시트콤 <빅뱅 이론>은 여기에 서술한 사례 중 가장 독특하다. <빅뱅 이론>은 CBS 방송국에게 거절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CBS는 <빅뱅 이론>의 파일럿 기획까지 함께 하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럼 왜 거절당한 사연에 들어가나 싶은데, 파일럿 기획대로 하지 않고 완전히 갈아엎었기 때문. 최초의 <빅뱅 이론>은 너드 '사내'들의 이야기가 아녔다. 드라마의 주역엔 케이티와 길다라는 두 여성이 있었다. 그러다 CBS가 '이건 좀…' 하면서 시리즈 기획 전체를 갈아엎자는 제안을 했고 제작진도 이를 받아들여 인물 구성을 완전히 다시했다. 그렇게 추가된 인물이 <빅뱅 이론>의 라제시, 페니, 하워드다. <빅뱅 이론>의 성공은 CBS의 구버전 거절에서 비롯된 셈이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