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의 힘을 믿습니까?
얼마 전 인기리에 막을 내린 <일타 스캔들>의 한 대목을 떠올려본다. 입시 학원계의 스타이자 ‘1조원의 사나이’ 최치열(정경호)은 많은 것을 가졌다. 돈, 명예, 인복까지. 하지만 정작 그는 어떤 트라우마로 인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인간의 가장 기본 덕목인 식사를 하지 못하다니. 그랬던 그가 동네 반찬가게의 사장 남행선(전도연)을 만나고 여러 일을 겪으면서 마침내 식사를 할 수 있게 된다. 밥을 먹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싶지만, 우리가 매일매일 해서 그렇지 식사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조차 없다. 더군다나 주변의 좋은 사람과 한 끼를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 드라마는 다시 가르쳐준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치히로 상>도 마찬가지다. 작은 마을의 도시락집에서 일하는 치히로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으로, 이 영화 역시 식사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한다. 주변 노동자들에게 도시락을 판매하는 것은 물론, 여러 상황으로 식사를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치히로는 밥의 힘을 건넨다. 앞이 보이지 않는 노인, 노숙자, 어린아이, 심지어 풍요롭게 살고 있지만 부모님의 부담감에 밥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여고생까지. 영화는 담담하게 치히로가 이들과 식사하는 장면, 도시락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여주며 따뜻한 기운을 내비친다.
치히로와 이들이 함께하는 식사도 화려하지 않다. 도시락과 라멘, 교자, 그리고 생맥주 등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람,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음식들, 하지만 진정 특별한 것은 다 함께 어울려 그저 행복하게 식사를 하는 순간이다. 영화는 그런 모습을 의미 있게 되돌아보며 인생의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되묻는다.
낮에 만나는 심야식당? <치히로 상>과 <심야식당>이 주는 따뜻함
그런데 이런 이야기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던가? 음식과 사람 이야기를 인생의 희로애락과 잘 버무린 <심야식당>의 잔상이 느껴진다. <치히로 상>과 <심야식당>은 여러모로 닮았다. 평범한 음식과 어딘가 결핍된 사람들이 식사하며 자신의 사정을 토로하거나 희망을 꿈꾼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심야식당>은 손님이 찾아와 자신의 인생에서 기억나는 음식을 주문하고 마스터가 이를 준비하면서 시작한다. <치히로 상> 역시 치히로가 자신이 만든 도시락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그들의 하소연을 듣고 위로하고 다독여준다. 그 속에서 빚어지는 훈훈함이 보는 이를 기분 좋게 한다.
<심야식당>과 <치히로 상>의 닮은 점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음식을 만드는 주인공의 모습. <심야식당>의 마스터는 겉보기에는 뭔가 무섭다. 칼에 베인 듯한 얼굴의 상처가 쉽사리 이 사람에게 다가가기 힘들게 한다. 하지만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고 이야기를 하면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 든다. 마스터 음식을 잘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때문에 마스터인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치히로도 <심야식당>의 마스터와 비슷한 포지션으로 다가온다. 손님에게 늘 좋은 미소와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고 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성 노동자 출신이라는 것. 어떤 이는 그것 때문에 꺼림칙하게 생각하지만 치히로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함께 일하던 언니와 같이 살기도 하며, 그때 자신을 고용한 점장님을 우연히 만나 반가움을 표할 정도다. 치부가 될 수 있는 과거를 더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사람과의 벽을 없애고 더욱 친밀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게 한다. 비슷한 주제와 소재, 주인공의 성품까지 닮은 <치히로 상>은 어쩌면 낮에 만나는 <심야식당>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정겹고 흐뭇하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치히로, 그런 그에게 빠져드는 이유
성 노동자로 일했던 치히로의 과거가 약점으로 묘사되지 않은 점도 특별하다. 그곳에서 일할 당시의 별명이 치히로인데 그것을 이름으로 쓰고 있으니, 자신의 과거를 숨기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 읽힌다. 외로운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는 영화적 장치로 활용해 작품의 색채를 배가한다. 사회적인 시선으로 볼 때 낙후되고 벼랑 끝에 매달린 듯한 그런 곳에서의 근무가 오히려 타인을 이해하고 묘한 희망을 발견하는, 얼핏 상식 밖의 전개도 보여준다. 어르신들이 습관처럼 말하는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지 뭐” 같은 깨달음으로 말이다.
이처럼 주인공 치히로의 모습에 정감이 가는 이유는 이 역을 맡은 아리무라 카스미의 열연에 있다.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아이 엠 어 히어로> 그리고 최근 개봉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에서 좋은 연기를 펼친 카스미는 치히로의 담백하고도 깊이 있는 내면을 설득력 있게 끌어내며 극의 몰입감을 더한다. 아리무라 카스미의 나이는 이제 고작 30세. 그럼에도 극중 치히로가 겪은 인생의 굴곡을 완숙하게 담아내며, 앳된 얼굴 뒤로 세월의 풍파를 단단하게 견딘 캐릭터의 모습을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 여기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의 단골 배우로 친숙한 릴리 프랭키를 비롯한 조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더해져 영화의 온기는 더욱 올라간다.
물론 <치히로 상>도 아쉬운 점은 있다. 영화의 의미와 분위기가 아무리 좋아도, 단조로운 패턴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지루하게 만든다. 치히로가 이웃을 만나 식사를 하고, 소박한 일상을 나누는 것 외에 드라마틱한 순간이 없다. 때때로 이런 특성 때문에 30분 정도 짧은 에피소드 위주의 드라마로 나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인생이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영화의 연속적인 서사 진행이 작품과 더 어울리지도 모르겠다. 심심하다는 단점이 오히려 이 작품의 담백함을 더욱 은은하게 느끼게 해주니깐.
물에 빠질 때 가만히 있으면 사람은 뜨게 돼 있어
발버둥 칠수록 더 가라앉는 거야
극중 치히로의 점장 역을 맡았던 릴리 프랭키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치히로가 아무도 찾지 못하게 그저 물속에 가라앉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때 점장이 “사람은 물에 가만히 있으면 뜬다, 발버둥 칠수록 더 가라앉지”라고 답한다. 바쁜 일상 속에 쉼을 잊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말처럼 다가온다. <치히로 상>이 그렇다. 소소한 에피소드와 만남, 식사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복잡한 생각과 뚜렷한 목적 없이 이 심심함에 삶을 맡겨보는 건 어떨까 싶다. 좋은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 한 끼 하면 그것만큼 행복하고 걱정 없는 순간이 있을까 싶다. 발버둥 치지 않고 지금의 나른함에 내 몸을 맡기듯이 말이다. 그런 힐링을 원한다면 <치히로 상>은 꽤 괜찮은 관람이 될 듯하다. 물론 영화 속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도시락에 배가 고파지는 것은 책임질 수 없지만.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홍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