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이 만든 〈작은 아씨들〉(2019)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쓰는 자의 자의식이다. 자신이 쓴 소설을 잡지에 투고하고자 하는 조(시얼샤 로넌)는, 이런 내용은 잘 팔리지 않는다며 시장의 트렌드에 맞게 잔뜩 뜯어고치자고 하는 편집자 대시우드(트레이시 레츠)의 통제에 시달린다. 팔리는 글 위주로 사업을 영위해 온 잔뼈 굵은 대시우드는 조가 쓴 소설을 뭉텅뭉텅 잘라내며 말한다. “너무 길어요. 막 전쟁을 겪은 나라 아닙니까? 사람들은 즐거움을 원하지, 설교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요즘 세상에 도덕은 안 팔려요. 짧고 자극적으로 쓰세요. 주인공이 여자면 끝에 꼭 결혼시키고요. 아니면 죽이든가.” 조는 그 모든 수모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소설을 투고한다. 어떻게든 제 이야기를 세상으로 보내는 게 중요하니까. 조는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왜 그렇게 조는 쓰는 일에 집착하는 걸까? 물론 정답은 정해져 있다. 조는 원작자인 루이자 메이 알콧의 분신이다. 루이자 메이 알콧은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으며, 커리어 내내 아동문학부터 선정소설, 탐정소설, 고딕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쓴 사람이었다. 그는 쉬지 않고 썼다. 심지어는 연습을 통해 양손잡이가 되었는데, 오른손에 통증이 오면 왼손으로 계속 글을 이어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알콧의 분신인 조 또한 쓰는 일에 집착하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물어보자. 조에게 쓴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이길래 쓰는 일에 그토록 매달리는 걸까?
왜냐하면,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던 시절, 네 자매가 자기들끼리 무엇을 속닥이고 어떤 꿈을 꾸었는지 따위의 일들은 누군가 공들여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잊히기 마련이었다. 언니 메그(엠마 왓슨)의 사교계 데뷔를 위해 공들여 머리를 말아주던 순간의 공기, 자신을 따라오다가 한겨울 호수에 빠진 동생 에이미(플로렌스 퓨)를 간신히 건져내던 절박함, 성홍열에 걸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주변을 돌보던 베스(일라이자 스캔런)의 고운 심성 같은 것들은, 애써 기록할 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자들의 근사한 모험담도 아니고, 정치나 사회 이야기처럼 무게감이 있는 이야기도 아니니까.
거윅의 버전에서 조에게 계속해서 글을 쓰라고 독려하는 것이 베스라는 건 중요한 장치다. 선정소설을 쓰다가 베어 교수(루이스 가렐)에게 혹평을 들은 조는 글쓰기를 멈춘다. 아무도 내 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잖아? 그러나 투병 중인 베스는 말한다. 그래도 뭐라도 써 줘. 나를 위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봐. 투병 중인 베스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베스가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 이어서 써줘”라고 당부한 게 아니었다면, 조도 굳이 자매들의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을 테다. 그리고 베스의 때이른 죽음 이후 조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나머지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베스가 그렇듯 세상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기록해야 한다. 자신이 기록하지 않는다면 사라져서 영영 잊힐 이야기들을.
세상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운이 좋진 않아서, 이렇다 할 기록자를 만나지 못한 이야기들은 허공에 흩어지기 쉽다. 그러나 운이 좋아 조와 같은 성실한 기록자를 만나 기록된다 한들 ‘소녀문학’이라는 딱지가 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작은 아씨들〉 또한 출간 후 10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문학적 가치를 진지하게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랬으니 당대에는 어땠으랴. 자신과 제 자매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조가 대시우드에게 보낸 메모에서도 당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막 시작한 작품의 몇 챕터를 동봉합니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잘 맞겠지만 아마도 꽤나 지루할 거예요. 하지만 혹시라도 가능성이 있을지 몰라 보냅니다.” 대시우드도 답한다. “원고를 읽었습니다. 말씀대로 가능성이 크진 않더군요. 전처럼 자극적인 이야기가 있으면 보내주세요.”
냉정한 편집자 대시우드의 기준으로 ‘지루할 거’라 생각한 걸까? 그것도 아니다. 조는 “요즘 글은 쓰고 있느냐”는 에이미와 메그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한다. “뭐 쓰고 있는데 썩 좋진 않아. 우리 인생 이야기야. 가족끼리 투닥거리고 웃는 이야기를 누가 읽겠어?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잖아.” 하지만 에이미는 힘주어 말한다. “사람들이 그런 글들을 안 쓰니까 안 중요해 보이는 거지.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조의 이야기가 정확하게 그런 이야기였다. 남자들의 흥미진진한 모험담도 아니고, 세상을 경영하겠다는 남자들의 정치 이야기도 아니어서 얼핏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들여 쓴 사람이 많지 않아 미처 중요하단 사실을 알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을 뿐인 이야기. 평범한 여자들의 이야기.
흥미롭게도 루이자 메이 알콧 본인 또한 처음엔 ‘소녀문학’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일평생 여권운동가로 살며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던 사람임에도, 여자아이들이 성장하며 겪는 소소한 인생 이야기 같은 건 영 흥미가 없었던 것이다. 알콧의 편집자 토마스 닐스가 알콧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작은 아씨들〉은 애초에 쓰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콧이 제 가족을 모델로 소설을 쓴 것도, 사실 제 자매들 말고는 여자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쓰는 내내 “그다지 즐겁지 않다”고 투덜거렸던 알콧은, 1부의 성공 앞에서 마음을 고쳐 먹는다. 그 이야기를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제 이야기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알콧은 2부와 3부, 4부를 연달아 써 내려갔고, 〈사랑스러운 폴리〉, 〈여덟 명의 사촌들〉, 〈라일락꽃 피는 집〉 등의 소설을 썼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나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가 남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기록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남기는 것이다. 소설 속 조가, 소설 밖 알콧이, 평범한 여자아이들의 성장기를 집요하게 남긴 덕분에 우리는 1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메그와 조, 베스와 에이미의 세계를 방문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릴 뻔했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기록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