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우리는 여행에서 무엇을 누렸을까. 머무는 곳마다 인증샷을 남기거나 인스타그램에 실시간으로 자랑할 수는 없지만 여행자에겐 지금과 또 다른 풍요가 허락됐는지도 모른다. 계획할 여지가 적기에 경우의 수는 오히려 늘어나고 행운이든 불운이든 일단 모두 끌어안는 수밖에 없다. 사소한 친절에 기대어 하루를 통과하는가 하면 우연이라 여겼던 인연이 필연으로 남기도 한다. <6번 칸>은 그때 그 시절 여행길로 돌아가 어느덧 유물이 되어버린 사랑 이야기를 싣고 달린다. 인터넷과 휴대용 전자기기가 보편화하지 않은 1990년대, 핀란드 출신 유학생 라우라(세이디 하를라)는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로 이동하는 기차에 탑승한다. 고고학을 전공한 그녀는 고대 암각화를 보기 위해 이번 여행을 결심했다. 본래 애인 이리나와 함께 떠나려 했으나 상대가 갑작스레 여행을 취소하는 바람에 혼자가 된 라우라. 일자리를 찾아 북극해 연안 도시로 이주하는 료하(유리 보리소프)도 기차에 올라탄다. 두 사람은 같은 침대칸을 배정받으며 처음 만난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들 곁에 워크맨, 공중전화, 캠코더 등 지나간 시대의 물건들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에 료하가 라우라에게 <타이타닉>(제임스 카메론, 1998)을 봤느냐고 묻는 걸 보면 그들은 현재 새천년을 코앞에 둔 듯하다.
<6번 칸>은 전혀 다른 두 인물이 동행하는 이야기다. 우연히 한배를 타서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을 나눈 타이타닉호의 연인과 마찬가지로, 무르만스크행 기차에 몸을 실은 남녀에게도 이렇다 할 접점이 없다. 라우라는 외국인이고 대학생이다. 육체노동자인 료하에 비해 경제 상황이 나은 편이며 러시아에 얼마나 체류할지 확신할 수 없다. 료하는 흔히 상상할법한 러시아 남자의 전형처럼 보인다. 자리에 앉자마자 보드카를 들이키고 “우리나라는 강해. 나치도 물리쳤고 달에도 갔지”라며 힘을 과시한다. 영화는 인물들의 차이를 강조한다. 그들은 겨우 행선지가 같을 뿐이다. 만 년 전쯤 새긴 암각화라고 해봤자 료하에겐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고작 돌멩이를 보려고 그토록 멀리 가겠다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편, 라우라에게 료하는 사납고 불쾌한 동승객이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대뜸 무르만스크에서 몸이라도 팔 생각이냐고 묻는다. 라우라는 그를 피해 식당칸에서 시간을 때우고 기차 복도에서 서성댄다. 결국 한밤중이 돼서야 객실로 돌아가는데 술에 잔뜩 취한 료하가 아는 체하며 말을 건다. 그는 핀란드어 인사말을 몇 가지 묻더니 뜻밖에도 “사랑해”를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해한다. 라우라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하이스타 비투”라고 일러준다. 사랑 고백이 아니라 엿이나 먹으라는 욕이지만 료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웃는다. 모두 예상하듯 이 장면은 복선이다. 영화가 끝나기 전에 료하는 이 말을 다시 하게 된다.
영화는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을 활용하여 극과 극으로 보였던 두 인물이 가까워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좁고 소란스러운 장거리 열차에서 둘은 물리적으로 떨어지기 어렵다. 라우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중도 하차해 모스크바로 돌아가려 하는데 공중전화를 통해 확인한 애인의 음성은 어쩐지 냉랭하다. 반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이리나에게 대강 둘러댄 후, 라우라는 하는 수 없이 기차에 오른다. 침대칸에는 좌석표를 구하지 못한 여자와 아이들이 앉아 있고 료하는 무뚝뚝하게 그들을 살핀다. 대화는 물론이고 친절을 베푸는 일에도 서툴기만 한 료하를 보며 라우라는 조금씩 경계심을 늦춘다. 기차 안에서 보내는 하루는 기차 밖에서 보내는 일주일과 맞먹는다. 좋든 싫든 24시간을 내리 붙어 있으면서 그들은 서로 관찰할 수밖에 없다. 단지 며칠 만에 아는 것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상대를 향한 감정도 빠르게 변화한다. 페트로자보크에 정차한 밤이 그들 사이에 기점이 된다. 기차엔 도망칠 곳이 없지만 탑승객은 이따금 짧은 나들이를 다녀올 수 있다. 료하는 당신이 좋아하는 암각화만큼 늙은 친구를 소개하겠다며 라우라를 이끈다. 그날 밤 라우라는 료하의 할머니와 술잔을 기울인다. 유쾌하고 인심 좋은 할머니는 라우라에게 “내면의 작은 동물”을 믿으라며 건배를 청한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라우라는 할머니의 조언을 따라 료하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이유를 곱씹는다. 캠코더를 도둑맞고 나선 자신이 진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사람들, 파티, 아파트, 웃음소리, 음악”이 가득한 모스크바는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그 속에는 소외감과 조바심이 자리한다. 라우라는 이리나의 세상에 흡수되기를 원했던, 그들 중 일부로 녹아들고 싶었던 제 마음을 알아차린다. 기차에서 헤어진 라우라와 료하는 결국 무르만스크에서 재회한다. 기상 악화로 뱃길이 막혀 암각화를 보러 가기엔 무리라고 다들 만류하지만 료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상한 연인이다. 서로 무엇도 기대하거나 약속하지 않은 채 위험을 감수한다. 눈보라 속에서 아이처럼 혹은 내일 죽기로 한 사람들처럼 한바탕 뛰어논다. 영화는 비좁은 기차를 빠져나와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로 그들을 데려간다. 눈 덮인 해안가에서 연인은 바다를 마주하고 말을 잃는다. 엄청나게 큰 것을 함께 보는 경험은 그들에게 무얼 알려줄까. 거대하고 무섭고 독립적인 동시에 모든 것을 포용하는 대자연. 그 앞에서 자신과 상대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 체감하기에, 나란히 선 순간이 거의 기적과도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둘은 침묵하는 것 아닐까. 암각화를 본 료하가 묻는다. “저게 다예요?” 그게 다다. 두 사람도 그 이상 욕심내지 않고 작별한다.
<6번 칸>은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2021)을 연출한 유호 쿠오스마넨의 두 번째 영화다. 데뷔작에서 감독은 1960년대 핀란드 권투 영웅의 사랑 이야기를 다뤘다. 코닥 16mm 반전 흑백필름을 사용하여 고전적 질감을 만들어냈고 로맨스를 중심으로 코미디와 사회 풍자적 요소를 덧입히며 독특한 시대극을 완성했다. <6번 칸> 또한 전면에는 익숙한 여행 로맨스를 내세우지만, 영화는 무엇보다 시대와 시절을 되살리는 데 집중한다. 인물들은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거나 SNS 계정을 ‘맞팔’하는 방식으로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어딜 가든 구글맵으로 위치 정보와 사용자 후기를 확인하는 지금과 달리, 그들은 낯선 이와 동행하고 들개를 뒤쫓는다. 앞날과 세부사항을 알 수 없기에 수시로 덜컹거리지만 여행은 우연과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예상치 못한 범위까지 확장된다. 과거에 존재했으나 더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 <6번 칸>은 어느 순간 멸종된 사랑에 바치는 헌사다. 라우라는 유일한 기록 장치처럼 보였던 캠코더를 잃는다. 대신에 그녀는 잠든 료하의 얼굴을 스케치하고 료하에게도 자신을 그려달라 부탁한다. 이별 직전 료하는 라우라에게 종이 한 장을 전한다. 앞면에는 라우라의 우스꽝스러운 초상이, 뒷면에는 그녀에게 배운 짧은 문장이 있다. 그건 서로에게 새긴 암각화다. 둘은 새천년에도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는다.
리버스 reversemedia.co.kr
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