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을수록 인류에 대한 낙관을 유지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뉴스를 볼 때마다 흉흉한 소식이 넘실거리는데, 무슨 근거로 인류를 낙관할까.

뉴스는 학교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도 전학 조치에 불복해 재심을 청구하고 시간을 질질 끄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처벌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뉴스는 새로운 시대의 장난감으로 여겨지던 인공지능 채팅 프로그램 뒤에, 케냐의 노동자들이 시간당 2달러 미만의 급여를 받으며 폭력적인 키워드를 걸러내는 작업을 담당하는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뉴스는 한반도 남부 지역이 두 달 가까이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아 몹시 가물었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아마존 유역을 지키는 브라질 원주민들이 콩과 소고기를 위해 땅을 침범하는 외부인들에게 살해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소고기 때문에 죽어가는 브라질 원주민들의 소식을 들은 직후 품질 좋은 소고기로 만든 패티를 자랑하는 햄버거 광고를 보는 일은, 확실히 버겁다.

이렇게 한나절 뉴스를 듣다 보면, 인류는 존속하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낫겠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때마침 지난 2월 22일 발표된 대한민국의 2022년 합계출산율은 0.78명. 남들은 재앙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이게 가장 합리적인 결론인지도 모른다. 불행과 파괴가 예정되어 있는 세계로는 다음 세대를 초대하지 않겠노라 결심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 아닌가.

이렇게 인간이 싫어질 때면 나는 〈모노노케 히메〉(1997)를 본다. 나보다 더 오래, 나보다 더 치열하게 인간을 회의했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 작품이라 생각하고 만들었던 이 작품은, 영화의 반절을 쪼개어 인간을 회의하는데 할애한다.

미야자키가 바라본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은 지옥도다. 인간들은 제 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산을 불태우고 야생동물들을 죽인다. 갈 곳 없는 낭인들은 논밭 한복판에서 칼을 휘두르며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고, 승려라는 자들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사슴신을 죽이기 위해 온갖 협잡을 꾸민다. 어린 시절 인간 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들개신 모로(미와 아키히로)의 손에 키워진 소녀 산(이시다 유리코)은 아예 대놓고 인간을 혐오한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들개라고 선언하는 산은, 숲을 불태우고 야생동물을 죽이는 인간들을 증오해 마지 않는다. 기회만 닿으면 타타라 마을의 지도자인 에보시(다나카 유코)를 죽이려 든다.

에보시

이렇게 인간을 한사코 회의하는 미야자키의 태도는 그리 낯선 게 아니다. 사람들은 〈이웃집 토토로〉(1988)나 〈마녀 배달부 키키〉(1989)의 건강하고 발랄한 생명력으로 미야자키를 기억하지만, 의외로 미야자키는 인간에 대해 줄곧 회의적이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에서도 나우시카(시마모토 스미)를 제외한 인간들은 딱히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인간은 기껏해야 불의 7일로 자멸을 초래한 어리석은 종자들이고, 오무떼를 이용해 서로를 절멸시키려는 계획이나 획책하는 자들이다. 〈붉은 돼지〉(1992) 속 포르코(모리야마 슈이치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인간이 아니라 돼지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포르코가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인 쪽이 낫다”라거나, “(애국 채권을 사서 민족에 공헌하는 일 따위는)인간들끼리 많이 하시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미야자키는 인간에 대한 회의를 주체하지 못한다. 세계를 이 따위로 만들어놓은 무책임한 장본인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붉은 돼지〉에서도, 미야자키는 정말 마지못해 간신히 인간을 품는다.

들개신 모로와 산

하지만 진지한 낯빛으로 인간에 대한 회의를 본격적으로 그린 〈모노노케 히메〉에서, 미야자키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멧돼지 신 나고(사토 마코토)에게 저주를 받은 아시타카(마츠다 요지)는 그 저주의 원인인 에보시를 원망한다. 그가 닥치는 대로 산을 불태우고 야생동물을 죽이지만 않았더라도, 인간과 동물은 평화롭게 공존했을 것이고 나고가 재앙신이 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원망이 확신으로 굳어지기 전,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에보시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들려준다. 에보시는 거리에 팔려 나와 원치 않는 성매매를 해야 했던 여인들을 거뒀고, 남들은 더럽다고 외면했던 나병 환자들의 썩은 살을 씻기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에보시가 숲을 불태우는 건, 다른 곳이라면 약자라고 버림받았을 타타라 마을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었다. 에보시에게는 온전히 선인이라 할 수도, 그렇다고 아주 악인이라 할 수도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약탈한다. 에보시가 쇳덩이로 만든 조총과 탄환은 생명을 앗아간다. 하지만 그런 인간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조총을 들고 신이든 조정이든 명이든 다 굴복시키고 싶어 했던 에보시는,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사람답게 살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못나고 구질구질한 존재지만 그래도 나름의 선함이 있고 그래서 꾸역꾸역 살아가고 싶은, 나쁘다고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미야자키는 〈모노노케 히메〉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마지못해’가 아니라 진심으로 인간을 품는다. 미야자키는 인간을 혐오하는 산을 향해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너 또한 결국 인간이라고. 인간을 완전히 사랑하고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가보자고. 마치, 인간에 대해 깊이 회의하던 과거의 자신에게 말하듯 말이다.

아시타카

그래서 영화의 절반을 인간을 회의하는데 할애한 〈모노노케 히메〉의 나머지 절반은, 힘내어 인간을 긍정하고자 하

는 낙관을 향한 의지로 채워져 있다. 멧돼지와 들개 떼와 싸우던 타타라 마을 사람들은, 아시타카가 들개를 구하기 위해 멧돼지의 시체 더미를 뒤지자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들개를 함께 구해낸다. 방금 전까지 죽일 듯이 싸웠던 들개가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구하고자 하는 아시타카의 선량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슴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에보시는, 영화의 결말부에서 사슴신의 생명력을 목격하고는 ‘더 좋은 마을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다진다. 새로 만드는 마을은 아마 조총과 탄환으로 지탱하는 마을은, 아닐 것이다. 미야자키는 은퇴작으로 삼으려던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그 절반의 낙관에 희망을 걸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방금 전까지 싸우던 사람들이 총칼을 내려놓고 힘을 합쳐 더 좋은 공존을 꾀할 수도 있다는 낙관에.

다시 뉴스를 본다. 여전히 인류를 낙관하고 희망을 가지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아마도 미야자키가 맞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복잡하게 후지고 못난 동시에, 복잡하게 긍정할 만한 구석이 있는 존재들일 것이다. 아시타카와 산이 따로, 하지만 함께 살아가기를 약조하는 결말을 보며, 나는 조심스레 인류를 조금은 더 믿어보기로 결심한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