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글로리> 파트2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레이션대로, 정말로 영광은 없었다.

복수의 이야기

영화 <코난 - 바바리안>(1981)에서 주인공 코난(아놀드 슈워제너거)은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몇십 년의 세월을 견딘다. 그리고 결국엔 상대방을 무찌르고 왕위에 오른다. 그를 도왔던 부하들은 왕좌 아래에서 기뻐하고 있지만 목표를 이루고 드높은 곳에 앉은 코난은 심한 외로움에 처한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길에서 많은 동료와 아끼는 이들을 잃은 탓이다. 결말을 이룬 뒤에 이런 기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멈췄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기에 딜레마는 더 커졌을 것이다. 동력은 힘이 세지만, 종착지에서 어떻게 할지 몰랐던 인간은 허망함에 잠긴다.

아놀드처럼 미스터 올림피아에서 7회 우승하면, 이윽고 전면에서 등이 보이는 경지까지 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수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다크 나이트>(2008) 조커(히스 레저)의 말마따나 달리는 차를 보면 일단 달리는 개처럼, 원동력 될 수 있으나 이후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야 찐광인이 되기라도 하듯이 진정한 복수를 위해선 한 치 앞도 몰라야 하는 것이 필수 요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복수 이야기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 삼부작'(<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도 그 임무를 끝낸 인물들은 거대한 목표를 이룬 후의 망렴됨을 견디지 못한다. 그나마 금자(이영애)가 가장 건전한(!) 복수를 하긴 했지만 그녀조차도 그토록 원하던 구원을 끝내 얻지 못한다. <악마를 보았다>(2010)의 수현(이병헌) 또한 연인을 죽인 살인마에게 복수를 감행하지만, 계속 같은 패턴으로 복수를 자행하다가 희석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결국 황폐해진 복수의 판타지가 펼쳐지며 인물의 감정은 허망으로 이어진다.

명작 복수극으로 꼽히는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세상 쿨한 복수의 끝을 보여준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한 주인공은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바다 저 멀리 떠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어 보인다. 서사에서 진지한 태도로 복수를 끌어다 썼을 때 그 마지막을 사이다로 끝내는 것은 실은 불가한 요소가 아닐까? 그렇다면 넷플릭스의 <더 글로리>(2023)는 어떨까?

소설을 영화화한 <몽테크리스토 백작> 영화도 매우 좋다.


복수라는 감정의 본질

문동은(송혜교)은 박연진(임지연)을 비롯한 무리에게 복수를 완료한다. 그러나 오직 연진아 연진아 연진아만 부르짖던 그녀의 마음은 황폐화되었고, 모든 동력을 소진한 그녀의 심연 또한 악마들의 그것에 동화됐는지 스스로 연소를 향해 몸을 내던지려고 한다. 이것이 복수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증오의 작동 원리라는 것이 그러니까. 꼭짓점까지는 어떻게든 달려가지만 이후에 삶을 더 이어나갈 여력이 있는지는 본인조차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대개는 재만 남기 때문에 그 많은 복수극의 결말은 황망이라는 감정으로 치닫는 것이 아닐까.

뜬금없다고 했던 지점

그러므로 소희(이소이)가 죽었던 지점에서 동은 또한 뛰어내려 삶을 마감하려 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동은의 삶이 마무리되는 것은 작가도 대중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여정의 엄마 상임(김정영)이 달려와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르짖는다. 살릴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 사람을 살게끔 하는 적확한 논리도 없다. 복수에 눈이 멀어 경주마 같은 삶을 사는 아들이 어떤 결말에 이를지는 직접 낳은 어미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옆에서 그 행위를 객관적이고 조금은 낮은 온도로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이 의사는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동은과 여정(이도현)의 투샷 중 가장 아름다운 씬은 평범하게 국수를 먹는 일상적인 장면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엄마인지 로직컬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 누구나가 감정적으로 원하는 흐름이 아닌가. 복수라는 감정의 근본을 담으면서도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김은숙 작가의 절륜한 내공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근데 김여진 배우랑 김정영 배우랑 헷갈리는거 나만 그런거 아니죠?


드라마가 완성되는 묘한 시점

<더 글로리> 인물들의 이야기 중 지나치게 길거나 심하게 노골적인 부분이 있다. 강현남(염혜란)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 이사라(김히어라)의 마약 구걸과 손명오(김건우)의 대응, 최혜정(차주영)이 성대에 상처를 입은 뒤 말을 못 하는 부분을 조롱조로 표현하는 부분 등이다.

이사라가 약 기운에 저지르는 명오와의 에로틱한 행동이 지금과 같이 생방송처럼 나갈 필요는 없다.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이라는 설정과는 별개로, 개인의 사사로운 일상이 여성혐오의 요소를 띄며 묘사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최혜정의 가슴 노출도 비슷한 궤를 지닌다. 박연진 앞에서 스스로가 더 높은 곳에 올랐다는 승리의 방증으로 그런 행동을 하지만, 이야기의 지점상 참으로 어색했다) 연필어택에 당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혜정의 묘사 또한 장애를 혐오하는 요소를 띈다.

현남이 남편에게 맞는 부분은 파트 1부터 알려져왔고 반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구타의 소리와 멍으로 범벅된 그녀의 안면만 봐도 충분히 각자의 머릿속에서 시각화가 가능하다. 현남은 남편의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 지난날의 서러움과 안도감, 그리고 남아있을지 모를 일말의 미운 정 때문인지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그 감정의 혼재를 보며 통쾌함을 느껴야 하나? 그녀가 계속해서 폭행 피해를 입는 장면을 그렇게 노골적이고 길게 볼 필요가 없다.

이런 식의 연출들에서 가해자의 시점이 느껴진다. 드라마를 연출한 안길호 PD는 학폭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진실은 본인만이 알겠지만, 언론으로 공개된 그의 궤적은 처음엔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다음엔 부인했으며 그리고나서야 인정하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이로 인해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은 기분이 풀리기 위해 폭력을 가했지만, 맞을 만한 놈이 맞았으므로 (정말로) 기억을 못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신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지속적이고 악의적인 폭력 이야기를 진지한 톤으로 다루는 드라마에서 세심한 부분이 모자란 것과 그것을 연출한 사람이 실은 학원폭력의 가해자라는 사실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봄이 오면 죽자

삶이 지독한 구렁으로 떨어져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있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생기는 것 말이다. 실제로 그 1/10만 되어도 정말로 희망은 솟는다. 그런 의미에서 에덴빌라 건물주 할머니(손숙)의 “물이 너무 차다, 그지? 봄이 오면 죽자”는 대사가 품은 실낱같은 등불이 실은 동은이나 할머니 자신에게도 거대한 등대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혹 삶이 너무 비관적이거나 모든 희망이 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지금보다 약간은 나아지면 끝내자는 생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봄이 되면 죽자, 맑게 씻어주는 여름의 세찬 소나기를 보고 죽자, 이쁜 단풍을 보고나서 죽자, 소복하고 차분히 쌓인 함박눈을 보고 죽자…. 그렇게 빛을 좇다 보면 따스함이나 맑음, 새하얀 희망이 다시 들어찰지 모를 일이다.

바닥을 치고 나면 올라갈 일만 남는 것이 삶이다. 그 순리를 수렁에서 건지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만끽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봄이 오면 죽자. 봄날을 등대하며 어떻게든 죽지 말고 더 살자. 누구에게나 영광의 순간(The glory)은 그렇게 찾아오는 법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