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그 정도면 회사를 그만두고 쉬든지 해야지 극단적 선택까지 할 정도로 다니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B: 내가 직장 다닐 때는 욕먹어가며 했고, 군대 생활할 때는 잠 못 자고 매 맞으며 했어도 굳게 참아가며 했단다. 모든 건 참을성이 모자란 게 아닌지.
영화 <다음 소희>의 대사 같지만 아니다. 오늘, 가족이 다니는 회사에서 한 직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사 링크를 가족 카톡방에 전달하자 A와 B가 뱉은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비난의 목적으로 이들 대화를 소환한 것은 아니다. 대화를 보며 이것이 자살을 대하는 한국인의 평범한 정서라 생각했다. 영화 <다음 소희>에서도 특성화고 고등학생 '소희'(김시은)와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나는 안 그런 줄 아냐?', '회사일이 힘들어서 그런 거라면 그냥 그만두면 되는 거 아닌가요'와 같은 말들이 되풀이된다. 비슷한 죽음에 같은 말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다음 소희>는 지독한 현실 구현이었다. 아니, 우리 가족은 극단적 선택을 한 직원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현실은 영화보다 좀 더 모질고, 가혹하다.
<다음 소희>가 특히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지점은 죽음을 선택한 소희가 작금의 부조리한 시스템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10대라는 점이다. 형사 '유진'(배두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그냥 피해자'일뿐이다. 원청이 하청을 성과로 압박하고, 대표는 팀장을 실적으로 줄 세우며, 팀장은 팀원의 성과를 전시하며 굴욕을 주는 식의 어른들이 주조한 위계의 세계, 그 가장 밑바닥을 '현장실습생'이 떠받친다. 하지만 현장실습생 소희의 고충은 이 사회 청년 노동자들이 겪는 열악한 처지의 일부일 뿐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착취, 폭력, 상해, 죽음은 산업화 시대의 빛바랜 신화처럼 공중을 떠돌다 많은 경우 단신으로도 취급되지 않고 사라진다.
그래서 무지했다. 대학생 청년 틈바구니에서 열여덟 살에 사회인이 된 또 다른 청년의 존재와 '현장실습생' 제도가 작동되는 방식에 대해. '고용의 질'이 아닌 취업률로 시·도 교육청을 평가하는 교육부, 정부로부터 더 많은 예산을 받기 위해 취업률로 학교를 줄 세워 예산을 차등 지원하는 교육청, 학생을 유치하지 못하면 통폐합으로 내몰리는 학교, 학교에서 몇 명이나 취업시켰느냐로 평가받는 교사. 이 거대한 경쟁 원리 속, 저임금 노동력을 원활하게 수급 받으려는 기업주들의 이해관계에 정부가 부응하며 유진의 말처럼 학교는 '불법파견업체'이자 '인력사무소'가 되어있었다.
영화의 전반, 10대 소녀의 죽음의 족적을 고통스레 따라가던 <다음 소희>는 후반부에 우리의 어른, 형사 유진을 등장시켜 사건의 이면을 전한다. 영화 속 유진, 영웅적으로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는 사이다적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유진은 소희 친구들의 굳은살 배긴 손들, 콜센터 대표, 원청인 대기업 관리자, 학교 담임, 형사 과장, 학교 교감을 지나 교육청 관계자를 만나며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며 '내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라는 말에 번번이 좌절한다. 현장실습과 관련된 사고가 반복되고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과 영화 속 뻔뻔한 얼굴들이 오버랩되며, 혼자라도 진실을 밝히고 소희의 죽음에 책임을 묻고자 했던 유진이 그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결론이 일견 무력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의 기저에 깔린 정서는 희망과 낙관이다. 여기엔 부조리한 현실에 대신 주먹을 날려주는 유진이 있고, 유진의 입을 빌려 누군가의 간절한 구조 신호를 지나치지 않는 어른 '정주리' 감독이 있다. 영화에서는 형사 '유진'이었지만, 영화의 모티브가 된 2017년 전주 콜센터 실습생 사망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던 건 당시 청소년 인권 운동 활동가이기도 했던 강문식 민주노총 전북본부 정책국장 덕분이었다. 언론은 17년 탄핵 정국으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을 취재하고 알려, 기억하게 했다. 이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책임을 나눠지던 어른들이 있었기에 故 홍수연 양의 죽음이 사회적 타살이자 산재임을, '다음 소희'는 절대 없어야 된다는 문제의식을 우리는 공유하게 되었다.
유진은 영화 마지막에 또 다른 소희인 태준(강현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또 욱하게 되면 누구한테라도 말해. 나한테라도. 그래도 괜찮아. 경찰한테 말해도 돼'. 다른 소희의 의도적 배치는 영화를 현장실습에 관한 특수한 사례가 아닌 우리 모두의 현실로 바라보게 한다. 영화는 한국 노동 시장의 가장 밑바닥을 떠받치다가 종국에 무너져버린 한 학생을 조망하며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 불평등, 열악한 노동 환경, 불안한 고용구조 등 묵직한 문제들을 소환한다.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비추는 카메라는 열여덟, 일터로 향하는 아이들의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그 누구의 미래도 낙관할 수 없다고 엄중히 말한다.
주 69시간 노동을 가능케 하겠다는 선언으로 시끄러운 요즘이다. 17년 사건 이후에도 '다음 소희'는 반복되고, 열악한 노동 문제도 계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학교는 노동과 안전을 가르치지 않는다. 콜센터의 경우 소소한 변화가 있다고는 하지만, 특성화고 문제는 사실상 변화가 없다.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 없고 땜질식 대책으로 현장학습제도에 구멍이 숭숭이다. 산적한 노동 문제 위에서 펄럭대는 주 69시간 근로제가 노동자의 장기 휴가를 활성화하고 과로를 없애며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낙관의 근거는 빈약하기 그지 없다.
'잊지 말자, 다음의 소희는 절대 우리가 만들지 않는다'라고 눌러쓴 포스터 속 손글씨를 보니 다음 소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은 근로시간 개편안의 폐기 촉구로 과로 사회의 도래를 막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글로리>식 복수도 종종 상상해 보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호한 현실에서 힘을 발하는 건 사회적 책임과 행동이다. 주 69시간 근로제를 발의하는 어른의 건너편,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는 그런 정직한 세계'를 만드는 편에 서자 결심해 본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