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복수 삼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그리고 드라마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수심은 건강에 좋은가? 이우진(유지태)에 따르면 그렇다.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의 두 번째 장 〈올드보이〉(2003)의 빌런 이우진은 오대수(최민식)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지난 세월을 견뎠다. 15년 만에 사설 감옥에서 풀려난 오대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이우진은 오대수에게도 복수를 권한다.
“덕분에 그동안 잘 지낸 셈이야. 심심하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고. 상처받은 자한테 복수심만큼 잘 듣는 처방도 없어요. 한번 해봐. 15년간의 상실감, 처자식을 잃은 고통, 이런 거 다 잊어버릴 수 있을 거야. 다시 말해서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
그러나 복수 삼부작에서 복수로 구원을 얻는 이는 아무도 없다. 〈복수는 나의 것〉(2002)의 류(신하균)는 제 신장과 돈을 떼어먹은 장기 밀매단에게 복수한다. 그런다고 세상을 떠난 누나(임지은)가 살아돌아오진 않는다. 동진(송강호) 또한 제 딸(한보배)을 납치해서 죽도록 만든 류와 영미(배두나)에게 처절하게 복수한다. 그런다고 딸을 잃은 허망함이 풀리지 않는다. 심지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서, 동진 또한 영미의 무정부주의자 동료들에게 복수를 당한다. 동진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다.
〈올드보이〉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복수를 한다고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그마저도 모두 이우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임을 깨달은 오대수는 크게 좌절한다. 정교한 설계로 오대수를 향한 복수를 마친 이우진은 누나 이수아(윤진서)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던 이우진은 틀렸다. 복수심은 한 사람의 인생을 모조리 태우는 큰불이다. 불이 타오를 때엔 그 기세가 좋지만, 복수가 끝나고 나면 그 자리엔 재만 남는다. 어쩐지, 이우진이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더랬다.
“하지만, 복수가 다 이뤄지고 나면 어떨까? 아마 숨어 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걸?”
〈친절한 금자씨〉(2005)의 등장인물들은 어떨까? 백선생(최민식)을 향한 복수에 동참한 유가족들이나, 복수를 도와준 주변인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복수를 주도한 이금자(이영애)는 구원을 얻지 못했다. 모든 복수가 끝난 뒤 금자는 원모(남송우)의 환영을 본다. 금자는 원모에게 용서를 구하려 하지만 원모는 그 말을 듣는 대신 금자의 입에 재갈을 물려버린다. 원모를 죽이고 제 삶을 망친 끔찍한 연쇄살인마 백선생을 처단하는데 성공했다고 해서, 원모의 유괴를 공모했던 자신의 죄가 씻기진 않는다는 걸 금자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말미, 금자는 두부 모양으로 만든 케이크를 들고 딸 제니(권예영) 앞에 선다. 영화 초반 전도사(김병옥)가 “두부처럼 하얗게, 더는 죄짓지 말고 살라는 뜻”이라며 건네주던 두부를 떨어뜨렸던 것과 정확하게 대구를 이루는 장면이다. 전도사의 두부를 거절할 때의 금자는 아직 두부를 먹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백선생을 살해할 생각으로 마음이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다가, 원모의 진범을 살해하는 행위를 통해 제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죄를 씻는 게 불가능하단 걸 깨달은 영화의 말미, 금자는 직접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만든다. 그리고는 절박한 심정으로 두부 케이크에 얼굴을 처박는다.
금자가 복수 삼부작의 모든 등장인물 중 가장 정교한 복수를 추구한 사람이란 걸 생각해보면, 그 결말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하다. 금자는 자신의 복수가 미학적으로 온전하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예뻐야 해, 뭐든지 예쁜 게 좋아.”), 윤리적으로도 충족되기를 바랐다. 원모를 유괴한 죄를 용서받겠답시고 원모의 부모 앞에서 제 손가락을 자르며 빌었고, 백선생에게 복수해야 할 사람이 자기 하나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후에는 복수를 다른 피해자들에게 양보했다. 십수 년을 이 복수 하나만 계획하며 살아온 금자의 복수는 그만큼 단단했지만, 그것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 결말이 아주 슬프지 않았던 건 그런 금자를 안아주는 딸 제니 덕분이었다. 내레이터의 말처럼, 금자는 끝내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금자에겐 복수가 끝난 뒤에도 사랑할 무언가가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올드보이〉의 오대수에게도 미도(강혜정)가 있었지만, 미도를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형벌이 되어버린 오대수와 달리 금자는 아무 죄책감 없이 제니를 사랑할 수 있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건 복수심이 아니라, 그 많은 일들을 겪고 난 뒤에도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파트 2가 공개된 김은숙 작가의 복수극 〈더 글로리〉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주여정(이도현)의 존재가 어정쩡하다고 말한다. 스토리 전개 상 주여정이 없었다고 한들 문동은(송혜교)의 복수가 크게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점을 짚으며, 로맨스 드라마로 일가를 이뤘던 김은숙 작가가 끝내 제 습관을 다 버리지 못하고 굳이 불필요한 로맨스를 삽입한 게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아마 주여정이 없었다고 해서 문동은의 복수가 성공하지 않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동은은 아주 성실한 복수자이고, 그의 표현대로 주여정 없이도 그 복수는 99% 성공했을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로맨스가 필요해서 주여정이 등장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문동은이 복수가 끝난 뒤에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기에 로맨스가 등장한 쪽에 가깝지 않을까?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에서, 복수자들의 인생은 모두 예외 없이 파멸한다. 금자 한 사람만 빼고. 우리는 금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보았지만, 그의 인생이 파멸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금자는 류와도, 동진과도, 오대수와도, 이우진과도 다르다. 그건 금자에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 제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복수를 모두 마친 문동은은 자기 파멸의 유혹에 시달린다. 그걸 막아준 건 주여정의 존재였다. 문동은의 시계는 복수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현재를 향해 흘러가게 되었지만, 그 시간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건 사랑이었다.
그러니 문장은 다시 쓰여야 한다. 복수심이 건강에 좋은 게 아니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무언가야말로 건강에 좋은 것이다.
이승한 TV저널리스트