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배우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레슬러>(2008)는 한때 잘 나갔지만, 이제는 지난 시절의 영광을 그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퇴물 레슬러의 재도전기를 그린다. 놀라운 것은 정말로 그런 궤적으로 살아온 배우 미키 루크를 캐스팅하여 미친 연기를 보이게 한다는 것. 최근작인 <더 웨일>(2023)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찰리 역할의 브렌든 프레이저는 <미이라>(1999) 시리즈를 통해 대성공을 거둔 섹시스타였지만 무리한 촬영으로 중상을 입고, 성추행의 피해 등으로 망가져갔다. 우울증과 폭식증이 겹쳐 수렁에 머물렀다. 극 중의 찰리가 겪은 수난이 그의 이야기로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엄격한 유대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가족 친지 중 제대로 된 인간은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대런 감독의 종교관은 마치 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비로소 무신론자가 된 학부생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전작인 <노아>(2014)는 성서만을 오롯이 믿는 자들에게 똥물을 퍼부었고, 여성의 시점에서 다시 쓰인 <마더!>(2017)에서 또한 비슷한 시선을 읽을 수 있다. 이제 그의 영화에서 종교적 색채가 빠지면 허전한 경지까지 이르게 됐다.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
찰리(브렌든 프레이저)의 옛 연인인 앨런의 성경 책에는 육체는 죄를 짓는 근원이 되고, 육체 안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되어있다. 이 대목은 육체의 욕망은 곧 죄라는, <더 웨일>에서의 공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인공을 비대하게 만든 식탐 또한 육신이 저지를 수 있는 죄로 설명한다. 이런 면들 때문에 찰리는 토마스(타이 심킨스)에게 자신이 혐오스러워 보이냐고 묻는다. 토마스는 아니라곤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숨기진 못한다. 이는 스크린을 뚫고 나와 실제 기독교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말로 육신이 죄인가? 그것이 사실은 마음 저변에 자리한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나?
찰리의 딸 엘리(세이디 싱크)와 토마스의 관계도 생각해보자. 아내 메리(사만다 모튼)는 찰리에게 딸인 엘리를 “쟤는 악마”라고 말한다. 악마는 토마스에게 억지로 대마를 피우게 하고는 이를 카메라로 찍는다. 그리곤 그 사진을 그의 가족에게 보내버린다. 우리는 여기서 '와… 악마 맞네…' 하게 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토마스는 이로인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기독교인이 사탄이라고 불리는 존재의 선심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이는 엘리의 에세이가 견지하는 태도와도 비슷하다)
영화의 수미쌍관적인 요소로서 「모비딕」에 대한 에세이를 읽는 것이 나온다. 전반부, 종교인인 토마스의 그것은 찰리의 육신에 박힌 고통을 조금은 완화해 준다. 그러나 악마인 엘리가 음독하는 것은 아예 찰리를 구원해 버린다. 이 또한 반기독교적 장치로 이용된다. 그리고 여기엔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인 소설 「모비딕」과 연계된 지점이 있다.
모비딕
소설 「모비딕」의 선장 에이헙이 엘리와 비슷하다면 고래 모비딕은 찰리를 닮았다. 에이헙은 모비딕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으며 혈투를 벌이다보니 원망으로 변모한다. 가족을 버린 아빠를 향한 미움은 얼마나 육중할까. 그리고 에이헙은 모비딕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된 순간에 그의 삶을 마감하는 에세이의 청음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비딕의 최후에 동반한 에이헙 선장처럼, 엘리의 에세이 낭독을 찰리가 듣는 순간 비로소 그의 죽음이 완수되고 있다는 의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엘리가 썼던 에세이의 내용을 복기해보자. '에이헙은 거대한 목표를 가진 것처럼 모비딕을 쫓아다니면서 못살게 군다. 그러나 그는 과녁에 도착한 다음에 느낀 것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하지, 고래는 감정을 느끼는 녀석이 아니니까. 소설에는 모비딕에 대해서 작가가 묘사해 놓은 지점이 있다. 지금까지 긴 시간 동안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준 독자들을 향한 무안함과 자괴감을 견디지 못한 결과물로 보인다.' 엘리는 에이헙 선장의 삶이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을 상당히 닮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치 있다고 생각한 일에 열중했는데, 결국 그 결과는 허무에 대한 발견이었던 것이다. 엘리는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기분을 간파하며 약간의 연민과 큼직한 냉소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모비딕>이 품은 어떠한 가치보다 더 거대해진다.
이건 실은 <더 웨일>에서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일 수 있다.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인간이 의미를 만들어봐야 도달하는 곳은 무의미인데, 무리해서 가치를 부여하니 번뇌든 갈등이든 온다는 것이다. 이 논점에서 보면 무가치의 이합집산이 곧 인간의 삶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인류는 가치를 만들지 못하면 죽는 병에 걸렸고, 그것을 되려 저주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공허의 꼭지점에서 만들어낸 가장 가치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신, The God 일 것이다. 아닌가, 신이 인간을 만든 건가.
신이 7일에 걸쳐 세상을 창조했다면 찰리는 7일에 걸쳐 자신의 마지막 나날을 조각한다. 찰리는 에세이 수강생들에게 자신만의 진실을, 8년 만에 찾아온 아내에게는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을 부각한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찰리의 결핍은 진실과 타인에 대한 주목일 것이다. 찰리의 옛 연인인 앨런에 대한 트라우마는 거기서 비롯됐다고 유추할 수 있다. 종교인이지만 동성애에 빠진 연인을 진실로 대했고, 죽어가는 그를 위해 극진한 관심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비극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의 처참한 마음이 지금도 이어지는 이 순간에 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딸 엘리만큼은 진심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에게 무심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뿐이었을 것이다. 찰리가 검증하려 했던 진실의 마음이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인간의 본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타인을 향한 사랑을 발명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의 의미란
홍수가 났다. 어느 목자가 지붕에 올라가 신에게 기도했다. 곧 구조대가 왔지만 그는 신이 자신을 구해줄 거라며 도움을 거부했다. 결국 그는 물살에 휩쓸려 사망했다. 하늘나라에서 신을 만난 목자는 신에게 야속함을 전한다. 신이시여, 구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신이 말했다. 널 구하려고 구조대를 보냈는데 왜 거절했냐 이눔아.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여기서 신이 돕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스스로를 돕는' 것이다. 종교에서 실생활로 확장하자면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일게다.
그렇다고 해서 '신이시여, 부디 저에게 실천할 수 있는 실천의지를 주십시오' 라는 식의 기도는 하지 말자. 신의 유일한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력만이 구원의 본질임을 깨닫게 해준 것일지도 모르니까.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