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칸 영화제에서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그랑프리)을 공동 수상한 두 영화 <6번 칸>과 <어떤 영웅>이 한 주 텀을 두고 개봉한다. 이 두 작품과 함께 21세기에 들어 칸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영화들을 엄선해 소개한다.
피아니스트
La Pianiste
2001
1997년 <퍼니 게임>으로 처음 칸 경쟁부문에 초청된 미카엘 하네케는 <미지의 코드>(2000)와 <피아니스트>(2001)로 2년 연속 같은 부문 후보로 올랐다. (영화가 선보이고 3년 후인 20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을 영화화 한 <피아니스트>는 유명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30대 후반 여자 에리카(이자벨 위페르)가 수업을 받는 공대생 월터(브누아 마지멜)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아 마음을 열고 일반적이지 않은 사랑의 방식을 드러내면서 파국에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피아니스트>는 심사위원대상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격정적인 사랑을 품은 두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브누아 마지멜 모두에게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까지 안겼다.
과거가 없는 남자
Mies vailla menneisyyttä
2002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펀치 드렁크 러브>와 함께 감독상을 공동 수상한 2002년. 핀란드를 대표하는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어둠은 걷히고>(1996) 이후 6년 만에 <과거가 없는 남자>로 칸 경쟁 부문에 초청돼 그랑프리를 받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가 린치를 당한 한 남자(마르꾸 펠톨라)가 사망선고를 받았다가 다시 의식을 회복해 기억을 모두 잊은 채로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생활하게 되고 구세군인 이루마(카티 오우티넨)를 사랑하게 된다. 카우리스마키 특유의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무드가 서로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 감동이 더 불어난다. 카우리스마키와 꾸준히 호흡을 맞춘 배우 카티 오우티넨 역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올드보이
2004
<올드보이>의 2004년 칸 경쟁 초청은 여러모로 놀라웠다. 그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건, 영화제에 초대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칸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것과 달리 <올드보이>는 기개봉작 더군다나 자국인 한국에선 개봉한 지 6개월이나 지났다는 점. 액션 장르에 조예가 깊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은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2004년 황금종려상을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이 수상한 게 미국 조지 부시 정부를 겨냥한 다분히 정치적인 선택이었다고 감안한다면 더욱 값진 수상이다. 이후 '깐느박'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박찬욱은 칸에서 2009년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바로 작년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다.
브로큰 플라워
Broken Flowers
2005
짐 자무쉬 감독은 초창기부터 칸 영화제의 러브콜을 받았다. 두 번째 영화 <천국보다 낯선>(1984)이 신인감독상에 해당하는 황금카메라상을 받았고, 바로 다음 작품 <다운 바이 로>(1986)가 처음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이후 근 20년간 <미스테리 트레인>(1989), <데드 맨>(1995), <고스트 독>(1999)이 경쟁 후보에 올라 번번이 수상하진 못하다가, 빌 머레이 주연의 <브로큰 플라워>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바람둥이였던 중년 남자가 태어난 줄도 몰랐던 아들이 자기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과거의 애인들을 찾아가는 기묘한 로드 무비. 도통 속내를 알기 어려운 빌 머레이의 얼굴과 몸짓이 때마다 마주하는 여자 배우들(샤론 스톤, 틸다 스윈튼, 줄리 델피, 제시카 랭 등)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에티오피아 뮤지션 물라투 아스타케를 전 세계에 알린 사운드트랙이 또 끝내준다.
자전거 탄 소년
Le Gamin au vélo
2011
칸 영화제의 편애를 받는 감독이야 많지만, 그중 으뜸은 다르덴 형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1999년 <로제타>로 처음 경쟁 부문에 초청돼 그해 바로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에밀리 드켄)을 받은 걸 시작으로, 이후 발표한 작품 전부가 경쟁작으로 초청돼 두 번째 황금종려상(<더 차일드>) 등 크고 작은 상을 수상했다. 로버트 드 니로가 심사위원장을 맡아 테렌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에 황금종려상을 준 2011년엔 <자전거 탄 소년>이 그랑프리를 받았다. 비전문 배우를 고집하던 기존의 방향을 접고 주연 세실 드 프랑스 등 유명 배우들을 처음 카메라 앞에 세웠지만 평소 다르덴 형제가 포착한 사실적인 공기는 고스란하다.
인사이드 르윈
Inside Llewyn Davis
2013
코엔 형제도 칸 영화제와 연이 꽤나 깊다. 1991년 처음 칸에 초청된 <바톤 핑크>가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건 물론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존 터투로)을 휩쓸었고, 이후 20년간 7편의 작품이 경쟁 부문에 초청돼 감독상만 두 번 추가해 감독상을 세 번 받은 유일한 감독이 됐다. 2013년 작 <인사이드 르윈>은 1960년대 초 뉴욕의 (가상의) 포크 뮤지션 르윈 데이비스가 보내는 며칠을 무덤덤하게 그렸다. 전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시리어스 맨>(2009), <더 브레이브>(2010)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장인적인 연출 솜씨를 선보인 코엔 형제가 이렇다 할 갈래에 속하지 않고 잔뜩 힘을 뺀 드라마를 만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확인할 수 있는 수작이다.
사울의 아들
Saul fia
2015
헝가리 감독 라즐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2015년의 가장 뜨거운 데뷔작이었다.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존더코만도(시체를 분류하는 특수직무반) 사울이 가스실을 청소하다가 아직 죽지 않은 소년을 발견하고 그에게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시체를 빼돌리는 과정을 따라가는 영화다. <사울의 아들>이 열띤 화제를 일으켰던 건 35mm 필름을 핸드헬드로 찍은 카메라 시점이 대부분 사울의 등 뒤 1인칭 시선을 줄곧 유지해 진행하면서 관객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혹한 현장을 추체험하게 하는 연출 방식 때문이었다. 비주얼만큼이나 정밀하게 세공된 사운드가 안겨주는 충격도 대단했다. 놀라운 현장감에 탄복하는 의견이 주를 이룬 한편 고통스러운 역사를 그렇게 실감나게 묘사해도 되느냐는 우려의 견해도 뚜렷했다. 2016년 미국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 외국어영화상까지 수상했다.
6번 칸
Hytti nro 6
2021
칸 영화제는 2020년 코로나19 여파로 행사를 열지 않고, 이듬해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탄 소년>과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가 공동 수상한 2011년 이후 10년 만에 두 편의 그랑프리 수상작을 발표했다. <6번 칸>은 2016년 데뷔작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은 핀란드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의 두 번째 영화다.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로 암각화를 보러 떠나는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는 열차의 같은 칸을 쓰는 남자 료하를 만나 점차 거리를 좁혀간다. 처음 만났을 땐 술 취해 무례할 만큼 치근덕대던 료하를 유별난 연출 없이 순수하고 맑은 남자로 만들어 두 사람의 사랑을 가능케 만드는 따스한 시선이 관객의 마음을 꼭 끌어안는다.
어떤 영웅
قهرمان
2021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는 베를린 영화제와 칸 영화제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성장했다. <어바웃 엘리>(2009)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가 각각 베를린에서 여우주연상과 최고상인 황금공상을 차지한 데 이어,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가 처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이후 최신작 <어떤 영웅>까지 모든 영화가 칸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어떤 영웅>은 빚을 갚지 못해 수감 중이었던 주인공 라힘이 주운 가방 속 금화를 팔아 보석금 내려다가 주인에게 돌려주고 영웅 대접을 받게 되지만 주변의 의심이 깊어지면서 점차 커다란 파국을 향해 가는 이야기다. 딜레마에 부딪힌 인간의 통과하는 갈등과 결단의 과정이 이번 작품에서도 집요하게 그려졌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