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귀여운 고양이만 영화에 나온다

동물을 소재로 한 영화는 자주 접할 수 있다. <내 어깨 위 고양이 밥>(2016)이나, <하치 이야기>(2009)부터 3월 1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차태현, 유연석 주연의 <멍뭉이>(2023)까지 동물은 줄곧 영화 속 흥미로운 소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스크린 위에 등장할 수 있는 동물의 종류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귀여운 외양으로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아니면 영화의 소재가 되긴 어렵다. 특히, 소, 돼지, 닭, 당나귀처럼 인간에 의해 수탈을 겪는 가축의 경우,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아니라면 영화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기 어렵다. 이는 수많은 영화가 동물을 활용하는 방식이 여전히 도식적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동물은 귀엽거나 독특한 외양을 통해, 대상화되는 캐릭터에 머물고 만다.

꼬마 돼지 베이브도 사실 꼬마라서 영화에 나올 수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동물이 아닌, 동물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풀을 뜯어 먹거나, 사료를 쪼아 먹는 삶. 방목되어 들판 위를 뛰놀거나, 좁디좁은 사육장 울타리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 노쇠할 때까지 밭을 갈고 수레를 이끌거나, 영문도 모른 채 도살장에서 한 덩이의 고기로 죽임당하는 삶. 가축이 영위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의 삶은 한정된 자유와 완전한 구속뿐이며, 두 갈래의 생애 끝에는 죽음이 서려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과연 인간의 시선에서 동물의 시선으로 내려가는 일은 가능할까? 적어도 오늘 소개할 네 작품은 그 시도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EO> Dir.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영화 <EO>

폴란드의 거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영화 <EO>(2022)는 지난 2022년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당나귀의 이름 ‘EO’는 그저 그의 울음소리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EO’는 애정을 담아 부여된 이름이 아니다. 그저 강아지를 ‘멍멍이’, 고양이를 ‘야옹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EO’의 곁에는 그를 무척이나 사랑해 준 서커스단의 무용수 카산드라(사만다 드지말스카)가 있었지만, 서커스단은 파산과 동물 보호단체에 의해 해체되고, EO는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승마장과 농장, 동물보호소와 불법 동물 거래 트럭, 축구장과 성당을 가로지르는 EO의 여정에는 수많은 사람이 스쳐 간다. 훌리건과 의사, 농부와 소방관, 성직자와 무용수 그리고 사냥꾼들은 EO가 그 여정에서 발견한 존재들이다. 그는 산을 건너고, 마을을 가로지르며, 계곡과 쓰레기장을 거쳤고, 이름 모를 차량에 여러 번 올라타기도 했다. 끊임없이 거처를 떠나는 EO가 끝내 당도할 곳은 어디였을까?

영화 <EO>: 이 장면을 반드시 극장에서 보길 바란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EO>는 당나귀 ‘EO’의 여정을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볼 수 없는 세계로 가득하다. <EO>의 오프닝은 강렬한 숨소리와 함께, EO와 카산드라의 몸을 붉은 조명 아래에서 비춘다. 이후에도 <EO>에는 붉은 조명 아래에 순환하는 승마장의 말과, 드론 캠으로 촬영한 붉은 산, 과거 회상 장면 등 붉은 색상의 화면이 가득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붉은빛은 당나귀가 절대 볼 수 없는 빛이다. EO의 여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가 보지 못한 세계 속에서 좌절하거나 방황하거나 행복하게 웃는다. 하지만, 당나귀 EO는 여전히 어떤 감정 변화 없이 아무도 모르는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EO>는 당나귀 EO의 마음을 표현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곁에 놓인 장소와 사람이 그를 규정하려 들 뿐이다. ‘EO’는 진정 무엇일까?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는 이 질문의 답을 위해 기나긴 여정을 떠났다.


<당나귀 발타자르> Dir. 로베르 브레송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 틸다 스윈튼이 꼽은 최고의 연기

앞서 언급한 <EO>는 사실 1966년 개봉한, 프랑스의 거장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다. 실제로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는 <당나귀 발타자르>의 현대적 해석을 시도하려 했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마성의 매력을 가진 배우 틸다 스윈튼 역시 브레송의 열렬한 팬으로,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연기가 <당나귀 발타자르>에 나오는 당나귀의 연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EO>가 당나귀 EO를 둘러싼 공간의 여정을 다뤘던 것처럼, <당나귀 발타자르>는 한 농장의 아이에게 사랑을 받던 당나귀 ‘발타자르’가 여러 주인의 손에 넘겨지면서 가혹한 삶을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다. EO는 주체적으로 그 몸을 움직여 여정을 이어 나간 존재라면, 발타자르는 일종의 거래 대상이 되어 소유물로 전락한 존재다. 하지만, <EO>와 마찬가지로 당나귀 발타자르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허망한 눈으로 새로이 바뀌는 주인을 바라볼 뿐이다.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 브레송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손

로베르 브레송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 중 하나인 ‘손’은 <당나귀 발타자르>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한다. 주인공이자 소유물인 당나귀 발타자르는 끊임없이 거래된다. 이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손에서 손으로 소유권을 넘기는 과정이다. 농장 여인에게서 학대하는 남성으로, 학대하는 남성에서 빵집 주인으로, 빵집 주인에서 서커스단으로, 그리고 다시 쟁기를 끌기 위한 농부의 손으로. 분명히 살아 움직이고 먹이를 먹으며, 감정을 느낄 줄 아는 당나귀 발타자르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끈에 매여 다른 존재의 손에 넘어간다. 정적인 카메라와 달리 발타자르의 생애는 등락으로 가득하다. 서커스단에서 관객들의 환희를 받자마자, 그는 허름한 농가에서 쟁기를 끌고 다닌다. 젊은 여인의 사랑을 받았던 발타자르는 그녀를 죽인 애인의 학대로 모진 매질을 당한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초연한 눈으로 그저 다가오는 생을 받아들인다. 무표정의 당나귀 발타자르의 눈빛은 성자의 숭고함을 떠올리게 한다.


<군다> Dir.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영화 <군다>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는 돼지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다면, 가축도 반려동물도 전부 자연의 삶을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노르웨이의 다큐멘터리 감독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군다>(2020)는 평화로운 가축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돼지, 소, 닭. 인류가 가장 많이 소비하는 세 가지 가축들도 인간의 개입 없는 세상에서는 단지 평온한 하루를 보내는 생명체일 뿐이다.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어 콧잔등에 앉으면 신기하게 바라보며 나비를 쫓고, 사랑하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몸을 뉘는 그런 일상만이 이 영화에 가득하다.

영화 <군다>: 닭들도 날 수 있다.

<군다>는 다른 동물권을 제창하는 영화들과 달리 인간의 개입을 엄격히 금한 채로 가축들의 일상만을 조명한다. 하지만, 한가롭다 못해서 여유로운 이들의 일상은 사실 낙농업 농장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즉, 영화관을 벗어나는 관객은 이 동물들의 최후를 알고 있다. 언젠가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 죽음을 맞을 것이다. 털은 모두 뽑히고, 가죽은 제거된 채로, 한 덩이의 고기가 되어 누군가의 식탁 위에 오를 것이다. 잔혹한 도살의 장면 하나 없이 이 영화는 이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현실의 삶을 암시한다. 기계와 인간의 손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게 만든다. 이들의 삶이 지속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군다>는 그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동시에, 그들을 죽음으로 모는 요소를 보이지 않음으로 그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카우> Dir. 안드레아 아놀드

영화 <카우>: '루마'의 삶은 가혹하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군다>가 인간의 개입 없는 가축들의 삶을 그려냈다면, <카우>(2021)는 인간의 손안에서 좁은 공장식 사육을 당하는 젖소 ‘루마’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폭풍의 언덕>(2011), <피쉬 탱크>(2009),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2016) 등으로 평단의 관심을 모은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다큐멘터리 <카우>는 서늘하다. 배경음악 하나 없이, 루마의 젖을 착유기에 강제로 욱여넣는 인간의 손을 그린다. 우유를 만들기 위해 루마는 임신을 반복한다. 루마의 삶은 착유-임신-착유-임신의 연속이다. 그녀는 평생을 우유를 생산하고, 새끼를 낳을 뿐이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어미를 보지도 못한 채 강제로 분리된다. 그런 루마에게 허락된 유일한 쉼은 아주 잠깐, 근처 목초지를 배회하며 뛰노는 것이다.

영화 <카우>: 그녀는 갇혀 산다.

<카우>는 동물의 시선을 유념하고 만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루마가 바라보는 ‘시점 숏’은 부재한 영화다. 그녀의 시선에 카메라를 맞추거나, 그녀가 무언가를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는 반복적으로 수탈당하는 루마의 육체와 지친 그녀의 얼굴만이 남아있다. 자식과 분리되는 순간, 루마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동요하기 시작하는 장면은 가슴을 메이게 만든다. 하지만, 안드레아 아놀드는 절대로 루마가 대상화되기를 거부한다. 루마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마치 낙농업자가 그녀를 수탈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저 루마가 루마로 남기 위해서는, 서늘하고 반복적이며 피로와 고통으로 가득한 그녀의 삶의 곁에 머무는 수밖에 없다. 부디 이 영화의 마지막을 끝까지 보길 바란다.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