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면 갑자기 땡기는 음식이 있듯, 영화도 시기에 따라 갑자기 흥미가 동하는 경우가 있다. 요즘은 한 인물의 심리에 깊이 파고드는 개봉작이 많아서인지 쫀듯한 긴장감이 맴도는 영화가 조금은 생각났다. 특히 작년 말 공개한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을 보고 추리 게임을 플레이한 필자였기에 이런유의 영화는 뭐가 더 있을까 궁금했다.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아이덴티티> <헤이트풀8>를 제외하고, 추리 장르의 긴장감이나 불신의 분위기를 탁월하게 보여준 영화들을 옮긴다.


<저수지의 개들>

쿠엔틴 타란티노

<헤이트풀8>이 나왔으니 그런 미스터리 실내극의 전신이자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을 빼놓을 수 없다. <저수지의 개들>은 사내들의 수다가 이어지는 뜬금없는 오프닝 이후, 미스터 화이트가 총맞은 미스터 오렌지를 옮기는 장면을 펼쳐보이며 이야기를 급가속시킨다. 여기서 떠오르는 미스터리는 바로 이것. '누가 경찰에게 밀고했는가'. 대규모 보석 강도를 계획한 8명의 남자는 그곳에 매복해있는 경찰과 맞닥뜨리고 간신히 도망쳐 은신처에 모인다. 한 사람, 한 사람, 의심스러운 구석이 떠오른다.

영화광 타란티노는 <용호풍운>를 영화의 모티브로 사용한다. 할리우드에서 다루는 '갱스터 영화'가 진짜 갱이나 마피아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옷만 잘 빼입었지 이기적인 범죄자들을 내세워 서로 웃고 떠들었지만 속내는 불신투성이인 군상을 그리는 데 성공했다. 타린티노 감독의 장기, 비선형적 구성은 인물들을 따라가는 관객들을 더욱 헷갈리게 한다. 물론 그만큼 굉장히 뜬금없이 정답을 밝히는 재기발랄함이 빛난다.


<살인 무도회>

조나단 린

국내에선 <살인 무도회>라는 제목으로 수입된 1985년 영화 <클루>(Clue). 보드게임 좀 해봤다면 원제를 보고 '어?'할 수 있다. 해즈브로의 추리 보드게임 '클루'가 생각날 테니까. '클루'는 저택에서 일어난 살인을 수사하는 보드게임으로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한 명씩 맡은 후 자신의 차례마다 수사를 하면서 살인자와 흉기를 찾아야 한다. 영화 <살인 무도회>는 이 '클루'를 영화로 만든 것. 그래서 캐릭터 이름이나 설정도 원작 보드게임에서 가져왔다. 대저택에 초대된 7명 중 한 사람이 살해를 당하고, 집사 보스워스와 손님 6명이 살인자를 찾는 과정을 그린다.

플레이할 때마다 범인과 흉기가 랜덤하게 정해지는 보드게임을 반영하듯 영화도 하나가 아니라 세 가지 결말로 제작했다(최근 버전은 세 가지 결말이 모두 수록됐다). 아직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런 장르를 좋아한다면 꼭 봐야 할 영화 중 하나.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실수 등으로 코믹함까지 더하며 친구들끼리 보드게임할 때의 유쾌한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옮겼다. 에일린 브레너, 팀 커리, 매들린 칸, 크리스토퍼 로이드, 마이클 맥킨 등등 어디선가 얼굴을 한 번쯤 봤던 배우들의 앙상블이 영화를 꽉 채운다. 물론 그중에서도 <나 홀로 집에 2> 집사로 특히 익숙한 팀 커리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외계의 침입자>

필립 카우프만

할리우드에서만 세 번 리메이크된 작품이 있다. 잭 피니의 소설 「바디 스내처」(The Body Snatcher)를 영화화한 <신체 강탈자>다.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인간을 복제하고, 이 감정 없는 복제인간들이 점점 인간을 잠식하는 스토리의 SF 영화. 1956년 처음 영화화된 후 1978년 <외계의 침입자>, 1993년 <보디 에일리언>, 2007년 <인베이젼>까지 세 번 리메이크됐다. 마지막 리메이크작 <인베이젼>을 제외한 세 작품은 「바디 스내처」의 내용을 각자 특색 있게 살려내면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중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작품은 1978년 <외계의 침입자>. 결말을 워낙 강렬하게 만든 탓에 영화를 못 봤어도 결말은 아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거기에 외계 생명체가 복제인간을 만드는 과정을 정말 징그럽게 묘사해 공포감을 더욱 강조했다. 인간과 완전 다른 생명체가 인간의 모습을 위장해 위화감을 조성하는 부분들은 여느 괴물 영화 못지않게 소름 돋는다. 서로를 쉽게 신뢰할 수 없는 그 서늘한 광경이 관객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어떻게 보면 현재 유행하고 있는 '마피아 게임'의 원조격처럼 보인다.


<그리프터스>

스티븐 프리어즈

제목부터 불신의 향기가 슬슬 나는 <그리프터스>는 경마 사기를 비롯해 평생 사기판에서 살아온 릴리와 그의 아들(이자 위장 동생) 로이, 그리고 로이와 사랑에 빠지는 마이라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언뜻 범죄자들이 모여 크게 한탕치는 '케이퍼 무비'를 연상시키는데, 오히려 이 사기꾼들이 이어질 듯 끝내 와해되는 과정을 그린다. 각 캐릭터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그들이 끝끝내 행복한 순간을 쟁취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 무척 씁쓸한 페이소스를 느낄 것이다.

어떤 면에선 캐릭터가 사기꾼들일 뿐, 자신의 이득에 매몰된 사람들을 비유한 부조리극처럼 느껴진다. 초반부의 경쾌함이나 사기꾼들 이야기의 쾌감을 기대한 사람들에겐 영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세 배우의 치열한 연기만큼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부분. <위험한 관계> <팔로미나의 기적> <챔피언 프로그램> 등을 연출한 스티븐 프리어즈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연출이 그들의 연기를 한층 더 빛나게 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토마스 알프레드슨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의 영화라면, 어쩐지 화려한 편집이나 연출이 생각난다. 관객의 눈과 귀를 홀려 속여야 하니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존 르카레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영국 비밀정보부에 침입한 내부 공작원을 색출하는 과정을 정적인 분위기와 무채색에 가까운 화면으로 전한다. 스토리나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가 가볍지가 않아 쉽게 볼 영화는 아니지만, (실제 첩보원으로 일한 원작자 존 르카레의 경험이 녹아든) 총이나 액션 같은 요소 없는 스파이들의 수 싸움을 묘사한 부분은 독보적이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순간들의 고요가 관객마저 숨죽이게 만든다.

사실 이 영화의 매력을 더하는 건 배우들의 얼굴이다. 내통자를 찾아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조지 스마일리 역의 게리 올드만을 비롯, 콜린 퍼스, 토비 존스, 다비드 덴칙, 키어런 하인즈 등 익숙한 얼굴들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요원 리키 타르는 톰 하디가, 피터 길럼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맡았다. 관객들 사이에선 내용은 이해 안되는데 배우들의 연기 때문에 후회 없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