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드라마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설정이나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2023년, 가장 처절하고 아름다운 복수극에 전 세계가 반응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파트 2가 공개 3일 만에 영어/비영어 부문 통합 전 세계 1위를 기록했다. 매우 한국적인 소재와 이야기로 <오징어 게임>에 이어 또 한 번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학창 시절에 겪은 폭력으로 인해 영혼까지 부서진 여인 문동은(송혜교)이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극, 그리고 그 복수극에 함께 하게 된 동료들과의 이야기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총 8화에 걸친 파트 2가 지난 3월 10일 공개됐다.
‘넷플릭스 TOP 10 웹사이트’(Top10.netflix.com)에 따르면 <더 글로리>는 파트 2 공개 후 단 3일 만에 1억 2,446만 시청 시간을 기록했다. 이는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TV(비영어) 부문 1위, 영어와 비영어, TV와 영화 부문을 통틀어 전체 1위의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비롯한 23개 국가에서 1위, 총 79개 국가에서 TOP 10에 올랐다. 대체 이런 기록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 인기 비결을 살펴봤다.
송혜교 X 김은숙 작가 조합
“파이팅 박연진, 브라보! 멋지다. 연진아!”
김은숙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학교 폭력 피해자 문동은과 연기 경력 27년 차 배우 송혜교가 만났다. <더 글로리>의 흥행 요인을 꼽자면 십수 가지 정도를 줄줄 읊을 수 있지만 가장 먼저 꼽고 싶은 건 역시 흥행 보증수표인 두 예술가의 조합이다. 성인이 되어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박연진(임지연)과 그 무리들을 쫓아 모교까지 따라간 동은이 연단에 오른 연진을 향해 기립 박수를 쳐대던 순간은 배우 송혜교가 그간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일그러진 웃음을 보여줬던 순간이다. 배우의 연기 변신과 함께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자극적이고 끔찍할 거야. 막을 수도 없앨 수도 없을 거야”라는 서늘한 내레이션이 없었다면 배우의 감정이 돋보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 글로리>는 단지 복수극의 짜릿한 장르적 특성이나 시대성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타의 이미지를 비틀면서 공감, 아니 공분을 불러일으키게끔 했던 호소력 짙은 명장면이 있었기 때문.
또한 송혜교 배우는 상대역인 이도현 배우와 나이 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연기력으로 어떤 제반 조건도 불식시키는 케미를 보여줬다. 송혜교는 최근 전 세계 팬들과 만난 글로벌 GV 이벤트 자리에서 “아픔 많은 캐릭터를 표현하면서 힘들고 슬프기도 했지만 문동은 같은 인물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드릴 수 있어 너무나 뜻깊었다. 모든 분들이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작품에 출연하게 되어 정말 더 영광이었다”고 훈훈한 출연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날카로운 문동은의 복수법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낚는다
“당신들도 나처럼 뜨거웠기를. 쓰리고 아팠기를.”
<더 글로리>는 다른 드라마 시리즈의 공개 방식과 달리 총 16화를 두 개의 파트로 나누어 공개했다. 국내 OTT 드라마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회차 진행에 대해서 다양한 실험을 거쳤는데 국내외 드라마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회차, 이야기 진행 규모였다. 대개의 해외 드라마들이 시즌제로 9-10화 분량을 한 시즌으로 도입하는데 국내 드라마는 보통 16부작으로 끝을 맺곤 했다. OTT 시대에 16화라는 호흡이 다소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를 두 개의 파트로 쪼개면서 마치 시즌제를 연상케 했던 것. 16부작에 익숙해 있던 김은숙 작가의 입장에서는 회차를 줄여서 서사 진행을 급하게 이어가기보다는 복수극의 구도와 전개를 손명오(김건우)의 죽음을 기점 삼아 두 파트로 나누어 진행시키는 타협을 본 셈이고 이는 흥행과 화제성을 잡는데 주효했다.
기본적으로 문동은의 복수 방식은 직접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문동은이 위기에 처하는 순간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박연진을 중심으로 전재준(박성훈), 이사라(김히어라), 최혜정(차주영), 손명오가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마치 씨줄과 날줄 얽히듯 악수가 겹쳐 공멸에 이르게끔 설계한 것이 <더 글로리>만의 복수 방식이다.
명오가 연진의 명찰을 두고 욕심대로 행동하다가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는 것이나, 연진의 엄마에게 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줬지만 이를 내치는 식의 진행이 이에 해당한다. 심지어 복수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동은을 평생동안 괴롭혔던 엄마 미희(박지아)의 법적 거취를 유일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동은 자신임을 활용하는 순간, 뿌린 대로 거두게 됨을 알려주는 문동은만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노 유발 학폭 가해자들
“막기에는 글렀고 피할 수도 없겠고,
그럼 다 당해야지 끝나는 건가, 이 복수가?”
법치 국가의 일원으로서 현실에서의 사적 복수는 절대 용인할 수 없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행위다. 하지만 창작의 영역에서 관객과 시청자는 인물이 처한 상황에 감정 이입하게 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문동은의 끔찍했던 고통의 기억이 18년이나 지닌 극중 현재 시점에서도 공분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건 역시나 구원조차 허락하고 싶지 않은 나쁜 악역들 덕분이다. 이를 연기한 배우들 모두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박연진을 연기한 임지연 배우는 이전에는 악역을 연기한 적이 없는 생애 첫 악역 도전이었다. 사실은 전작 <장미맨션>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에서부터 그의 연기 변신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장미맨션>에서 그가 연기하는 지나라는 인물은 살인마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되는 실종된 언니를 찾아 아파트를 헤매는 저돌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악역인지 선역인지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섬뜩한 표정을 종종 보여주곤 했는데 박연진에 이끌린 시청자라면 <장미맨션>에서의 임지연도 주목할 만하다.
마약에 빠져버린 목사의 딸 이사라(김히어라)와 세탁소집 딸 최혜정(차주영), 이들의 심부름꾼 역할인 손명오(김건우) 모두 공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못된 연기를 잘 살렸지만 유독 눈에 띄는 캐릭터는 금수저 빌런 전재준(박성훈)이다. 그는 세상을 자기중심적, 아니 자기 ‘돈’ 중심적으로 받아들이는 독특한 화법을 매력적으로 잘 살렸다.
복수의 연대
<더 글로리>에서 복수를 담당하는 역할은 문동은 혼자만이 아니다. 동은이 18년 동안 준비한 복수를 멋지게 성공시키기 위해서 실은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것으로 드러난 ‘칼춤 추는 망나니’ 역할의 주여정과 딸을 반드시 지키기 위해 숭고한 선택을 하게 됐던 강현남(염혜란) 등이 동은의 여정을 외롭지 않게 도와준 조력자들이다. 마치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의 복수를 돕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감방 동료들의 역할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아픔을 갖고 있고 타인에게 마음을 베풀 수 있는 선한 인물이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들의 복수를 마음 한편에서 응원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물론 드라마가 끝난 이후에도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하예솔양(오지율)이 입게 될 상처다. 이에 대해서 동은은 진심으로 그 아이에게 사죄를 했지만 앞으로 시즌이 이어진다면 다음 시즌에서 꼭 풀어야 할 숙제가 될 것 같다.
사적 복수의 승리인가,
시즌2 기다리게 하는 결말
최근 이 드라마는 연출을 맡은 안길호 PD의 과거 학교 폭력 사건이 불거져 나오며 시즌2의 행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여러 언론에서 기사화된 내용을 보면, 해외 한인 커뮤니티에 1996년 당시 국제학교 재학생 사이에서 있었던 일화가 올라왔고, 그 장본인이 안길호 PD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안 PD가 직접 자신의 과거 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아마도 시즌 2가 제작된다면 이어서 연출을 맡기가 곤혹스러운 상황이 됐다. 연출자는 교체될지 몰라도 김은숙 작가가 계속 합류해서 극을 이어 나간다면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하는 시즌 2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 볼 수 있다. 시즌 2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기에 앞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문동은과 주여정은 그래서 행복해졌을까. 두 사람이 행복해졌는지는 확답할 수 없겠으나, 적어도 어제의 고통으로 인해서 내일을 포기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엔딩이었다.
김현수 영화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